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를 보면, 생각나는 인물- 조선 선조임금

진성조 | 2011.03.30 09:37 | 조회 8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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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 가운데 고종과 함께 무능한 왕으로 알려진 선조(宣祖, 1552~1608).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여립 사건과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이후 조선사회는 무너져 내렸다. 최근에 와서 선조가 무능한 왕이 아니었다는 복권(?)이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기존의 부정적인 인식을 뒤집기에는 반론이 약하다. 과연 선조는 무능한 왕이었을까.

방계 출신의 왕족

조선왕조 500여 년간 왕위에 오른 사람은 모두 27명이다. 이 가운데 왕의 적장자 혹은 적장손 출신으로 정통성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은 겨우 10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17명의 왕은 세자의 책봉과정이나 왕위계승에 있어서 원칙에 맞지 않는 비정상적인 계승자였다. 조선왕조에서 왕의 직계가 아닌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였다. 선조는 중종(中宗)의 서자였던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아마도 태어나는 순간엔 왕이 될 운명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친부인 덕흥군은 제11대 왕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받았던 봉작은 하성군(河城君)이다. 원래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이름이 부(暊)였기 때문에 항렬자를 따라 연(昖)으로 고쳤다. 선조는 왕실의 방계로서 대통을 계승했으므로 친부인 덕흥군은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 조선시대 동안 대원군이라 불린 이들은 덕흥대원군을 시작으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등 모두 4명에 이른다.

명종은 과연 선조를 후계자로 생각했을까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문정왕후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왕다운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에게는 일찍이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1563년(명종 18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선조실록]이나 [광해군일기], [연려실기술] 등에는 하성군이 여러 왕손들 가운데 명종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 기록에는 선조가 왕위에 오른 배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명종은 여러 왕손들 가운데서 자신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다. 하루는 왕손들을 교육하다가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 알아보려고 하니 익선관을 써보아라”하였다. 다른 왕손들과 달리 하성군은 제일 어린 나이였는데 두 손으로 익선관을 받들고는 쓰지 않고 어전에 도로 갔다 놓았다.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린 선조의 말을 들은 명종은 기특하게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했다고 한다. 남달리 선조를 이뻐한 명종은 한윤명·정지연을 사부로 삼게 하고 학업에 매진하도록 배려했다. 1567년(명종 22년) 6월 28일 갑작스레 쓰러진 명종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기 전 영의정 이준경을 비롯한 심통원 등이 의식이 희미한 명종에게 후사 결정을 종용했고, 말을 하지 못하는 명종은 간신히 한 손을 들어 안쪽 병풍을 가리켰다. 이준경은 명종의 마지막 손짓이 내전, 즉 중전에게 물으라는 것으로 해석했고, 중전은 병풍 안에서 일찍이 명종이 위독했을 적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순회세자를 잃은 후 명종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나라의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자 주변의 신하들은 명종을 무던히도 괴롭혔을 것이다. 명종이 후계자를 공식적으로 지목하지 않은 것은 본인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뜰지 몰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후계자가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했을 경우 후계자를 지목할 권한은 대비나 중전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수순이었다. 당시 하성군뿐 만 아니라 풍산도정 이종린, 하원군 이정, 전 하릉군 이인 등 후보들이 있었지만, 나이 어린 하성군은 두 명의 친형을 비롯하여 여러 왕손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 표면적으로는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지만, 진정 그를 총애한 사람은 명종의 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였을지도 모른다.

동서분당, 당쟁의 씨앗이 싹트다

선조가 즉위한 이후 조정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숙청된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물러나 있었던 인물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기 시작했다. 명종이 불러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선조가 즉위한 다음달인 7월에 예조판서 겸 지경연사로 임명되었고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직제학이 되었다. 반면에 명종과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정권을 농락하던 윤원형 등 권신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선조 초반에는 명종의 고명을 받은 이준경인순왕후의 아우로 외척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핵심 세력이었다. 결국 이들 간의 알력은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었다.

1572년(선조 5년) 2월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사림을 대표하는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였다. 그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이유는 과거에 김효원이 권신인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김효원이 낙마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 이조정랑은 정5품의 관직으로 비록 품계는 낮은 자리이지만 인사 행정을 담당한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말하자면, 인사권이 이조판서에게 있지 않고 이조정랑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로 이조정랑의 자리는 막강했다. 이조정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정랑직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자신을 줄기차게 반대하는 심의겸에 대해 김효원도 앙심이 없을 리가 없었다. 김효원의 눈에 비친 심의겸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척신일 뿐이었다. 그러던 사이 김효원은 그토록 소망하던 이조정랑 자리에 올랐다. 이조정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가리켜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때가 없다”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악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거론되자 발끈한 김효원이 이중호의 아들 이발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결국 선배사림과 후배사림의 분열이라 일컬어지는 ‘동서분당’으로 이어졌다.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에 있는 건천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서쪽의 정릉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세력은 서인이라 했다. 동인들은 유성룡·김성일·이발·이산해·이덕형 등 대체로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은 정철·송익필·윤두수·신응시 등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았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이이가 죽은 뒤로는 ‘동인천하’의 세상이 되었다.

정여립과 기축옥사

동서분당 이후 일어난 최대의 옥사가 정여립 반역사건을 기화로 일어 났으니 이것이 기축옥사(己丑獄死)이다. 옥사의 발단이 된 정여립 사건이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전주 출신이었던 정여립은 1570년(선조 3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인재였다. 20대에는 이이와 성혼 문하에 있으면서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이 문제의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면서부터이다. 이이의 문하에 있으면서 “공자는 익은 감이고 율곡은 덜 익은 감이다”라며 극찬하던 정여립은 동인으로 전향한 뒤로는 이이를 소인배라며 공공연히 비난했다. 정여립의 거친 언사는 당시 왕인 선조 앞에서도 이어졌다. 선조의 눈 밖에 난 정여립은 계속되는 천거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않았다.

낙향한 정여립은 재기를 노리면서 진안군 죽도(竹島)에서 서사(書舍)를 차려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불만 있는 사람들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중 1589년(선조 22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그해 한강이 어는 겨울을 틈타 서울을 침범하려 한다며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달아났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스스로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자결했다.

동서분당 이후 벼슬 자리에 서지 못한 서인 세력은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서인의 실세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 사건의 조사관이 되면서 사건의 진위와 상관없이 동인의 유력인사들이 줄줄이 처벌되었다. 정철은 평소 사감이 있었던 사람도 모두 역당으로 몰아 처단하였고 이 사건으로 죽은 자만도 1천여 명이 넘었다. 정여립 사건으로 연루되어 처단 당한 세력들은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발은 “선조 임금 아래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고 통탄했었고, “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며 선조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괘씸죄가 역모죄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200년 평화가 국방체계를 무너뜨리다

1592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200년간 조선은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지속된 평화는 국방체계를 무너뜨렸고, 국력에 기울여야 할 에너지는 동서분당 등 정권 다툼에 쏟아 붓고 있었다.

16세기 후반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표명하고 1592년 4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궁궐이 있는 수도까지 올라 오고 있었다.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그의 천거로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선조는 신립에게 보검을 하사하면서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는 모두 처단하라”고 격려했다. 신립은 비장한 심정으로 배수진을 치고 북상하는 왜구와 일대 결전을 벌였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몽진길에 오르기 전, 선조는 도순변사 신립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4월 29일 신립의 패보를 접한 선조는 피난을 결심했다.

도성과 백성을 버린 왕으로 평가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분노한 백성은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을 방화하고 형조에 보관하던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4월 30일 서울을 떠난 선조의 통치권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도성사수를 주장한 관리 중에 누구도 서울을 지키다 죽은 이도 없었고, 선조를 충성스럽게 쫓아가지도 않았다. 한양과 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의주로 향하기 전 선조는 광해군에게 종묘와 사직을 받들도록 했고 이후 광해군의 분조는 이로부터 16개월간 지속되었다.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생각을 할 무렵 육지에서는 의병이 봉기하고 남해안에서는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서서히 역전되고 있었다. 여기에 명나라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기세가 꺽인 왜군이 화의에 응하면서 전쟁은 2~3년간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면서 1597년 도요토미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거제전투 참패하면서 이순신이 마련한 수군의 기반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순신이 재등용되어 9월 16일 그 유명한 명량대첩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히고 이후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1598년 11월 18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패전하였다. 임진왜란 후 국가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거나 아니면, 국가 재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멸망도 없었고 국가 재건도 없었다. 새로운 왕조를 세울 힘마저도 잃어버린 조선은 원천적인 쇄신 없이 이어져 갔고, 지배세력들은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후궁 출신의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 명민하면서도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던 선조는 1608년에 파란만장한 치세를 마감하였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라는 국가 위기 상황이 있었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훈구세력이 몰락하고 사림이라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국가를 제대로 재건했다면, 선조는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 위대한 군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 현종은 위기를 잘 넘긴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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