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과 화양동

신상구 | 2020.11.23 03:28 | 조회 161 | 추천 0


                                                                              우암 송시열과 화양동


    충청도와 인근 주민들이 많이 찾는 여름 피서지 중의 하나가 화양동이다. 화양동은 그 옛날 황양목이 많이 있었다고 하여 ‘황양동’이라 불리었던 곳이다. 산수가 수려한 화양동에는 승경이 있으니, 이를 화양구곡이라 한다. 곧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곶 등을 일컫는다.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이 깎아지른 절벽이 경천벽이요, 파란 하늘빛과 초록의 나무빛이 물빛과 동체가 된 곳이 운영담이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희고 둥그스름한 바위가 있는 곳이 읍궁암이요, 맑은 물에 소금처럼 하얀 모래가 쌓여 있는 곳이 금사담이다. 명명된 각각의 승지를 보면 허투루 이름을 지은 것이 없어 보인다. 낙양산 기슭에 층층의 바위가 포개어져 있는 곳이 첨성대요, 첨성대를 조금 지나 물가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으니 이곳이 능운대이다. 높다란 바위가 구불구불 용과 같다고 하여 와룡암이라 하고, 개울가 소나무 위에 학이 새끼를 쳤다고 하여 학소대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옥쟁반처럼 펼쳐진 흰 바위가 있는 곳을 파곶이라하니, 화양구곡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지금은 파천이라 불린다.

    이처럼 화양동은 산수가 아름다워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는 승경이었지만, 화양동의 성가를 한껏 올리게 한 일등공신은 조선후기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우암 송시열은 누구인가? 조선왕조실록에 그 이름이 3천 번이나 올랐던 인물이며, 사약을 받은 죄인이었음에도 문묘에 배향된 인물이며, 한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송자(宋子)’이라는 칭호가 쓰인 인물이며, 전국 서원 70여 곳에 배향된 조선의 거유(巨儒)이다.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부터 화양동은 승지일뿐만 아니라 강학과 이념의 메카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우암 송시열은 옥천군 구룡촌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의 송촌·소제 등지로 옮겨 살았기에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우암은 8세 때 친척인 동춘당 송준길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여 훗날 ‘양송(兩宋)’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후 사계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우고,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27세 때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는 논제로 장원에 합격하였으며, 2년 뒤인 1635년에는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어 효종과 각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후 우암은 효종의 북벌계획을 추진하는 강력한 핵심인물로 활약하다가, 효종이 급서(急逝)한 뒤 현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결심하게 되었다.

    우암이 화양동에 터를 잡은 때는 그의 나이 60세인 1666년 (현종 7) 8월이다. 그해 4월에 화양동 근처인 청천에 관찰사인 황서(黃瑞)의 침류정을 빌려 머물기도 하였다. 그리고나서 8월에 운영담 위에 5칸짜리 초당을 짓고 그곳을 거처로 삼았다. 화양동 냇가에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화양계당(華陽溪堂)’이라 이름하였다. 지금의 만동묘가 있는 자리이다.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소박하기 그지없는 집이었다.

   우암은 이 초당을 지은 후 같은 해에 금사담 바위 벼랑 위에 정면 3칸 규모의 작은 서재를 다시 지었다. 별도의 당호(堂號)를 붙이지 않고 그저 서재(書齋), 혹은 북재(北齋)라 하였다. 혹은 바위 위에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암재(巖齋)라고 하였는데, 훗날 우암의 수제자인 수암 권상하가 ‘암서재(巖棲齋)’라 하였다. 암서재는 우암이 말년을 보내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인 동시에, 우암의 사후 제자들에 의해 강학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다시 말해, 암서재는 우암과 우암 제자들의 정신적 상징이 되는 곳이다. 우암은 이 골짜기에 들어오면 심신이 상쾌하여 마치 선경에 온 것 같다고 하였다. 암서재가 자리한 석대 아래에는 금사담이 있는데, 수심이 제법 깊어 작은 배를 띄울 만하다. 우암은 이곳에 배를 띄우고 물결을 따라 초당과 서재를 오고갔다고 한다. 금사담은 요즈음도 피서객들이 수영을 즐기는 곳이니, 그때 당시 우암이 조각배를 띄우고 유유자적하였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때의 생활이 다음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溪邊石崖闢 시냇가에 바위벼랑 열렸으니

作室於其間 그 사이에 서실을 지었노라

靜坐尋經訓 조용히 앉아 경전의 가르침 찾아

分寸欲躋攀 분촌이라도 얻으려고 노력하고파.

「화양동 바위 위의 정사에서 읊다(華陽洞巖上精舍吟)」

 

   우암은 속세와 단절된 이곳 암서재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용히 경서를 읽으며 주자학에 탐닉하였다. 명 태조 때의 복식인 난삼을 입고 평정건을 쓰고 이곳저곳 소요하였을 우암의 모습이 역력하다. 우암은 암서재를 세운 이후 일시적인 상경이나 친척 방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출타를 하지 않고 이곳에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석대 위에 세워진 암서재를 멀찍이서 바라보면 마치 우암의 우뚝한 기상이 그대로 표현된 듯하여 절로 숙연해진다.

   다음의 시도 이즈음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流水桃花在 흐르는 물에 복숭아꽃 뜨고

桑麻雨露多 뽕나무 삼나무에 우로가 많으니

俗傳無量號 무량이라 전하는 마을 이름

知是武陵訛 무릉도원의 와전인가 하노라.

「무량촌 사람에게 써서 주다(書贈無量村人)」

 

   화양동 밖에 있는 마을 이름이 무량촌이다. 우암은 자신이 복거(卜居)하고 있는 화양동이야말로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에 견줄 만 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만큼 선경으로 여겼던 것이다.

전원의 풍월주인이 되고자 했던 우암의 화양동 생활은, 1674년 승하한 현종의 지문(誌文)을 짓지 않으려 하다가 함경도 덕원, 경상도 장기, 거제도로 유배되면서 끝이 났다. 그러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해배(解配)되어 화양동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우암은 화양동을 찾아온 손님에게 “내 집에 들어오는 자는 조정의 일을 말하지 말고 감사와 고을의 일을 말하지 말며 타인의 장단과 득실을 말하지 말라. 오직 경사를 담론하고 의리를 분변하며 산수를 평하고 농사에 대해 말할 뿐”이라고 지켜야할 지침을 제시하였다.

   우암의 나이 80세에 화양구곡 중의 하나인 파곶을 소재로 지은 다음의 시가 있다.

 

水作靑龍去 물은 청룡처럼 흘러가고

人從翠壁行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

武夷千載事 무이 천년의 일은

今日此分明 오늘도 이렇듯 분명하구나.

「파곶(巴谷)」

 

   우암의 평생 스승은 오로지 주자였다. 화양동의 암서재 역시 주희가 복건성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수양과 강학의 장소로 삼은 것을 본떠 지은 것이다. 위의 시에도 우암의 관심은 무이구곡에 은거한 주자임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정조가 “우리 동방의 송선정(宋先正)은 바로 송나라의 주부자(朱夫子)이다.”라고 추숭한데서도 알 수 있듯, 우암은 주자를 가장 흠모하였으며, 실제 동방의 주자가 되고자 하였다. 주자학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주자 사상의 종합적 정리를 시도한 결과물이 바로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와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이다.

   우암의 철학은 직(直)으로 대변된다. 우암은 일찍이 “천지가 만물을 낳는 까닭과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까닭은 곧음일 뿐이다. 이로서 종신토록 따르고자 한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생의 배움이 직(直)이라는 한 글자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삶의 철학은 알인욕(遏人慾) 존천리(存天理)하고자하는 자성의 시에서도 드러난다. 만년의 작품으로 알려진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평생의 일을 추억하니

뉘우침 산처럼 쌓여

붓으로 기록하기 어렵구나.

어버이 섬김에 내 소견대로 하여

그 뜻을 따르지 못함 많았고

형님을 따름에도 사욕에 가려

강강하게 스스로 하기 좋아했으며

집에서도 홀로를 삼감에 어두워

옥루에 부끄럽지 않음 없었고

벗을 사귐에도 충후하지 못해

능히 그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다네.

더구나 군신의 즈음에는

감히 의리에 가까웠다 하겠는가.

 

我年今八十 追憶平生事

尤悔如山積 一筆難可記

事親任所見 多不承其志

從兄蔽於私 强剛喜自遂

居室昧謹獨 無非屋漏愧

交友鮮忠厚 不能庇其累

況於君臣際 敢曰近於義

「自警吟」 중 일부

 

   위의 시에는 우암이 8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부모, 형제, 친구, 임금에 대해 효제충신의 의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회한이 담겨 있다. 이렇듯 우암은 일상의 반성을 촉구하여 자신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였던 철저한 유자였던 것이다.

우암은 그후 다시 1689년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약을 받으면서 화양동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화양동에는 암서재 뿐만 아니라 곳곳에 우암의 정신이 서려 있다. 첨성대 아래 바위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여덟 글자와 암서재 아래 커다란 바위에 있는 ‘창오운단(蒼梧雲斷)’, ‘무이산공(武夷山空)’의 여덟 글자는 모두 우암의 필적이다. 전자는 조선을 대명(大明)의 천지요 숭정(崇禎)의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작은 명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후자는 우암이 제자 권상하에게 써 준 글로, ‘순임금 묻힌 창오산엔 구름이 끊기고, 주자 계신 무이산도 텅 비었구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첨성대 아래에는 ‘비례부동(非禮不動)’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민정중이 북경의 사신으로 갔다가 우연히 의종 황제의 어필인 ‘비례부동’ 네 글자를 구하여 우암에게 보여주자,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백세의 뒤에서도 잊지 않으려고 화양동의 절벽에 새긴 것이다.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의 원본을 보관하고 바위글씨를 수호하기 위해 환장암(煥章菴)이라는 암자를 세우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채운사가 있는 곳에 세워졌다.

   첨성대 아래에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 한 선조의 글씨도 보인다. 이것은 본래 경기도 가평군에 소재한 조종암(朝宗巖) 암벽에 새겨진 글씨를 모사한 것이다. 선조 임금이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준 것에 대해 “황하의 물은 만 번 방향이 꺾여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여기서 ‘만동묘’라는 명칭이 나오게 된 것이다. 만동묘는 우암의 유지를 따라 권상하가 주축이 되어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춘추존양(春秋尊攘)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높이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사림의 절대적 존숭을 받았다. 그리고 화양동 밖에 우암을 제향하는 화양서원이 건립되었으니, 우암을 제향하는 서원이면서 주자 성리학을 강론하고 강학의 중심지였음은 물론이려니와 1천 개소에 가까운 전국의 서원 중에서도 절대적 자리를 확립하였다. 다시 말해, 영남유림의 본산이 도산서원이라면, 기호유림의 본산은 화양서원이었던 것이다. 초대원장에는 우암의 문인 이수언(李秀彦)이었고, 이어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맡아서 했다.

   그리하여 화양동에는 우암의 서재인 암서재가 있고, 존주대의를 표명하는 바위의 각자(刻字)가 있고,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있어 그야말로 기호학계의 강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대명의리론의 이념의 공간이 되었다.

  조선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하였던 거유인 우암 송시열, 그분의 자취와 흔적이 화양동에 남아 있어 이 지역의 사상과 문화를 지배하고 있음은 여러 모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1. 조영임, 우암 송시열과 화양동, 한시한담, 201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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