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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 주해

2021.05.25 | 조회 1493 | 공감 0

도올 김용옥의 《동경대전》 주해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도올 김용옥이 지은 《동경대전 1, 2》(통나무, 2021)는 동학교조 수운의 한문저서 《동경대전》을 번역, 주해한 책이다. 도올은 2004년에도 이미 《도올심득 동경대전》이라는 동경대전 해설서를 간행한 바 있다. 물론 이 책의 끄트머리에는 《동경대전》 영인본이 실려 있지만 한글번역문은 없고 단지 그의 해설만이 실려 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올해 봄 도올은 드디어 《동경대전》에 대한 상세한 주해가 달린 번역서를 간행하였다.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에는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문장들이 수두룩한데 도올의 주해는 《동경대전》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천도교에서도 이제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수운가사인 《용담유사》와 함께 《동경대전》을 번역해서 간행하였지만 해설이 붙어 있지 않다.




《동경대전 1》에는 수운의 전기에 해당하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의 원문과 번역문이 실려 있다. 도올에 의하면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은 영해 사람 박하선朴夏善이라는 인물이 쓴 것으로 그 작성연대는 《동경대전》이 간행되기 10여 년 전인 1864년으로부터 1869년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 한다. 초기 동학의 역사를 담은 《도원기서道源記書》는 바로 이 책을 저본으로 하여 쓴 책이다. 그리고 《동경대전》 판본, 수운과 관련된 조선사상사대관, 수운의 인물에 대한 도올의 논평 등이 실려 있다.


책의 뒷부분에는 《동경대전》의 여러 판본들의 영인본이 실려 있다. 가장 먼저 간행된 경진년(1880) 판본을 비롯하여 1883년의 목천판본과 경주판본, 1888년의 인제판본, 간행지가 밝혀지지 않은 1891년 판본 등이다. 이판본들은 목판에 글자를 새겨 찍은 목판본이 아니라 목활자를 조립하여 찍은 목활자본이다.


《동경대전 2》는 초간본인 경진본 《동경대전》의 원문과 해석이 실려 있다. 그리고 부록으로 동학연표(1779~2021)와 1883년본 《용담유사》가 영인되어 실려 있다. 동학연표는 동학과 관련된 내용은 거의 망라하였을 정도로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동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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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1》에 실려 있는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은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도원기서》의 저본이 된 글이다. 《도원기서》는 수운의 생애에 관한 부분에 더해 2세 교주 해월에 관한 기록을 덧붙였다. 해월이 수운 사후 어떻게 피신해 다니면서 흩어진 도인들을 모아 동학의 명맥을 유지하고 부활시켰던 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필제의 난에 대한 기록도 나온다. 이필제는 혁명운동을 꿈꾸고 교조신원敎祖伸冤을 내세워 동학을 혁명운동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던 인물로 몇 번의 반란 시도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사람이다.


《도원기서》는 해월의 제자이자 동학 분립교단의 하나였던 시천교 교주 구암 김연국 집안에서 소장해오다가 1978년 공개되었다. 시천교는 원래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탈퇴한 이용구가 세운 교단이었는데 구암도 여기에 합류하였다가 다시 떨어져 나와 상제교를 세웠다.


구암은 1920년대 중반 그 신도들을 이끌고 계룡산 아래 신도안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구암의 아들이자 상제교(1960년 이후로는 다시 교명을 천진교天眞敎로 개명하였다) 대종사였던 김덕경이 《도원기서》를 일반에 공개하였던 것이다. 《도원기서》가 작성된 지 백년만이었다.


《도원기서》를 저술한 인물은 강수(姜洙, 도명은 강시원)라는 사람으로서 박하선과 더불어 수운의 직계제자로서 초기 동학교단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수운이 1864년 처형된 후 피신해 다니던 해월 최시형과 의형제를 맺었을 정도로 동고동락한 동지였다. 도올에 의하면 강수는 갑오년 동학혁명 때 청주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시천교 교단에서 1920년에 간행한 《시천교역사》는 이 《도원기서》를 토대로 찬술된 것이다. 《시천교역사》는 188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는 《도원기서》와는 달리 갑오동학 혁명에 대한 기록까지 들어 있어 동학혁명사 연구에서도 중요한 사료가 된다.


도올의 《동경대전》 번역은 철저한 문헌비평과 고증을 거친 것이라 이제까지 나온 번역서 중에서는 사실 최고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동경대전 1, 2》는 동학연구의 큰 이정표를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는 대학생 시절 도올의 처녀작 《여자란 무엇인가》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동양철학을 이렇게 재미있고 명쾌하게 설명하다니! 도올 선생은 그 이후에도 동양고전에 대한 여러 해설서들을 내는 등 우리 학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동경대전 1, 2》로 다시 한 번 대학자로서의 그의 역량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역사를 조금 공부한 필자가 보기에 도올 선생의 주해 가운데 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동경대전》에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니고 《대선생주문집》과 《도원기서》에 나오는 소위 ‘을묘천서乙卯天書’에 관한 해설이다.


을묘천서을묘년(1855)에 울산 유곡동 여시바윗골에 기거할 때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중으로부터 얻은 책을 말하는데 이 책은 유교의 가르침이나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은 ‘기도의 가르침(所禱之敎)’을 담은 책이라 하였다.


도올 선생은 이 책은 이마두(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天主實義》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17세기 초 북경에서 간행된 《천주실의》는 17세기부터 조선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져 토론의 대상이 된 책이었다. 그런데 도올은 수운이 젊은 시절 장사꾼으로서 10년간이나 전국을 돌아다닐 때 천주교를 접했고, 또 천주교 집회에도 무수히 참관하였을 것이라 하면서도 《천주실의》는 이 때 비로소 처음 접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1권 106쪽) 수운이 《동경대전》에서 서학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서학의 교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천주실의》라는 유명한 책을 을묘년에야 처음 접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또 《천주실의》가 기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천주실의》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지식계급을 설득하기 위해 천주교 교리를 소개한 철학서이지 기도나 수행의 방법에 관한 책은 아니다.


이해하기 힘든 도올의 또 다른 주장도 《천주실의》와 연관되어 있다. 《동경대전》에 실려 있는 해석이 가장 어려운 글인 「불연기연不然其然」에 관한 주해 부분에서 기연과 불연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천주실의》에 담긴 신의 존재증명과 관련된 다양한 논변으로부터 끌어내었다는 주장이다. (2권 195쪽) ‘기연’은 인과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상식의 세계, ‘불연’은 상식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초경험적인 세계를 말한다고 도올은 설명한다. 이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이다.


그러나 《천주실의》에서 소개되어 있는 서양의 형이상학 전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 국민에게 가르쳐주어야만 한다는 사명을 갖고 「불연기연」을 쓴 것이라는 도올 선생의 주장은 상상력이 풍부한 재미난 해석이지만 토론의 여지가 많은 주장으로 보인다. 도올은 불연의 세계라는 것도 알고 보면 모두 기연의 세계일 뿐이라는 것이 「불연기연」의 결론이며 수운은 서양의 악폐인 이원론적 사유를 공격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고 한다.


두 번째로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동학의 북접과 남접에 관한 것이다. 도올은 《대선생주문집》 가운데 수운이 해월을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정했다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북도중이 북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인데 후일 왜곡되어 ‘북접주인北接主人’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학은 하나의 조직으로서 북접, 남접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1권 219쪽) 전봉준에 의하면 당시 동학도문에서는 호남은 남접이라 하고 호중을 북접이라 하였다.


동학혁명기 동학이 해월을 법헌으로 하는 하나의 단일한 조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접과 북접 사이에는 지향의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남접에는 조선을 정치·사회적으로 개혁하려는 급진파들이 적지 않았다. 전봉준은 그 한 사람이었다. 해월이 동학혁명 수년 전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여러 동학도들을 만나본 후 이들이 동학을 잘 모른다고 개탄하였던 사실이 그를 입증해 준다 할 것이다.


동학 내에서 서로 다른 경향이 발전하고 있었는데 교조신원운동기 보은집회와는 별개의 집회가 급진파들의 주도 하에 김제 원평에서 열렸던 것도 그런 면에서는 간과하기 힘든 사실이다. 북접과 남접은 모두 해월을 우두머리로 삼았지만 두 조직 간의 균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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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동경대전 1, 2》은 천도교에 대해서도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천주를 ‘한울’로 해석하는 천도교의 해석에 대해 따끔한 질책을 한다. 천주는 하늘님(하느님)일 뿐이며 큰 틀이라는 뜻의 한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지적이다. 천도교가 이런 식으로 천주를 해석한 것은 천도교의 앞날에도 적지 않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인격신 관념이 가면 갈수록 희미해지는 것과 함께 천도교는 가면 갈수록 정치·사회 개혁운동 단체가 되어 갔다. 한때 천도교는 250만에 달하는 신도를 자랑하였으나 지금은 종교집단으로서는 완전히 몰락한 것도 이러한 지향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좌우간 필자는 동학의 적자라 일컬어지는 천도교의 몰락이 역사학자들이 설명해야 할 우리 현대사의 큰 숙제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도올의 《동경대전 1, 2》가 동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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