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문산(文山) 김삼룡 선생이다 |
“왕도의 후예로서 자부심을 갖고 꿈을 이뤄라”는 메시지를 아끼지 않았던 큰 어른. 그는 ‘더할 익(益)’자에 ‘뫼 산(山)’자를 쓰는 익산의 지명을 더 없이 좋아했다.
산 가운데서도 이익을 주는 산이라, 시민들의 저마다 꿈이 만사형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늘 소망했던 것. 일평생 지역발전과 인재양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온 고인의 발자취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백제역사발굴의 획을 그은 학자이자 향토사학자이며, 교육자, 애향운동가 등 그를 따르는 유난히 많은 수식어사를 뒤로하고라도, 큰 어른의 그 한마디가 가슴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향인 정읍 북면에서 14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해 익산으로 온 그는 19세까지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받고 총부에서 지냈다.
교육 허가 승인이 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공부할 여건조차 어려웠던 시절에도 멈출 수 없었던 배움에 대한 갈증은 그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광대 전신인 유일학림 1기 졸업생으로, 교무처장과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그는 철저하게 원불교 정신에 입각하는 삶을 살았다.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학과개설에 힘쓰는 한편, 지역의 인재들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교육자였다. 히 고인은 익산과 관련, 과거 왕도의 가치를 재정립하기 위한 연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경주나 공주, 부여와 같이 왕도의 문화유적이 사방에 산재해 있지만, 익산 시민조차 익산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 출발이었다.
고인은 지난 1973년 마한백제문화연구소를 만들어 초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잊어져 가는 백제의 넋을 되살리고 익산지역문화를 부각시키는 일에 앞장서왔다.
일생을 미륵사 조사와 발굴, 왕도 익산천도를 규명하는 일에 매달렸던 그에게 백제문화는 어쩌면 생명과도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 익산 역사유적지구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최종 통과된 쾌거는 이와 같은 어른이 지역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는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터다.
전북을 향한 애정, 그 일편단심 또한 남다른 그였다. 전북을 ‘개땅쇠’라 헐뜯는 일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는 지난 1997년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와 함께 발족된 전북애향운동본부 부총재를 시작으로, 1987년부터 15년 여 동안이나 총재직을 맡아오면서 도민을 결집하고, 애향이라는 단어를 도민의 가슴에 새기며 울고 웃었다. 주저앉을 뻔 한 새만금 사업을 도민과 함께 지속시킨 일이나 이리역 폭발사고 때 보여준 도민의 힘 또한 잊을 수 없는 일화로 고인의 이름과 함께 회자되고 있다.
정읍출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 중국문화대학 명예철학박사, 일본 쯔꾸바대 문학박사, 러시아 모스크바대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득했다. 원광대 교수를 거쳐 총장을 지냈으며,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초대소장, 전북애향운동본부 총재, 한국원불교학회 초대회장, 익산사랑장학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전라북도 어른상, 국민훈장 동백장, 무궁화장 등의 서훈이 있다. ‘한국미륵신앙의 연구’, ‘익산문화권의 연구’, ‘동방의 등불 한국’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참고문헌>
1. 김미진, "문산 김삼룡이 걸어온 길-왕도의 후예 자부심 갖고 걸어온 외길", 익산열린신문, 2014.5.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