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6월 8일 토요일 자 '조선일보' 2면에는 짤막한 부음(訃音) 기사가 실렸다. "백련 지운영씨는 6일 오전 여섯시 시내 가회동 이십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얏는데 향년이 팔십사세엿다 하며 氏는 조선 화단과 시단에 중진이엿다." 같은 날 '동아일보'는 6월 10일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영결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세상을 떠날 때 지운영(池運永·1852~ 1935)은 화가요 시인이었다. 50년 전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조선 팔도를 떠들썩하게 한 협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운영은 조선에 사진술을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지운영이 죽기 넉 달 전 동생 또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2월 3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제목은 '종두계 대은인 지석영옹 장서(長逝)'. "조선에 처음으로 우두 넛는 법을 배워 민중에게 실시한 종두술의 대선각자 지석영씨는 1일 밤에 시내 락원동 십칠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엿다. 향년은 팔십세이다."
종두법을 도입한 선각자 지석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대구에서 동학군을 토벌한 사령관이었다. 동시에 동학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 수괴 민영휘 처단을 요구한 지사(志士)였다.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은 사람이기도 했고 한글을 대중화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어느 한 가지 자로 재단하기 어려운, 두 형제 삶에 녹아 있는 20세기 초 조선의 만 가지 얼굴을 뜯어보도록 하자.
1. 무술가 지운영의 개안(開眼)
1852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지운영은 어릴 적 취미가 이상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나무를 걷어차는가 하면 수수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하루에 몇 번씩 뛰어넘곤 했다. 새싹이 돋아서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도 뛰어넘었다.(유영박, '백련 지운영의 미공개 문권저책 목록', 도서관연구 vol 22, 1981) 지운영의 아들인 화가 지성채(1899~1980)로부터 앞 논문 저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과장은 있으되 거짓은 없을 것이다.
지운영은 또 시화(詩畫)에 능했다. 1877년부터 지운영은 개화사상가 강위(姜瑋)의 시 모임에서 문장을 닦았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1876년 강화도조약 때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육교시사'라는 그 모임에서 지운영은 개화(開化)를 배웠다. 그리고 권력자 민영목과 연줄이 닿아 관직을 얻으니, 개화를 책임지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단 주사(主事)였다.(윤효정, '한말비사', p70, 김재한 '백련 지운영의 회화세계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권, 2010 재인용)
1882년 구식군대 병사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이 죽었다. 그해 8월 박영효를 대표로 수신사가 파견됐을 때 지운영도 일본으로 갔다. 사진(寫眞)을 보았다. 일행은 귀국했지만 지운영은 남아서 사진을 배웠다. 왼쪽 사진은 유학 시절 스승 헤이무라 도쿠베에가 촬영한 사진이다. 그때 조선 권력자들은 사진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1881년 2월 1일 자 일본 '東京日日新聞'은 "오사카 상인이 각국 귀족 촬영을 조선 정부로부터 주문받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고 보도했다.(이은주, '개화기 사진술의 도입과 그 영향', 서강대 석사논문, 2000) 이듬해 귀국한 지운영은 도화원 출신 김용원과 함께 관립 촬영국(撮影局)을 열고 1884년 개인 사진관을 열었다.
2. 개화파 무술가, 자객이 되다
바로 그해 갑신정변이 터졌다. 관직으로 끌어줬던 여흥 민씨 민영목이 죽었다. 사진관은 일본인 소유로 착각한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됐다.(김재한, 앞 논문) 멘토와 재산이 개화파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지운영은 칼을 갈았다.
세상을 떠날 때 지운영(池運永·1852~ 1935)은 화가요 시인이었다. 50년 전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조선 팔도를 떠들썩하게 한 협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운영은 조선에 사진술을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지운영이 죽기 넉 달 전 동생 또한 세상을 떠났다. 1935년 2월 3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제목은 '종두계 대은인 지석영옹 장서(長逝)'. "조선에 처음으로 우두 넛는 법을 배워 민중에게 실시한 종두술의 대선각자 지석영씨는 1일 밤에 시내 락원동 십칠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엿다. 향년은 팔십세이다."
종두법을 도입한 선각자 지석영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는 대구에서 동학군을 토벌한 사령관이었다. 동시에 동학의 원인이 된 탐관오리 수괴 민영휘 처단을 요구한 지사(志士)였다.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이토 히로부미 추도사를 읽은 사람이기도 했고 한글을 대중화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어느 한 가지 자로 재단하기 어려운, 두 형제 삶에 녹아 있는 20세기 초 조선의 만 가지 얼굴을 뜯어보도록 하자.
1. 무술가 지운영의 개안(開眼)
1852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지운영은 어릴 적 취미가 이상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나무를 걷어차는가 하면 수수가 자라면 자라는 대로 하루에 몇 번씩 뛰어넘곤 했다. 새싹이 돋아서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도 뛰어넘었다.(유영박, '백련 지운영의 미공개 문권저책 목록', 도서관연구 vol 22, 1981) 지운영의 아들인 화가 지성채(1899~1980)로부터 앞 논문 저자가 직접 들은 이야기이니, 과장은 있으되 거짓은 없을 것이다.
지운영은 또 시화(詩畫)에 능했다. 1877년부터 지운영은 개화사상가 강위(姜瑋)의 시 모임에서 문장을 닦았다. 강위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1876년 강화도조약 때 통역을 맡았던 사람이다. '육교시사'라는 그 모임에서 지운영은 개화(開化)를 배웠다. 그리고 권력자 민영목과 연줄이 닿아 관직을 얻으니, 개화를 책임지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말단 주사(主事)였다.(윤효정, '한말비사', p70, 김재한 '백련 지운영의 회화세계 연구', 한국근현대미술사학 21권, 2010 재인용)
1882년 구식군대 병사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이 죽었다. 그해 8월 박영효를 대표로 수신사가 파견됐을 때 지운영도 일본으로 갔다. 사진(寫眞)을 보았다. 일행은 귀국했지만 지운영은 남아서 사진을 배웠다. 왼쪽 사진은 유학 시절 스승 헤이무라 도쿠베에가 촬영한 사진이다. 그때 조선 권력자들은 사진에 광적으로 집착했다. 1881년 2월 1일 자 일본 '東京日日新聞'은 "오사카 상인이 각국 귀족 촬영을 조선 정부로부터 주문받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고 보도했다.(이은주, '개화기 사진술의 도입과 그 영향', 서강대 석사논문, 2000) 이듬해 귀국한 지운영은 도화원 출신 김용원과 함께 관립 촬영국(撮影局)을 열고 1884년 개인 사진관을 열었다.
2. 개화파 무술가, 자객이 되다
바로 그해 갑신정변이 터졌다. 관직으로 끌어줬던 여흥 민씨 민영목이 죽었다. 사진관은 일본인 소유로 착각한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됐다.(김재한, 앞 논문) 멘토와 재산이 개화파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지운영은 칼을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