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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숨은 역사

신상구 | 2020.11.18 15:32 | 조회 248 | 추천 0

                                        경복궁에 숨은 역사

                                                                 1. 어느 동종의 기구한 운명

   흥선대원군이 시작한 경복궁 중건 공사가 한창이던 1866년 겨울이었다. 그해 2월 8일 인부들이 광화문 서쪽에 방치돼 있던 종 하나를 경복궁 안으로 끌고 와 부쉈다. 세조 때 만든 이 종은 길이가 9자 2치(2m76)에 지름은 6자 5치(1m95) 두께는 9치 7푼(29cm)짜리 대종이었다. 종에는 신숙주가 쓴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녹여 근정전 사방을 지키는 향로와 처마 끝 기와를 보호하는 토수(吐首)를 만들고 나머지는 당백전을 만들었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1866년 2월 8일, 서울역사편찬원, 2019·이하 ‘영건일기’) 이보다 5개월 전 운종가 포목전 사람 600명이 동대문에서 종 하나를 옮겨 광화문으로 가져왔는데 이 또한 높이 8자 6치(2m58)에 너비는 5자 5치(1m60)요 두께는 9치 5푼(28.5cm)짜리 큰 종이었다. 세조 때 만든 흥천사 종이다.(‘영건일기’ 1865년 9월 2일) 광화문 문루에 걸었던 이 종은 지금 덕수궁 안에 걸려 있다.

   한 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한 종은 그나마 살아남았다. 동대문에 있던 종은 1555년 ‘종을 녹여 조총(鳥銃)을 만들자’는 각 관청 요구를 “옛것은 신령한 힘이 있다”며 명종이 결재를 거부한 바람에 살아남았다.(1555년 6월 17일 등 ‘명종실록’) 37년 뒤 그 조총을 앞세운 일본에 국토와 국민이 유린됐지만, 어찌 됐든 종은 살아남아 있다. 명분과 실질과 현실이 맞부딪친 구한말 경복궁 중건 현장으로 다시 가본다.

                                             2.  구멍 뚫린 천록(天祿)과 굶어 죽은 녹산 사슴

    왕실 위엄도 위엄이지만, 대원군에게 경복궁 공사 최고 주안점은 화재 예방이었다. 곳곳에 수로를 파고 물을 담은 ‘드므’를 배치했다. 주술적인 방법도 동원했다. 불을 피하기 위해 많은 현판을 금색으로 썼고(‘영건일기’ 1867년 4월 21일), 화산(火山)인 관악산 기를 누르려고 관악산 꼭대기에서 숯을 만들어 근정전과 경회루 주변에 묻었다. 관악산 정상에 우물도 팠다.(1866년 1월 6일) 서쪽으로 냈던 경회루 수로 입구는 관악산 화기를 막기 위해 남쪽으로 바꿨다.(1866년 7월 1일) 청동으로 불을 제압하는 용을 만들어 경회루 연못에 집어넣고 근정전 상량식에는 용 용(龍) 자 1000자로 물 수(水) 자를 그린 종이를 상량문과 함께 삽입했다.(1867년 2월 9일) 목재로 만든 건물에 온돌로 난방을 하는 시스템이니, 바야흐로 위엄을 회복하려는 왕실에 화재는 무엇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경복궁 영제교에는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 조각상이 네 개 있다. 하늘에서 온 사슴, 천록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사진 오른쪽)는 등에 구멍을 때운 흔적이 보인다. 중국 사신이 묵는 숙소, 남별궁에서 가져온 석물이다.

                                                                 3. ‘춘성유기’와 구멍 뚫린 천록(天祿)

     경복궁 석물(石物)은 복을 빌고 악을 피하려는 상징들이다. 특히 근정전을 둘러싼 월대에는 많은 석물이 조각돼 있다. 대원군은 근정전 건물에서 월대까지 너비를 5척 확충하고, 석수(石手)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며 공사를 독려했다.

     돌기둥 36개 위에 있는 서수상 가운데 1층 월대 모서리에 있는 암수 동물상은 특이하고 예쁘다. 1770년 경복궁을 구경한 실학자 유득공은 이렇게 기록했다. ‘암컷은 새끼를 한 마리 안고 있다. 무학대사가 남쪽 오랑캐가 침략하면 짖도록 만들었고 어미개가 늙으면 새끼가 뒤를 이어 짖도록 했다고 전해 온다.’(유득공, ‘영재집’15 춘성유기(春城游記)) 유득공이 ‘개’라고 한 이 짐승은 해태(혹은 해치)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화재와 재앙을 물리치는 동물이다.

     그리고 유득공 눈길을 끌었던 석물이 하나 더 있으니,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 영제교 양쪽에 앉아 있는 천록들이다. ‘남문 안에 다리가 있는데 동쪽에는 돌을 깎아 만든 천록(天祿 혹은 天鹿)이 두 마리 있고, 다리 서쪽에는 한 마리가 있다. 천록의 비늘과 갈기가 잘 새겨져 있어 생생하였다.’ 한쪽에는 두 마리가 다른 쪽에는 한 마리가 있다는 목격담이다. 천록은 상서롭지 못한 것들을 제거하는 전설 속 동물이다.

     2020년 현재 영제교 옆에 있는 천록은 모두 네 마리다. 250년 전 존재하지 않았던 한 마리가 멀쩡하게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쪽 한 마리는 등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덮개가 씌어 있다. 유득공의 목격담은 이렇게 이어진다. ‘남별궁(南別宮) 뒤뜰에 등에 구멍이 뚫려 있는 천록이 한 마리 있는데 이것과 아주 비슷하다. 필시 다리 서쪽에 있었던 나머지 하나임이 분명하다.’(‘춘성유기’)

    경복궁 영제교 동쪽에 있는 천록. 등에 난 구멍을 메꾼 흔적이 보인다. 고종 때 중국 사신 숙소인 남별궁에서 가져와 설치한 석물이다.

                                                                 4.   임진왜란, 남별궁 그리고 소공로

      남별궁은 임진왜란 이후 중국 사신이 머물던 숙소다. 서울 소공동에 있다. 원래는 태종 둘째딸 경정공주가 살던 집이었다. 지금 지명인 ‘소공동(小公洞)’은 ‘소공주(小公主)’가 살던 집에서 유래됐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이 집에 진영을 차렸다. 원래 우키타는 종묘에 주둔했었는데, ‘밤마다 신병(神兵)이 나타나 서로 칼로 치다가 죽은 자가 속출하자’(1592년 5월 3일 ‘선조실록’) 이 집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1593년 한성이 수복된 이후에는 불타버린 옛 명나라 사신 숙소 태평관 대신 명과 청나라 사신 숙소로 사용됐다.

      그런데 경복궁에 있던 천록 한 마리가 이 남별궁으로 옮겨졌다. 실학자 이덕무는  바로 경복궁에서 옮겨온 것(盖自景福宮移置也·개자경복궁이치야)”이라고 확신했다.(이덕무, ‘청장관전서’51 이목구심서4) ’영건일기'에는 이 천록을 ’1865년 5월 4일 남별궁에서 가져와 영제교 서쪽 본래 자리에 두었다'고 적혀 있다. 또 1868년 3월 2일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영제교 패하석의 등쪽 팬 곳을 돌로 보완했다’고 기록돼 있다.

경복궁 흠경각 뒤편 화원에 있는 정체불명의 석물. 유득공의 '춘성유기'에 따르면 이는 사관들이 사초를 기록할 때 쓰던 돌 물통, 연지(硯池)다. 유득공은 근정전 좌우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경복궁 흠경각 뒤편 화원에 있는 정체불명의 석물. 유득공의 '춘성유기'에 따르면 이는 사관들이 사초를 기록할 때 쓰던 돌 물통, 연지(硯池)다. 유득공은 근정전 좌우에 있었다고 추정했다.

                                                                5.  천록에 숨은 이기심과 사대 갑질

    영건일기는 ‘세속에 전하기를’이라고 전제를 달고 소공주의 남편인 평양부원군 조대림이 천록을 궁궐에서 무단으로 가져다 자기 집에 놔뒀다고 기록했다. 이후 소공주집이 중국사신 숙소 겸 접대소인 남별궁으로 바뀌자 한 청나라 사신이 ‘매우 신령스럽고 괴이하다’며 등에 구멍을 뚫고 흙으로 메워버렸다는 것이다.(‘영건일기’ 1865년 5월 4일)

조금이라도 속설이 객관적인 사실을 품고 있다면, 왕실 척족의 탐욕과 제후국 조선에 대한 사대 본국의 갑질이 결합해 만들어낸 흉터를 천록은 품고 있다는 뜻이다. 한 왕조의 안녕을 기구하던 석물이 척족네 정원석이 되고 일본군 군영 어느 무명병사의 의자도 되었을 터이고 이어 중국 사신에 의해 척추가 토막나는 참사를 겪었으니, 돌 치고는 운명이 기구하다..

                                                                        6.   굶어 죽은 녹산 사슴

    대원군이 그렇게 화재 예방 상징을 새겨 넣었지만, 경복궁은 화재가 여러 번 났다. 1867년 2월 9일 근정전 상량문을 올리던 그날 영추문과 건춘문 쪽 목재 창고와 인부 숙소에 불이 나버렸다. 한 달 뒤인 3월 5일 심야 화재로 공사 중이던 전각 수백 칸이 사라졌고 목재도 불탔다. 1876년에는 완공된 경복궁에 또다시 큰 화재가 일어났다. 전각 830여 칸이 재로 변했고 역대 왕들 글씨와 유품도 몽땅 사라졌다.(1876년 11월 4일 ‘고종실록’) 고종은 ‘민간 토목공사 금지령’을 거듭 내리며 재중건 공사를 강행했다.(1893년 8월 25일 등 ‘승정원일기')

    고종이 백단향을 피우며 국태민안을 빌었던(‘영건일기’ 1867년 11월 16일) 근정전 향로는 뚜껑을 잃어버리고 아직 그 자리에 있다. 남별궁은 1897년 황제가 천제를 지내는 원구단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1896년 2월 아관으로 파천한 이후 고종은 두 번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08년 2월 12일 고종과 왕비 민씨가 완상하던 궁내 녹산 사슴 7마리 가운데 한 마리가 죽었다. 고종 내탕금이 내려오지 않아 사료를 사지 못해 굶어 죽었다.(1908년 2월 12일 ‘대한매일신보’) 창덕궁으로 옮긴 6마리 가운데 4마리도 2주 뒤 죽었다. 어느 틈엔지, 구멍 뚫린 천록은 영제교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아 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열면서 많은 개보수가 있었으니, 그때 이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해 3월 1일 대한제국 궁내부는 텅 빈 경복궁을 민간에게 개방하기로 결정했다.(1908년 3월 1일 ‘대한매일신보’) 3월 8일 입장권이 발매됐고, 4월 26일 일요일 경복궁 관람객은 2118명이었다.(1908년 4월 28일 ‘황성신문’) 이듬해 궁내부는 경복궁 건물 4000여 칸을 경매에 부쳤다. 낙찰자 10여 명이 칸 당 15환부터 27환까지 가격으로 응찰했다. 한성부윤 장헌식 또한 석재와 목재를 사서 자기 집을 짓다가 욕을 먹었다.(1909년 5월 15일, 7월 5일 ‘대한매일신보’) 신문 기사 제목은 ‘기막히여’였다.

     1911년 2월 20일 천록이 있던 옛 남별궁, 원구단 건물과 땅이 총독부에 인계됐다. 석 달 뒤인 5월 17일 궁내부는 경복궁 전체를 총독부에 넘겼다.(1911년 5월 17일 ‘순종실록부록’) 아무리 정교하게 깎고 정성을 들인들, 돌들은 나라를 지켜주지 못했다. 대원군이 심혈을 기울인 근정전 해태 가족상도, 국운을 지켜준다고 믿었던 천록도 경회루 못 가운데 숨죽이던 청동 용도 소용없었다.

경복궁 근정전에 있는 향로. 세조 때 만든 큰 종을 녹여 만들었다. 종을 녹여 나온 동은 당백전 재료로도 사용됐다. /박종인
조선고적도보 10권(1930년)에 나온 근정전 향로. 뚜껑이 있다.
조선고적도보 10권(1930년)에 나온 근정전 향로. 뚜껑이 있다.

                                                                                 <참고문헌>
  1. 박종인, "상처 난 돌짐승 하나가 주인 없는 궁에 와 있소이다”, 조선일보, 2020.11.18일자. A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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