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구곡 이야기

신상구 | 2020.11.23 01:57 | 조회 178 | 추천 0


                                                                                   화양구곡 이야기

 

   몇 년 만에 다시 충북 괴산을 찾아갔다. 전에는 가을 단풍 시절에 간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래서 화양구곡의 풍광이 단풍으로 물들어 더욱 아름다웠다. 여름의 끝물에 찾아간 이번 여행에서도 화양구곡의 계곡물은 객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히려 주말에 쏟아진 폭우로 계곡의 물이 풍요로워 치고 내려오는 소리가 사자 울음소리 못지 않았다.

 

   충북 괴산은 신라 때는 고을명이 괴양군이었으나 고려로 오면서 괴주군이 되었다가 조선조에 와서 괴산군으로 정착되었다. 고을 이름을 전통적으로 괴산으로 한 이유는 산수절경이 빼어나기 때문이었다. 자연 외경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고을 사람들의 마음도 따뜻하고 인자해서 군의 지정나무인 느티나무처럼 고즈넉한 성품을 지녔다.

   괴산의 많은 인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우암 송시열과 일완 홍범식 그리고 벽초 홍명희이다. 우암은 외가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무덤이 현재 괴산의 청천면에 있어서 괴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거론된다. 송시열은 친가인 회덕으로 8살 무렵에 갔으며, 친족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과 친교를 맺었다.

   열 살 무렵부터 부친 송갑조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부친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인물이 주자와 율곡이었으므로 우암도 평생 주자와 율곡을 추종했다. 정묘호란 후 부친이 죽자 우암은 율곡의 제자인 감장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스승이 사망하자 그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2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송시열은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면서 세상을 배우려고 노력하였다.

   얼마 있다가 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나중에 청나라의 볼모에서 풀려난 효종은 임금이 된 후 스승을 가까이 두려고 했다. 우암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기축봉사'를 올려 북벌론을 주창했다. 효종은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늙으신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결국 효종의 강권에 못이겨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효종이 급서하여 자신의 정책을 펴지 못했다.

 

   주자를 입버릇처럼 외던 우암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여기면서 주자의 학설에 기대어 조선의 폐단을 고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효종이 죽은 후 현종시대에 접어들자 부침이 계속되었다.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자 현종에 실망한 송시열은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산수를 즐기고 강학에 주력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던 우암은 83세에 숙종의 애첩 장희빈의 아들 원자 호칭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자, 황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러한 파란만장한 우암의 행적을 품고 있는 화양계곡은 여전히 푸른 물줄기를 휘돌아 감으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폭우로 불어있는 계곡물이 바위를 내리치며 내는 소리는 천동우뢰와 같이 거세어서 마치 우암이 약사발을 받고 포효하는 소리와도 같았다. 

   화양계곡 주변에는 우암 송시열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다. 첫째 송시열의 무덤은 괴산군 청천리 매봉에 있다. 정읍에서 사사된 후 우암의 묘소는 수원 모봉산에 묻혔다가 영조 33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묘비는 평소 우암을 존경하던 권상하가 세웠고, 정조가 비문을 지은 신도비도 놓여 있다.

 

   우암 송시열의 사후 7년 뒤인 숙종 22년(1696)에 권상하, 정호 등이 청천면 침류정 아래 만경대에 화양서원을 건립하였다가 만동묘 건립 후 서원수호의 이유로 1709년 만동묘 옆으로 이전하였다. 하지만 철종 때 '화양묵패'의 폐단으로 서원이 폐쇄당하고, 고종 7년 대원군 시대에 서원은 철폐되어 건물이 헐리고 묘정비는 땅에 묻히게 되었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상하 등이 숙종 30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 신종과 마지막 황제였던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747년(영조 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키게 하고 묘정비를 세웠으나 고종 2년 만동묘를 철폐했다가 1874년 최익현의 상소로 다시 부활하였다.

   화양구곡 중 하나인 금서담 위에는 우암 송시열이 강학을 하기 위해 지은 암서재가 위치하고 있다. 그 맞은편에는 만동묘가 있으며 암서재 부근 바위에는 불변의 의리를 상징하는 비례부동, 충효절 같은 바위글씨가 남아 있다. 우암은 암서재를 제목으로 한시를 지어서 자신의 학문에 대한 겸허한 자세를 담았으며 후학들에게 경계로 삼게 하였다.

 

시냇가 절벽 사이
그 틈에 서재를 지었네. 

마음을 정갈히 성현의 말씀을 찾아
분촌도 아끼면서 학문에 전념한다네.

溪邊石崖闢
作室於其間
靜座尋經訓
分寸欲躋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으며 유명해진 화양계곡에 구곡을 설정한 이는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이고, 바위마다 이름을 새겨넣어 오늘날의 화양구곡으로 완성한 사람은 단암 민지원이다. 원래 구곡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모방한 것이다.

   송나라의 대유학자 주자는 <주역>의 구오의 원리를 적용하여 구곡을 설정했다. 자연에 구곡을 설정한 것은 순리대로 원만하게 천하가 으뜸으로 잘 다스려지기를 기원하는 천하관과 정치관을 자연에 표현한 것이다. 구곡에 구곡시를 짓는 풍습은 주자의 <무이도가>를 모방한 것이다.

   무이구곡은 도학의 근원지로 고려 말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조선조에 성리학과 주자학이 정착되고 성행되면서 무이구곡은 산수화로 그려져 회화적 감상의 대상이 될 뿐더러 도학이 궁극적으로 나아가는 진도의 순차와도 같이 여겨졌다.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16세기에 접어들어 이퇴계, 이율곡 등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들에 의해 전통이 계승되어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등이 창작되기도 했다.

 

   화양(華陽)에서 '화'는 중화의 의미이며, '양'은 일양래복(一陽來復)의 뜻을 취한 것으로, 군자의 도가 사라졌다가 비로소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의미가 된다. 또 화양은 되돌아간다(反, 復)는 의미도 있으니, 혼탁한 세상은 다시 세도에 의해 다스려지는 바른 세상으로 갈 것이요, 지금 우암의 은거는 훗날에 입신행도로 돌아갈 것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화양천에 의해 자연적인 풍화작용에 의해 조각된 화양동계곡은 화강암 지형의 야외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그 중에서도 화양구곡은 더욱 풍광이 아름답다. 16세기경까지 화양동은 선유동계곡 등과 함께 선유팔경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7세기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을 출입하면서 화양동과 파천, 선유동이 별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유명한 '화양구곡'이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송시열이 죽은 뒤 그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화양동계곡에 있는 아름다운 바위와 계곡들 중 아홉 곳을 지정하여 각각 이름을 설정하면서부터였다.
                                                                                       <참고문헌>

   1.  박태상,  "우암 송시열이 후학 양성한 이 곳, 이유를 알겠네", 오마이뉴스, 2014. 9.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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