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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철학을 바라보다 3 - 고결함에 대해(2)

2020.06.26 | 조회 663 | 공감 0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독일어에서 아리안, 즉 ‘고결한’을 뜻하는 말은 'edle'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Aryan'에 뿌리를 둔 'edle'의 시원적 의미를 통해서 'Aryan'의 내적 의미를 구한다.


그는 아리안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고고학적 혹은 인종적 관심에서 벗어나 아리안의 본질을 “유래와 본성에 머무는 것”(Peter Wilberg,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으로서 숙고한다(meditating).


이제 그에게 아리안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 머묾’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이다.



▲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됨은 사유에 있다. 그렇다면 사유가 유래하는, 곧 인간 본질이 기원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하게 하는 것’일 터다. 사유는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사유하게 하는 것’은 ‘가장 사유되고자 하는 것’으로서 존재이다.


존재란 하늘, 땅, 인간 및 그 밖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中]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의 ‘중력’에 감싸여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하나의 존재자로서 발원(ent-springen)” (Grundbgriffe)하게 하는 것이다. 


중심을 차지하는 존재의 위상학적位相學的, 영역적 성격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존재는 도가 사상의 도道와 비교되기도 한다.



『노자』 1장에서 도는 유와 무, ‘이름 불리는 것과 이름 없는 것’〔무상한 것과 상주하는 것〕 사이의 ‘길’로 말해진다.(Nian-Nian Wang, 「a Comparative Study of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 Nature」) 도는 둘 사이의 ‘사잇길’, 골짜기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나아가 도의 길로부터 그 길 안에서 유와 무, ‘이름불리는 것’과 ‘이름 없는 것’은 동일하다. 이때 동일성은 논리적인 그래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두 상이한 것이 하나의 동일한 중심[道]에서 서로 속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사태를 말한다. 그 동일성을 일러 현玄이라 한다[同謂之玄]. 


하나의 중심으로서 존재는 지각될 수 있는 것도 실체도 아니며 이성의 형식이나 범주도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존재는 순수한 무와 같다. 따라서 도가 그렇듯 합리적, 개념적 파악으로 존재를 쥐려 할 때 존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다.


“존재는 근거로 작용할 것이라는 모든 기대에 대한 거부이다.”(Grundbgriffe) 그래서 존재는 어디서나 비근거(Ab-grund)인 심연(Abgrund)이다. 실체로서 고정된 자리를 점하지 않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지만 동시에 어디나 있다나아가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불러 모아 고유함에 이르도록 하기에 ‘더’ 있다. 이는 존재를 ‘이행’, ‘머묾’의 성격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발현發顯 또는 비[탈]은폐非[脫]隱蔽의 이행이며 머묾이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밝게 트임 안에 존재자를 감싸 그것들이 참되게 존재하도록 한다. “존재자 전체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와 같이 …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


‘사유하게 하는 것’인 존재는 그렇게 밝게 트이며, 원으로 사방四方으로 영역화하면서 존재자를 간수하여 그것들이 자기의 본질 혹은 고유함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사유하게 하는, 그래서 사유의 유래가 되는 것의 부름에 올바로 응대하는 사유는 환히 열리는 존재 개현開顯, 다시 말해 존재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장場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존재 발현이 머물 수 있는 ‘그릇’이 되고 ‘궁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로서의 사유는 그 자체 존재를 향한 개방성이어야 한다. 존재는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자신의 본질상 그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사유는 본래 우리를 향해 도래하는 것, ‘사유하게 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여 그리로 머물며 그것들을 간수하여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본질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기도祈禱와 관련된다고 한다. 온 마음으로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키는 사유는 “경건의 특별한 음조를 갖고 있으며 기도할 때의 그것을 가리킨다.” 왜냐 하면 “이미 성스로운 것, 은혜로운 것으로 마음을 모음과 포괄적인 본질연관을 뜻하기 때문”이다.(Was heißt Denken?)  


이때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 머묾’은 이미 ‘뒤로 물러섬’이 작용하고 있다. 사유거리를 향해 나아가 불러 모음은 그것이 현존하도록 간수하는 것이며, 그 맞아들임은 뒤로 물러섬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그와 같이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섬이 ‘~이자 또한 ~인’인 방식으로 서로 속하는 원환적 구조로부터 자신을 개방하여 존재를 위한, 존재가 필요로 하는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사유는 존재의 부름에 따라 스스로 개현의 장(das Offene; die Ortschaft)이 되어, 존재가 비로소 그것의 본질로, 즉 비은폐의 머묾으로 현성現成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사유는 ‘사유하게 하는 것’〔존재〕이 그의 요구대로 사유되도록 자리를 내주는 개방성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인 사유는 존재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지고자에 대한 욕망의 고결함은 그 자체로 지고자의 부름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이미 ‘또 다른 사유’이다. 무엇보다 형이상학과 오늘의 기술 시대를 지배하는 사유 방식, 즉 주객분리 위에서 무엇을 대상화하여 헤아리는 표상적, 계산적 사유와는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



계산적 사유는 계산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대상 앞에서 보다 유망하고 경제적인 가능성들을 계산한다. 계산적 사유는 하나의 전망에서 다음 전망으로 분주히 옮겨 다니며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마음이 모여져 있지 않다.”(Peter Wilberg,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계산적 사유방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용하고 바꾸고 폐기할 수 있는, 가용可用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드러나는 기술 문명에서 극단에 이른다. 계산적 사유의 분망함은 결국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파악하고 장악하려는 의지로부터 추동된다. 


반면 존재 사유는 그 같은 일체의 의지를 여의고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제 본질, 즉 진리로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에 맞갖은 사유는 차라리 기다림과 머묾의 성격을 갖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기다림 외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Gelassenheit)


하이데거는 그러한 자신의 사유를 'besinnen', 'andenken', 'besinnlich Denken 등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통상 이를 ‘숙고’, ‘회상’으로 옮기는데, 영미권에서는 'meditative thinking', 'medit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편 인간 또한 존재의 부름에 의해 사유를 바침으로써 마침내 자기 본질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특출함은 그가 사유하는 본질로서 존재에 열려 있고, 존재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존재에 관련된 채 머물면서 그렇게 존재에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 상응(Entsprechung)의 관련으로 있으며, 다만 그 상응의 관련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실존”, “탈-존(Ek-sistenz)”, “존재의 목자”, “존재의 파수꾼”, “존재의 이웃” 등 하이데거가 인간 본질을 부르는 이 호칭들은 한결같이 인간은 돌멩이나 나무처럼 단순히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향해 나가 서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존재 진리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존재에 귀속함은 인간에게는 마침내 그의 본질을 얻는 일인 것이다. 비로소 존재의 가까움에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 대한 존재의 소환은 강요나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본질로 거주하도록 수락하는 호의며 인간의 사유는 그에 대한 답례이고 감사함이다. 



아리안, 고결함의 의미

이제 이로부터 하이데거가 말하는 아리안, ‘고결함’의 의미, 즉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 머묾’이 어떤 삶인지 분명해진다.


인간은 주체 중심의 모든 의지를 비우고, 제 본질 유래인 존재[‘사유하게 하는 것’]를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사유함으로써 존재로 하여금 그의 본질인 발현, 밝게 트임으로 머물도록 한다.


또한 동시에 이로써 그 자신 존재를 지키는 목자로서의 자기 참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편에서 극진히 마음을 모아 존재에 청종하는 사유는 그 은총에 대한 감사함이다.


“고결한 마음은 사유의 본질이며 그로써 감사의 본질일 것이다.”(Gelassenheit)


고결함은 자신에게 본질을 허용한 존재를 향해 사유로써 자신을 바쳐 존재와 함께 속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본질 유래에 머무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겐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고결한 사람이고, 아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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