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7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추모 행사

대선 | 2023.02.21 13:47 | 조회 2710


            <특별기고>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7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추모 행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

 

                                1. 단재 신채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서기 2023년(단기 4356년) 2월 21일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이 중국 랴오닝성 다롄시 뤼순(旅順)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에 순국하신 지 87주년이 되는 아주 뜻 깊은 날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

 

  신채호 선생은 1880년 12월 8일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성균관에 들어가 26세에 박사가 됐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에 나갈 뜻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후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다가 1906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며 국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논문을 발표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항일결사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가하며 관련한 글을 다수 발표했고, 순한글 계몽성 월간 ‘가정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친일조직인 일진회 성토에도 앞장선 그는 1910년 4월 중국 칭다오로 망명,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 1878-1938)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한 뒤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직된 항일단체 기관지인 ‘권업신문’ 주필로 활동하다가 1914년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만주와 백두산 일대, 고구려 및 발해유적지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했다. 1915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박달학원’을 설립, 민족교육에 힘썼다. 이어 베이징으로 가서 비밀결사단체인 ‘대한독립청년단’을 창단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진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했으나 한성임정(漢城臨政)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임시정부 공직을 사퇴했다. 그는 당시 임시정부는 소수 의견만으로 소집돼 불완전한 상태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주장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에 위치해 있는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 사진. 단재

      신채호 생가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26호로 지정되어 있고, 동상은 1996년에 건립되었다.

 

  1922년에는 경남 밀양 출신인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이 이끌던 의열단의 고문으로 참여해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 방법을 천명하는 그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서’를 작성했다. 그는 서두에서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적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여 온간 만행을 거침없이 자행하는 강도정치가 조선민족 생존의 적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혁명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殺伐)하는 것이 조선민족의 정당한 수단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며 임정을 해체하고 새 조직을 만들자는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했다. 이어 안창호 등 임정 개조파와 임정 존폐 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렬됐다. 이후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관련 단체에 가입했다.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자금을 조달하러 대만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10년 형을 선고받고 수형번호 411번으로 뤼순감옥에 갇혔다. 그렇게 옥살이를 하던 중인 1936년 2월 21일 그는 형기를 3년 앞두고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57세에 순국했다.

  선생은 수형생활 중 병보석으로 출옥할 기회가 있었으나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부하였으며 "내 죽거든 시체가 왜놈의 발길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해 바다에 띄워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하다가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선생은 이런 견해를 역사연구에도 반영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주요 저서로는『조선상고사』(종로서원, 1948),『조선상고문화사』(비봉출판사, 2007),『조선사연구초』(도디드, 2013) 등이 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사학자, 언론인, 작가로 명성을 날리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릴은 없다,” 또는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놓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2. 단제 신채호 선생 순국 87주년 추모식 행사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상임대표 이장섭)은 2월 21일 오전 11시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단재영당 묘정 앞에서 상임대표인 이장섭 국회의원, 도종환 국회의원, 노영민 문재인 대통령 비서실장, 유인태 17대 국회의원, 충북남부보훈지청장 손애진, 광복회 청주진천지청장 류윤걸,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 청주대 신문방송학과 박정규 전 교수, 노덕일 대전중구 문화원장, 자부 이덕남 여사 등 150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의례, 내빈 소개, 단재선생 약력보고, 헌사, 추모사, 조선혁명선언 낭독, 추모공연, 폐회선언, 헌화, 기념사진 촬영 순서로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을 엄숙하게 개최했다.

  추모사는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류윤걸 광복회 청주진천지청장, 손애진충북남부보훈지청장 등 3인이 했다.

                             

                2023년 2월 21일 오전 11시에 개최된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7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는 손애진(孫愛進, 1970) 충북남부보훈지청장의 진지한 모습

 

  손애진(孫愛進, 1970) 충북남부보훈지청장은 추모사를 통해 “국권회복과 조국광복을 위한 일념으로 일신을 바치신 신채호 선생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을 기억하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신 영웅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반드시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2019) 등 5권

  .주요 논문 :「윤동주 민족시인의 생애와 문학세계」,「눈물과 정한의 시인 박용래의 생애와 문학세계」등 123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시부문 신인작품상, <한비문학> ․ <오늘의문학> 문학평론부문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대전 <시도(詩圖)> 동인,『천안교육사』 집필위원,『태안군지』집필위원,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동양일보포럼 연구위원, 평화대사, 천손민족중앙회본부 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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