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 살펴보니

대선 | 2023.08.30 10:04 | 조회 2048
23.08.30 13:22최종 업데이트 23.08.30 13:22

▲ 국방부가 육군사관학교 교내뿐 아니라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에 대해서도 필요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연합뉴스


무장 독립투사 다섯 분의 흉상을 육사 경내에서 치우겠다고 나선 윤석열 정권의 공세가 홍범도 쪽으로 집중되고 있다. 국민들의 격한 반발로 인해 5인 전체를 폄하하기가 쉽지 않아서인지, 소련과 연계된 홍범도의 '결격 사유'를 부각시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28일 국방부가 배포한 입장문에 따르면, 윤 정권이 생각하는 홍범도의 '죄목'은 이렇다.

"장군께서 1921년 소련 자유시로 이동한 이후 보이신 행적과 관련해서는 독립운동 업적과는 다른 평가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고,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 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자유시 참변 발생 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5군단 소속 조선여단 1대대장으로 임명 등의 역사적 사실이 있음."
"1921년 6월 러시아공산당 극동공화국 군대가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을 소련공산당과 연관 지어 설명했지만, 이는 부정확하다. 1921년 6월 28일 자유를 의미하는 스보보드니에서 발생한 자유시 참변 당시, 현지에서 공권력을 행사한 주체는 소비에트공산당이 아니었다. 1920년 4월 6일 수립된 극동공화국(원동공화국·치타공화국)이 주권을 행사하는 곳이었다.

극동공화국은 소련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지만, 소비에트의 일원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별개였다. 소비에트에 합병된 것은 1922년 11월이다. 2005년 <대동문화연구> 제52집에 수록된 홍웅호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의 논문 '극동공화국 건설에 나타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한 단면'은 "소비에트공화국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지닌 독특한 공화국"이었다고 평한다.

그래서 자유시 참변에 동원된 부대는 극동공화국 군대이지 소련 군대가 아니었다. 2021년 10월 <지식의 지평>에 기고된 신주백 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논문 '독립전쟁과 1921년 6월의 자유시 참변'은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29연대 소속 병력 1만여 명"이 자유시 참변에 동원됐다고 기술한다. 자유시 참변을 무조건 소련과 연결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국방부 입장문, 경솔한 주장들

국방부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자국 경내에서 무장해제를 요구한 극동공화국에 대해 한국 독립군 일부가 저항해 발생한 자유시 참변 과정에서 홍범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도 정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자유시에 있던 독립군을 몰살시켰던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이라는 입장문은 홍범도가 극동공화국의 앞잡이가 되어 독립군 장병을 살해한 듯한 느낌을 준다.

홍범도는 극동공화국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했다. 이를 굴욕이나 투항으로 평가하는 것은 경솔하다. 극동공화국 영내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의 협조를 받아 항일투쟁을 이어가려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싫다면, 일본군이 아닌 극동공화국 정부군에 정면으로 맞서야 했다.

처음부터 그곳에 가지 않았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도 경솔하다. 3·1운동,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군이 독립군 잡기 위해 총공세를 벌이던 시기였다. 화력이 떨어지는 독립군들이 일시 숨을 고르는 데는 러시아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이성을 상실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못 찾으면 한국 교민이라도 살해했다. 이 당시, 압록강·두만강 너머에서 일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대단했다. 홍범도가 부대 일부를 자유시로 옮긴 것은 교민들의 신변을 지켜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그로서도 당시의 일본군 기세는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자유시로 들어가 무장해제를 수용했지만, 그렇다고 참변의 직접적 당사자가 됐던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시에 체류한 여러 독립군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곳에서 갈등을 벌인 두 주체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상하이파 고려공산당 당원들이었다. 이르쿠츠크파 중 하나가 오하묵이고, 상하이파 중 하나가 박일리아였다.

자유시에 들어간 홍범도 부대는 고려혁명군정의회에 편입됐지만, 이르쿠츠크파와 상하이파의 갈등 구도에서 홍범도는 국외자였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의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은 이렇게 서술한다.

"홍범도 부대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기 직전인 6월 25일 안무·이청천 등 부대와 함께 고려혁명군정의회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군정의회 사령관 깔란다리시윌리와 오하묵은 자기 진영에 합류하지 않고 있는 박일리아 부대 및 일부 간도 독립군 부대에게 여러 번 경고하였다. 군정의회 측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불행한 사태가 초래된다는 것이었다.

누차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박일리아 등 상하이파 독립군 측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군정의회 측에서는 급기야 무력의 행사를 결정하였다. 1921년 6월 28일 깔란다리시윌리와 오하묵은 자유대대 및 러시아 적군 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 의용대로 불리우던 박일리아 진영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참극을 빚고 말았다."


이르쿠츠크파는 현지 공권력을 등에 업고 상하이파를 공격했다. 홍범도 부대는 형식상 이르쿠츠크파의 지휘를 받았다. 이를 근거로 홍범도가 가해자인 듯한 인상을 조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가 가해자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전혀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연관됐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위 신주백 논문에 인용된 청산리전투 참가자 김승빈의 목격담이다. 참변 이튿날, 김승빈은 이런 풍경을 목격했다.

"자유시에 와 있던 홍범도 군대와 하사양성소 두 부대에서 군인 80여 명을 동원하여 전장 소제를 하였습니다. 즉, 전사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였습니다."

같은 동포인 데다가 독립군 동지인 사람들이 이국땅에서 서로 싸우다가 희생됐다. 그렇다면, 전투 현장을 정리해 주는 정도의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서글픈 역사 외면한 채 개인 문제로 모는 것은 어불성설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등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들이 29일 오후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에서 육군사관학교의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 권우성


국방부 입장문은 참변 뒤에 홍범도가 군사재판위원이 된 것을 문제 삼았지만, 이는 문제 될 것이 전혀 없었다. 현지 공권력과 이르쿠츠크파가 일으킨 참변을 사법적으로 수습하는 데는 홍범도가 적임인 측면이 있었다.

홍범도는 일시적으로 이르쿠츠크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고 있어 군사적 권위를 띠고 있었다. 명성도 있었다. 거기다가 현지인이 아니었다. 이런 권위와 명성과 중립성은 재판 결과에 무게를 실어줄 만한 요인이었다. 재판에 참여한 사실을 갖고 자유시 참변의 연루자인 듯이 몰아가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이처럼 홍범도가 가해자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국방부는 증거가 아닌 의혹을 제기하면서 흉상 철거를 정당화하고 있다.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음"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국방부가 적절한 학설이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도 홍범도 흉상을 치우려 하는 것이다.

자유시 참변과의 관련성 여하를 떠나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의존하고 소련 땅에 정착한 것을 문제 삼는 지적도 있다. 이 역시 모순에 찬 지적이다. 숱한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이 바로 그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역사를 외면한 채 이를 홍범도 한 사람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유시로 들어가기 전에 홍범도는 중국이나 러시아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위 장세윤 책은 자유시참변 6개월 전의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 무렵 그는 임시정부 특파원인 안정근·왕삼덕 등과 함께 중로(中露)연합선전부 조직에 참여하여 간도지부 집행군무사령관의 직책을 맡았다"라며 "중로연합선전부는 그해 8월경 상하이 임시정부와 러시아 혁명정부 사이에 맺은 공수동맹 조약문의 제5항 규정에 따라 설치"됐다고 말한다.

3·1운동 직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분열이 별로 없었다. 거대한 전국적 민중의 힘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에 그 민중만 바라보며 독립운동을 할 때였다. 그래서 독립과 해방에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이념 여하를 불문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던 시기였다. 임시정부도 그랬고 홍범도도 그랬고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도 그랬다. 이런 시기에 홍범도가 공산주의와 과감히 손잡고 일제에 맞섰던 것이다.

홍범도는 임시정부의 방침에 따라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를 모색했다. 이것이 자유시 이동으로 이어졌다. 우리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법통을 임시정부에 두고 있다. 따라서 임시정부 방침에 따라 러시아와 연대한 홍범도의 행위는 대한민국 체제에서 합헌이다. 정부가 빨갱이니 아니니 하며 흠잡을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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