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학자 신정일

대선 | 2024.01.16 01:18 | 조회 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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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시인' 문화사학자 신정일과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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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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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선생과 그의 저서 『꿈속에서도 걷고 싶은 길』. 그의 책은 돈 내고 살만 하다. 손이 잘 닿는 어느 곳에 둘만하다. 자주 펼쳐 보아도 쉬 지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다고 해도 충분히 즐겁다.

 

 

문화사학자 신정일은 산과 강을 온몸으로 어루만지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흙 한 줌도 가슴으로 부딪치며 우리 국토를 거닐어 온 기행 작가다. 그는 늘 '이 땅의 산천(山川)이 곧 책이고 길(道)이며,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사물이 스승'이라며, '길에는 지는 꽃이 있고, 마르지 않는 강물이 있고, 서러운 운명의 날들이 있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절대로 멈추지 않고 길을 나서는 '길의 시인'이며, '길의 도반(道伴)'이다. 여름 길에서는 아내 같은 산을 만나고, 바다와 사랑과 사람 사이에 있는 섬을 만나고, 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 목소리를 만난다. 길에서 세월과 아픈 역사와 돌장승과 고즈넉한 산사를 만나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고 묻는 나그네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인생길의 시작은 진안군 백운면이다.

 

 

(전략) / 나는 곧이어 내릴 것이고, /우뚝 선 설산雪山 아래 / 조그맣게 서서 /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하는데, / 부끄러움 탓인지, 엄습해올 추위를 겁내는지, / 까닭모를 망설임으로 / 나는 내리지 못하고 / 차안에서 이렇게 서성거리고만 있다. (신정일의 시「백운 가는 길에」부분)

 

 

 

샛노란 생강나무 꽃이 한창이던 지난해 4월 백운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백운면문화기행에서 그는 이 시를 들려줬다. 책장 한 귀퉁이에 꽂혀 있던 빛바랜 노트를 펼쳐 볼 때처럼 망연히 시를 읊는 그를 보면서,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그만 아찔'했다.

 

"시에서 종점은 원촌의 버스정류장이고, 설산은 내가 나고 자란 것을 지켜보았던 덕태산". 이 시는 1985년 섣달(12월) 어느 눈 내리던 날, 광주에 살던 그가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 가면서 버스에서 쓴 시다. 그 시절, 다시는 돌아 갈 수도 없지만 돌아가고도 싶지 않은 그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을 것이다.

 

"저는 사실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이 밝지 못합니다. 어두운 것이 많지요. 그래서 고향에 오는 것이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집이 무척 가난했어요. 그래서 중학교에도 가지 못했지요. 그때 제가 가장 부끄러웠던 순간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볼 때였는데, 그 아이들을 보면 항상 어머니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숨곤 했답니다."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더 힘들었던 시절.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 졸업장을 따낸 그는 망태를 메고 진안의 산천을 떠돌던 이야기를 꺼냈다. 칭얼거리는 아이와 그를 토닥이며 흐르는 섬진강 첫 물의 물소리…….

 

"그 당시 몇 년을 고향에 있으면서 제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망태를 메고 산에 다니는 거였지요. 저어기 저 바위가 선각산(仙角山)이거든요. 선각산, 그 북쪽에 망바위, 그리고 덕태산(德泰山), 장자골, 암봉군, 칼바위……. 우리 아버지가 학교는 보내지 못하면서 산에는 매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큰 망태, 저는 작은 망태를 메고 다니면서 산나물을 캐고 그랬는데, 진안의 골짜기에는 참 알이 좋은 열매들도 많고, 맛좋은 나물이며, 실한 약초들이 많았습니다. 이 선각산 너머에가 참취, 지금 곰취라고 하죠. 곰취, 곰달래라고 하는 것도 참 많았어요. 그리고 바로 선각산 넘어가기 전에는 이렇게 씨알 굵은 더덕이 정말 많았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백운면과 성수면 산에 있는 야생초라는 야생초는 다 배웠었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사람들과 이곳저곳 답사를 다니는데, 너무 많은 나무와 풀들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 우리 답사 객들이 행복해 할 때가 많습니다."

 

그의 말은 시안골에서 가재와 개구리를 잡고, 가재의 알을 깨 먹던 시절로 돌아갔고, 이윽고 '왕따' 이야기로 이어졌다. 혼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한 풋풋한 상념들이 앞에 선 아이들을 위한 배려로 바뀌는 순간이다. 말끝에 힘이 가득 선다.

 

 

섬진강 탯자리(데미샘)에 이르는 마지막 마을인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마을 입구와 그 맞은편. 멀리 산들의 어떤 이름을 가졌을까.

 

 

"그래서 2년 동안 오로지 산에서 노는 일만 했는데 그렇게 보냈던 기억이,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일. 잘 견뎌내기만 한다면 왕따라는 것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를 살지게 하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산 정양용 선생과 같은 경우가 조선시대 왕따 중에 왕따였잖아요. 왕따였지만 결국,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로 꼽히지 않습니까? 홀로 공부를 해서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참 지식인이 되었고, 덕을 쌓아 실용인이 되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아주 좋은 보약이 왕따입니다."

 

잔잔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 신정일 선생의 목소리는 얇은 계곡이 삼키고 뱉는 물의 율동과 궤를 같이 했다. 물소리에 잠기지도, 그렇다고 잡아채지도 않았다.

 

 

신정일

 

백운면 소재지인 원촌에서 어린 시절 몇 년을 보낸 그는 "원촌은 갈 때마다 새로운 상념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라고 고백한다. 특히 수필 형식을 빌려 쓴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에는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대운마을 사이의 대운이고개, 대운이 아랫자락에 있는 매바우마을, 수철리, 갈마리로 가는 서낭댕이고개가 나오고, 보리개떡을 내놓으며 시집살이 이야기를 풀어내던 어머니가 있다.

 

 

내가 가장 먼 길을 걸어갔던 때가 아마도 초등학교를 졸업한 해일 것이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당시 제일 부러운 것은 친구들이 입고 있던 중학교 교복이었다. 딴 세상에 사는 것처럼 중학교에 간 아이들은 활기에 차 있었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들의 까만 교복만 보고도 괜히 주눅이 들어 그들을 피하곤 했다.

그 무렵 우리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평생 실패만 거듭했던 아버지를 믿지 못한 어머니는 옷을 떼어다 파는 행상을 시작했고, 외상값으로 받아온 쌀, 콩, 보리, 서숙이라 부르는 조 등을 백운에서 임실까지 예닐곱 말씩 이고 가서 팔고는 했는데 그것은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유로 나도 어머니의 길동무 또는 짐꾼이 되어 백운 소재지인 원촌에서 임실읍까지 17킬로미터를 몇 번이고 오갔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나이에, 그것도 친구들은 중학교에 갔는데 곡식 네댓 말을 등에다 지고 그 먼 길을 가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아침 일찍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다는 중압감에 잠이 제대로 오기나 하는가, 이리저리 뒤척이는 나에게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이윽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얘야, 어서 일어나야지. 벌써 새벽닭이 울었단다."

무심한 새벽닭은 '일어나라' 꼬리를 물며 울어대고, 그래도 못 들은 척하고 누워 있으면 다시 나를 깨우는 소리. 가만히 문을 열고나서면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무리들. 어머니가 차려놓은 밥을 몇 수저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너 말쯤 되는 곡식을 멜빵을 해서 메면 어깨가 무지근했다. 유난히 작았던 열서너 살짜리 소년이 네댓 말쯤 되는 곡식을 등에 메고 허리를 구부린 채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진안군 백운면 남계리 오정마을과 임실군 성수면 태평리 대운마을 사이에 자리 잡은 대운이고개는 이리저리로 구부러지고, 나보다 두세 말은 더 이고 가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자꾸 가빠지지만 나도 힘들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조차 없다. 고갯마루를 넘어 한참을 내려가면 <한국지명총람>에 "지대가 하도 높아서 구름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 함"이라고 기록된 대운마을에 닿는다.

대운이 아랫자락에 있는 매바우마을을 지나 수철리에 이른다. 어머니는 거기쯤에서 보리개떡을 내놓고 지난했던 시집살이 얘기를 늘어놓는다. 나는 그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만, 지금 이 현실을 잊기 위해 어젯밤에 읽다 만 소설 속 이야기를 떠올린다. 성수면에 이르면 날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그곳에서도 임실읍까지는 제법 먼 거리다. 그때쯤이면 내 또래 아이들은 중학교 교복을 입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데 나는 이방인처럼 어깨가 빠지게 짐을 메고 어머니 뒤를 따라 장에 가고 있으니, 나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른채 어머니 등 뒤에 바짝 붙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간다. 그곳에서 갈마리로 가는 서낭댕이고개를 넘어서 갈마리 거쳐 임실장에 닿으면 해는 중천에 뜨고 40리가 넘는 길을 등짐을 지고 걸어온 내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렸을까? 어머니가 사주시는 국밥 한 그릇 먹고서 국밥집을 나섰을 때 눈부시게 떠 있던 해, 그 햇살이 얼마나 찬연한 눈부심이고 지극한 슬픔이었는지…….

그해 그렇게 여러 번 넘었던 고개에 대한 기억이 그렇게 까마득히 기억의 공간 속에서 지워지고 없다가 섬광처럼 한순간에 살아났다. 진실로 깊은 절망이나 지극한 슬픔은 망극의 늪 속에 깊숙이 침잠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밤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자판을 두드리며 깨달았다.

/신정일의 수필 「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 중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고 숨어 있는 우리 문화와 역사 발굴에 앞장서온 향토사학자인 그는 1990년 섬진강 기행을 시작으로 섬진강, 만경강, 동진강, 낙동강, 한강, 금강 등 우리 강 따라 걷기를 이어오고 있다.

 

"물방울이 개울을 이루고, 썩은 물과 깨끗한 물 등 모든 물줄기가 만나 강을 이뤄 바다로 흘러갑니다. 강을 보면 사람의 일생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역사도 세월따라 흐르며 살아가는 것이 순리라는 대명제를 강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여줄 글도 들려줄 이야기도 많지만, 필자의 글이 더 길어지면 오히려 덧없다. 그의 흔적은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카페(http://cafe.daum.net/sankang)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특히 <신정일이건너는강> 게시판에는 2002년 10월 17일 올린 <강물소리듣기>를 시작으로 쉼 없이 올린 1,888편(2009년 7월 18일 기준)의 글이 강물처럼 흐른다.

 

 

신정일 선생이 운영하는 카페 <우리땅걷기>

이곳에 가입하면 더 넓은 세상이 보인다.

* 신정일 : 문화평론가. 1954년 백운면 백암리에서 태어났다. 1985년 중반 황토현문화연구소를 발족하여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평가 받고 있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을 재조명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을 펼쳤다.

1989년부터 문화유산답사 프로그램을 만들어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에 참가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손화중 장군 추모사업회를 조직하여 덕진공원에 추모비를 세우는 일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전통세시풍속을 오늘에 되살리고 재창조하기 위하여 전라세시풍속 보존회를 만들어 정월대보름놀이, 삼월 삼짇날의 화전놀이, 유월 유두놀이, 칠월 백중놀이, 구월 중양절의 단풍놀이, 동짓날의 팥죽 나누어 먹기 등을 발굴, 재현해내고 있다.

한국의 10대의 강 도보 답사를 기획, 금강, 섬진강, 한강, 낙동강, 영산강과 만경강, 동진강, 한탄강까지 답사를 마쳤다.

우리나라의 옛길인 영남대로와 삼남대로를 도보 답사했고 400여 개의 산을 올랐으며, 우리 국토 1만 2천 킬로미터를 걸었다.

 

저서로 『동학의 산 그 산들을 가다』『모악산』(공저)『지워진 이름 정여립』『나를 찾아가는 하루산행 1,2』『금상 401km』『섬진강 따라 걷기』『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신정일의 한강역사문화탐사』『다시 쓰는 택리지 1,2,3,4,5』『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한국사의 천재들』『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 고을을 가다 1,2,3』『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공저)『그곳에 자꾸만 가고 싶다』『풍류, 옛 사람과 나누는 술 한잔』『조선을 뒤흔든 최대의 역모사건』이 있다. 앞으로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 등 북녘의 강 답사를 준비 중이다. 현재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대표와 황토현문화연구소장. 그리고 전라세시풍속보존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매년 11월 길문화축제를 연다. 11월 11일을 길의 날로 정하자는 운동도 함께 하고 있다. 2008년 11월 8일 길문화축제 세미나.

 

 

글쓴이  최기우
극작가. 200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소설)로 작품 활동을 시작, 현재 연극·창극·뮤지컬 등 무대극에 집중하고 있다. 전북일보 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최명희문학관 기획연구실장이다. 전국연극제 희곡상과 우진창작상, 불꽃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희곡집 『상봉』과 창극집 『춘향꽃이 피었습니다』, 『전북연극사(공저)』, 『전북문학지도: 사람이 사는 마을에 꽃은 피고(공저)』 등이 있다.
torogiwoo@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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