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의 상징인 전월산과 임난수 장군

신상구 | 2021.02.08 02:26 | 조회 3621

                                                                   세종시의 상징인 전월산과 임난수 장군
 

▲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사진은 상려암. 부안임씨 대종회 제공
▲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사진은 독락정. 부안임씨 대종회 제공
   '중국 원나라가 망하고 明(명)나라가 들어섰지만 제주도는 여전히 원나라의 직할영지처럼 몽고인들이 주둔하여 대규모 말 사육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의 통치가 이들 몽고인들에게는 먹히질 않았다. 역사는 이들 말 사육을 하는 몽고인들을 '목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몽고 목호들은 나름대로 제주도를 방어하기 위해 일본의 왜구들까지 용병으로 끌어 들여 병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이럴 때 明에서 제주도에 있는 말 3000 마리를 보내라는 요구가 떨어 졌고 고려는 화약을 받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목호들은 이에 반발하여 주민 300명을 살해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려는 난을 평정하기 위해 1374년 8월 최영 장군을 최고사령관으로, 임난수(林蘭秀)장군을 비장으로 하여 전라도 나주포에서 출정에 나섰다.

   군사 3만5600명에 병선 300척으로 큰 규모의 원정군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상륙부터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목호의 몽고인들 저항이 완강했다. 치열한 공방 끝에 고려군이 상륙에 성공했고 목호들은 제주도 서귀포 남쪽 범섬으로 후퇴 했다.

   범섬 역시 해안이 가파르고 해상에서는 은폐물이 없어 상륙작전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임난수 장군의 뛰어난 전략으로 적을 제압하고 추격했다.

   그 치열한 싸움 가운데 뛰어든 임난수 장군이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는데 갑자기 숨어 있던 적이 뒤에서 나타나 임난수 장군을 칼로 내리쳤다. 순간 장군의 오른 팔이 떨어져 나갔다. 피가 쏟아져 내렸다. 장군은 부장에게 떨어진 팔을 주어 자신의 화살통에 집어넣게 한 다음 그대로 계속 싸웠다. 이를 본 고려 군사들은 크게 감동하여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자른 적을 잡아 투구를 벗겨 보니 몽고병이 아니라 일본 왜구임이 밝혀졌다. 많은 왜구들이 용병으로 제주도에 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써 제주도는 완전히 몽고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수 있었고 고려의 통치권이 행사 될 수 있었다.

   고려 우왕은 임난수 장군의 이와같은 전공에 크게 감동하여 종 4품의 봉선대부를 제수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에게 주는 자금어대까지 하사 했다.

   팔 하나를 잃은 장수로서 명예롭게 예편을 하는 것인데 다시 문관으로 등용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문·수를 다 겸한 것이 된다.

   문관으로서도 삼사우윤에 올라 국가 전곡의 출납회계를 관장하는 중책을 수행하였으며 국가의 제사와 조정의 의전을 주관하는 봉익대부 전의시사 까지 역임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 왕위에 오르자 임난수 장군의 운명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성계는 그를 불러 새 왕조에 참여하기를 회유하며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그는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하고 두문동에 은거했다. '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이곳 두문동에 고려말 충신들이 이성계에 반대하여 은거한 데서 비롯되는데 임난수 장군도 그렇게 했다.

   얼마 후 그는 고향인 전라도 부안으로 가기로 하고 두문동을 떠나 남으로 가다가 지금의 세종시 전월산 아래 터를 잡고 정착하였고 부안 林(임)씨의 시조가 되어 이 일대에 林씨의 집성촌을 이루며 번창했다.

   임난수 장군은 날마다 전월산에 올라 멸망한 고려왕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고 전월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래서 절을 올리던 봉우리를 부왕봉, 그 바위를 상려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편단심 고려에 충신으로 고고하게 살던 장군은 1407년 66세로 파란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지금 세종시 금강변에 있는 독락정은 차남인 임목이 1437년 양양도호부사를 마치고 낙향하여 건립한 것인데 매년 부안 林씨 전서공파 대종회(회장 임헌옥) 주최로 '독락문화재'를 열어 장군의 뜨거웠던 충성심을 기리고 있다.

   그리고 전월산은 세종시를 행정수도로 지정할 때 그 '배후 산'으로 중심이 되어 주었다. 세종시의 상징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1. 변평섭, "두 임금 섬기지 않은 명장의 충심 오롯이 품은 곳", 충청투데이, 2020.3.6일자.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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