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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과 대한 독립 운동의 분열

대선 | 2023.12.09 18:45 | 조회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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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내전과 대한 독립 운동의 분열

  1917년에 시작된 러시아 내전으로 5백만명 이상이 죽었다. 미국 남북전쟁(1861~65)의 10배가 넘는 수치다. 미국은 20세기 세계 제국이 되면서 내전의 상처를 덮었다. 러시아도 1922년 공산 제국 소련으로 팽창하며 내전의 상처를 미봉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내전의 상처는 다시 터졌다. 푸틴은 공산당을 “바퀴벌레 정당”이라며 경멸했지만, 소련 해체는 지정학적 대재앙이라고 보았다.

  사실 더 큰 재앙은 소련 해체보다 1922년 소련을 탄생시킨 러시아 내전이었다. 러시아 내전은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를 포함한 유라시아 전체에 길고 깊은 영향을 미쳤다. 대한 독립운동의 분열은 그중 하나였다.

1920년 여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리츠키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 축하 행사. 낫과 망치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붉은 깃발이 사방에 펄럭이는 가운데 태극기(점선 안)가 보인다. 2차 코민테른 대회에는 공산주의자 박진순이 참석했다. 러시아 내전은 결국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대한민국 이념 분열의 씨앗이 됐다. 러시아 화가인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작품. /국립러시아미술관
1920년 여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우리츠키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 축하 행사. 낫과 망치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붉은 깃발이 사방에 펄럭이는 가운데 태극기(점선 안)가 보인다. 2차 코민테른 대회에는 공산주의자 박진순이 참석했다. 러시아 내전은 결국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대한민국 이념 분열의 씨앗이 됐다. 러시아 화가인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작품. /국립러시아미술관

                                 러시아 혁명을 강탈한 레닌

  모스크바에는 아직도 레닌의 시신이 러시아 혁명의 상징처럼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황제정을 무너뜨린 러시아 혁명의 상징은 레닌이 아니었다. 1917년 3월(러시아력 2월) 혁명 당시 레닌은 러시아에 있지도 않았다. 황제정을 무너뜨린 혁명의 상징은 레닌이 아니라 36세의 잘 생긴 변호사 케렌스키였다.

  케렌스키 정부가 레닌에게 권력을 찬탈당한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애국 전쟁”을 주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빼지 못한 점이었다. 케렌스키는 여성 부대까지 조직해서 전선으로 보냈지만 결과는 그의 운명처럼 참담했다.

  케렌스키에게 권력을 빼앗은 레닌은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협상을 시작하여 1918년 3월 3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 면적의 약 10배에 이르는 공간(당시 에너지원이었던 탄광의 89%)과 그곳에 거주하는 국민 약 5000만명(약 34%)을 포기했다.

                                        러시아 내전의 확대

  정전 소식에 환호한 러시아 군인들조차 매국노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굴욕적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냐며 분노했다. “노동 계급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치던 좌파 중에서도 반대자가 나왔다. 이미 미국이 참전한 상황에서 조금만 더 버티면 러시아도 전승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은 레닌의 적군(赤軍)에 맞서 백군(白軍)에 가담했다.

  프랑스, 영국, 캐나다, 미국, 일본, 중화민국 등도 백군을 도왔다. 국제연합군을 주도한 쪽은 프랑스였다. 서쪽 영토 일부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있던 프랑스는 독일이 러시아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 프랑스 쪽으로 전력을 집중할 것을 우려했다.

  러시아 황족 및 정교 지도자들을 학살한 것도 국제적 공분을 자아냈다. 체코 독립운동가 마사릭은 러시아 내전에 휩싸인 체코 독립 군단 약 6만명을 구출하기 위해 파병해줄 것을 호소했다.

                                   사회주의도 적으로 만든 레닌

  케렌스키 집권기에 적대국 독일의 도움으로 귀국한 레닌은 1917년 4월 테제를 통해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으로 개명했다. 1919년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제2인터내셔널에 대항해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하고 전 세계 사회당을 향해 공산당으로 명칭을 바꾸라고 요구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1920년 12월 투르(Tours)에서 사상 투쟁을 벌였다. 다수파는 프랑스 공산당을 만들었고, 저항한 소수파는 프랑스 사회당으로 남았다. 나중에 먼저 대통령을 배출한 쪽은 사회당이었다.

  1918년 하바롭스크에서 알렉산드라 김과 이동휘가 만든 한인사회당도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명했다.

                         러시아 내전과 러시아 한인 사회의 분열

  러일전쟁을 치른 러시아와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으로 급속히 가까워져 있었다. 일본과 가까운 러시아 연해주는 연합국들이 러시아를 지원하는 통로로 활용되었다.

  러시아 내전 이후 일본은 국제연합군 중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했다. 영국과 미국이 일본의 세력권 확대를 우려할 정도였다. 일본은 바이칼 호수와 태평양 사이에 완충적 독립국을 세우려고도 했다. 공산주의 ‘방역벽’을 세우려던 일제와 우선 백군을 제압하고자 했던 적군 사이의 타협적 공간이었다.

    백군 점령 지역에 있던 러시아 한인들도 적백 내전이 심화되자 재산 정도, 이주 시기 등에 따라 분열했다. 일본군이 백군과 연대하자 러시아 내 독립운동가들은 급속히 적군 편으로 기울었다. 1920년 3월 연해주의 니콜라옙스크에서 적군 게릴라들이 백군과 일본군, 일본 거주민 등을 공격하자 박 일리야 부대는 적군에 가담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대한인들의 독립 열정을 공산화를 위해 이용하자고 주장한 박진순 같은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이동휘와 김구의 충돌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1919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로 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한 이동휘는 3년 연하의 경무국장 김구를 회유했다. “이대로 독립하면 또 다시 공산혁명을 해야 하니, 저그니(적은 이·동생)도 나와 같이 (처음부터) 공산혁명을 합시다.” 김구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는데 제3국제당(코민테른)의 지휘, 명령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공산혁명을 할 수 있습니까?”

  이동휘가 불가능하다고 하자 김구는 논박했다. “선생은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되는 말을 하심이 크게 불가하니, 동생은 선생의 지도를 따를 수 없고, 선생의 자중을 경고합니다.”

  이동휘 휘하의 김립은 레닌의 독립 지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지 않고, 공산당 활동에 전용하고, 횡령했다. 김구는 김립을 “처형”했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직 사임 후 러시아로 떠났다. 대한민국의 이념적 분열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

                                    동족상잔의 자유시 사변

  러시아 내전 중이던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으로 한인 독립군은 회복 불능한 상처를 입었다. 김좌진, 이범석 등은 자유시로 가기를 끝내 거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선을 따랐다. 자유시로 간 독립군은 이동휘 계열 부대와 최고려·오하묵 계열 부대로 나뉘었다.

  이동휘 계열 부대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독립군으로서 정체성은 유지하려고 했다. 이에 반해 최고려 등은 러시아 공산군에 편입되고자 했다. 세계 공산화가 이룩되면 민족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고 본 것이다.

  최고려 등은 러시아 적군과 함께 편입을 거부하는 독립군에게 무력을 행사했고,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홍범도 등을 앞세운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재판을 받았다. 자유시에 가지 않은 김좌진은 1930년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에게 암살당했다. 자유시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독립군 수백 명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공산주의와 제국주의 틈새의 자유 독립운동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주의는 빠르게 전파되었다. 1925년 일제 치하 경성에서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일제에 저항하면서 공산주의에도 반대했던 사람들은 같은 해인 1925년 조선사정조사연구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 지회 등을 결성했다.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하던 ‘태평양잡지’에는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논설이 실렸다. 신분과 빈부 차별을 없애는 평등주의는 합당하지만 “재산을 나누어 가지자, 자본가를 없이 하자, 지식계급을 없이 하자, 종교 단체를 혁파하자, 국가도 없이 한다” 등의 주장은 부당하다고 논박했다.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은 탄핵당했다.

                                              <참고문헌>

     1. 김명섭, "김구와 충돌 후 이동휘 러시아로...한국 이념 분열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선일보, 2023.12.7일자. A3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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