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내각총라대신 김홍집 살해사건

대선 | 2023.02.15 18:58 | 조회 3409

                            조선 내각총라대신 김홍집 살해사건

                         1. 대한제국과 다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주권을 회복하겠다는 주체는 ‘우리[吾等·오등]’다. 시민 혹은 국민이다. 황제 고종이나 순종, 대한제국이나 황실, 황민(皇民) 같은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1919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령 제1호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규정했다. 대한제국을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는 만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임을 선포한 법령이다.

  대한제국 전주 이씨 황실은 다만 ‘우대한다’라고만 규정했다.(동 법령 제8조) 그해 9월 1차 개정과정에서 이 조항 폐지를 주장했던 여운형은 “황실을 벌하자 함은 아니나 집정자의 은혜를 운운함은 어리석은 말”이라고 주장했다.(오향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입헌주의’, 국제정치논총 제49집 제1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9) 1925년 임시정부 개정헌법은 이 황실 우대 조항을 삭제했다.

  임시헌장 1조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도 동일하게 규정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1세기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찬란하다. 식민시대와 전쟁을 겪은 나라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찬란한 공화국이 설립될 때까지 이 땅은 격랑을 헤쳐나왔다. ‘근대화(近代化)’라는 격랑이다. 일목요연한 설계도에 따라 국가 지도자들이 거국일치적으로 근대화 경로를 밟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부정하고 버린’ 대한제국 권력층은 숱한 반(反)근대적인 수구적 정책과 행동으로 그 근대화 진행 과정을 방해했다. 1910년 아니 실질적으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사라질 때까지, 근대와 전근대가 충돌했던 구체적인 장면을 하나씩 구경해보자. 첫 이야기는 ‘1896년 2월 11일 종로 조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인 사건’이다.

내각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
내각총리대신 김홍집(1842~1896)

                              2.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과 왕명

  정확한 시각이 밝혀지지 않은 그날 아침, 조선 정부 치안을 담당하는 경무청(警務廳)에 러시아 병사 4명이 들이닥쳤다. 경무청은 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자리에 있었다. 무장한 이들 군인들은 사무실에 있던 부관(副官) 안환(安桓)을 정동에 있는 자기네 러시아공사관으로 끌고갔다. 부관은 경무사에 이은 경무청 2인자다.(윤치호, ‘국역 윤치호일기’(한국사료총서 번역서3), 1896년 2월 11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8) 1896년 2월 13일 ‘조선국 대군주 및 세자궁 러시아 공사관에 입어한 전말보고’)

  안환이 영문도 모르고 아관에 들어가보니 경복궁에 있어야 할 고종이 앉아 있었다. 이미 러시아공사관은 군부대와 순검에 의해 육중하게 경호 중이었다. 안환이 공사관에 들어오자 고종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를 체포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고종은 안환에게 또 조령을 내렸다.

  “급히 가서 두 사람을 목을 베라[急往斬之·급왕참지].”(정교, ‘대한계년사’(한국사료총서 제5집) 上, 1896년 2월 11일)

                               3. 첫 번째 포고령, ‘목을 베 바쳐라’

  왕명을 받든 안환이 서둘러 직속 부하인 총순(摠巡) 소흥문(蘇興文)과 함께 육조거리로 갔을 때, 이른 아침인데도 광화문 앞은 보부상들이 가득했다. 며칠 뒤 일본공사관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아관파천을 주도한 박정양과 이윤용이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입경시킨 사람들이었다. 경기도 보부상 전원과 충청, 황해도 보부상 절반이 이들 명에 의해 사대문 안에 들어와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 기록’, 앞 문서)

  거리에는 포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포고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운이 불행하여 난신적자가 해마다 화를 일으켜 변을 낳게 하였다. 짐은 러시아공사관에 이어하였으니 안심하라. (왕비를 죽인) 역적 조희연,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이범래, 권영진은 시기 장단을 불문하고 즉시 목을 베 바쳐라[卽刻斬首來獻·즉각참수래헌].’(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9, 353. ‘조선대군주 및 세자궁 아관 입어 전말’, 부속서1 ‘조칙 사본’)

                                   4. 개혁 총리 김홍집의 결기

  김홍집이 이끌었던 갑오개혁정부는 200가지가 넘은 개혁안을 공포했다. 신분제, 문무차별, 연좌제를 폐지하고 과부 재혼을 허가하고 노비를 철폐하며 국가 예산제도를 도입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기득권자에게는 의심할 여지없이 당연했던 제도들이 한꺼번에 부정됐다. 수구세력 반발을 예상한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은 각료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들이 이미 구시대 제도를 바꿔버린 소인(小人)이 됐으니 청직한 여론에는 죄를 지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나라를 그르친 소인으로 후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일시의 부귀만 생각하지 말고 각자가 노력하기 바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2, 1894년 ④ 10. ‘과거제도 폐지’, 국사편찬위)

  개혁정부에 참여했던 개화파 유길준은 이렇게 회고했다. ‘스스로 개혁을 행하지 못해 일본의 권유와 협박을 받았으니 조선인에게 부끄럽고 세계만방에 부끄럽고 후세에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실효를 거둬 보국안민하게 되면 허물을 벗어나리라.’(유길준, ‘유길준전서’ 4, 일조각, 1971, pp.376~77. 정용화, ‘문명의 정치사상’, 문학과지성사, 2004, pp.91, 92, 재인용)

이들은 외세에 의존한 개혁이 무엇인지, 그 한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봉건 탈출과 근대로 진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김홍집은 개혁을 밀고 나갔다. 결국 개혁이 봉건 군주권 제한에까지 이르자 고종은 개혁정부와 이를 지원한 일본을 버리고 러시아를 택했다.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들에게 살해되자 고종은 이들 개혁정부 각료들을 그 끄나풀 나아가 핵심자로 규정한 것이다.

                                   5. 살해되는 조선 총리 김홍집

  고종이 파천했다는 소식을 김홍집은 경복궁 광화문 안쪽에 붙어 있는 조방(朝房·아침회의 대기실)에서 들었다. 김홍집이 말했다.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일신을 돌볼 때가 아니다. 내가 먼저 러시아 공사관에 가서 폐하를 알현하고 충간(忠諫)하겠다.” 내부대신 유길준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김홍집이 재차 말했다. “폐하가 마음을 돌리시길 촉구하고 성사가 되지 않으면 일사보국(一死報國) 하는 길밖에 없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8) 1896년 2월 13일 ‘조선국 대군주 및 세자궁 러시아 공사관에 입어한 전말보고’)

  김홍집은 영국공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던 친척과 동행하기 위해 궐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미 경무청 안환 무리가 궐내에 들이닥쳐 김홍집을 체포했다. 또 다른 팀이 농상대신 정병하 집으로 가서 정병하를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을 경무청(현 서울 교보빌딩 부근)으로 끌고가 구금했다.

  총리와 대신을 끌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인파가 ‘입추의 여지도 없이’ 가득했다. 그러자 경찰들이 칼을 뽑아들고 사람들을 쫓아낸 뒤 김홍집을 차서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여러 경찰이 일제히 난도질을 해 김홍집을 죽였다. 이어 정병하를 끌어내 한 칼에 그를 죽였다.(일본외무성, ‘일본외교문서’ 29, 353)

  경찰이 이들 시신에 ‘大逆無道(대역무도)’라 써붙이고 새끼줄로 다리를 묶어 종로에 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과 기와조각을 그 시신에 던져 살이 터지고 찢어졌다. 시신를 베어 그대로 먹는 사람까지 있었다.(황현, 앞 책, 앞부분) 경찰 가운데 소흥문은 김홍집 신낭(腎囊·고환)을 베어버렸다.(황현, 앞 책 5, 34. ‘경무관 소흥문의 면직’) 정병하 시신에서 살점을 잘라 씹는 사람도 있었다.

  그날 경무사에 임명된 안경수가 그 풍경을 보았다. 안경수가 고종에게 이리 말했다. “외국인 이목이 많으니 이들이 이 나라 야만 정도를 평가할 것이다.” 그러자 고종은 “오늘 밤중에 가족들이 치우게 하라”고 명했다.(윤효정, ‘풍운한말비사’, 수문사, 1948, pp.119, 200)

  ‘외국인 이목’. 이게 지금 경기도 고양 대자동 양지바른 곳에 김홍집이 편히 잠들 수 있었던 연유다. 달아났던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용인에서 현지 주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소식을 들은 새 내각 내부대신 이완용이 애석하게 생각하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약속 이행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9 三, (11) ‘신정부의 현황 보고’, 1896년 2월 24일) 훗날 어윤중을 죽인 사람들이 기소됐다. 법부에서는 주모자 정원로와 공모자 임녹길은 교수형, 옆에서 방조한 안관현은 종신형을 결정하고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이들을 각각 5년과 2년, 1년 유배형으로 감형했다.(1896년 6월 13일 ‘고종실록’)

                               6. 고종 “내가 언제 죽이라고 했나”

  야만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고종은 감옥에 있는 죄인들을 모두 풀어주라 명했고(2월 11일 ‘고종실록’), 갑오경장(1894년) 전까지 백성이 미납한 세금을 전액 탕감해줬다.(2월 13일) ‘대원군 존봉의절’도 공포해 혼란을 틈타 정계 복귀를 노릴지도 모를 늙은 아비 흥선대원군을 다시 한번 외부와 단절시켰다.(2월 13일)

  2월 15일 러시아공사관에서 고종이 회의를 주재했다. 병신년 정월 초사흗날이었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공평한 재판을 하려 했는데 분격한 백성이 살해했다. 맡은 직책도 없는 사람이 우둔하고 쓸데없는 방문(榜文)을 만들어 내걸었다고 하니 조사하여 처리하라.”(1896년 2월 15일 ‘고종실록’)

  자기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김홍집과 정병하 살인범에 대한 조사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전형적인 고종 행동 방식이다. 11년 뒤 1907년 7월 7일 ‘헤이그 밀사’ 사건 때 통감 이토가 밀사 파견 이유를 추궁했다. 고종은 이렇게 말했다. “짐과 아무 관련이 없다.”(‘통감부문서’ 5권 1. (9))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조선 첫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해 사건 전말이다.

                                                 <참고문헌>

  1. 박종인, "내각총리대신 김홍집 살해사건", 조선일보, 2023.2.15일자.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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