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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4)

2020.12.11 | 조회 412 | 공감 0

치중화致中和와 ‘또 다른 시원’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율곡 이이 선생이 가을 금강산을 유람했을 때의 일이다. 율곡은 노승老僧 한 분을 만나 유불의 핵심 진리를 놓고 한 치 양보 없는 논변을 벌인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노승은 불교의 비색비공非色非空[색도 아니고 공도 아님]을 언급한다. 분명 유교의 형이상학적 취약성을 겨냥한 말일 터다.


이에 율곡은 『중용』에 인용된 『시경』의 한 구절로써 노승에 답한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는 바로 그 이치가 공空이요, 색色”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논의하면서 상당한 비중을 할애해 『중용』의 중을 다뤘는데, 이를 통해 『중용』에서 중과 인간은 하나로 어울리는 가운데 각자의 본질에 이른다는 점을 밝혔다. 이 합일의 중심[天人之際]이 또한 중이었다.


거듭 말하거니와 여기서 『중용』의 중을 언급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비교하며 어떤 결정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눈을 통해 각각의 것을 이해해 보려는 방편에 그친다.


저 중과 인간의 공속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리고 그것은 연비어약과 무슨 상관인가?

또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와는 어떤 관계인가,

아니 도대체 관계라고 말할 것이 있는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비로소 저의 마땅함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는 데 이미 답은 제시된 셈이다.


인간은 물론 그 밖의 존재하는 것들 역시 중이 인간의 호응 속에 일어나는 발현에서, 그것에 감싸여, 하나의 조화 속에 제 자리를 잡고 제 모습을 찾는다. 천도와 인간의 함께 속함은 모든 사물이 하나로 어울리며 그것들이 제 본성과 가치를 구현하는 소망스런 존재로서 새롭게 드러나는 장이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천도의 의의를 구현하며 자연스럽게 유행하는, 생기발랄한 피시스(physis; 자연)치중화致中和라 한다. 달리 말하면 중이 이윽고 화로서 발현하는 치중화는 모든 것이 마땅함, 즉 도에 이르는 달도達道의 세계이다. 치중화는 일체 만물이 그 자체의 고유함에 이르러 생생한 활력을 얻고 그것들 사이의 존재연관들이 무한히 약동하는 경계인 것이다.


『중용』은 ‘나는 솔개, 뛰어오르는 물고기[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요약한다. 그리고 이 구절에 대해 “이는 위, 아래에 밝게 드러남〔察〕을 말한 것이다[言其上下察也].”라고 부연하여 설명한다.


이때 ‘위, 아래’란 영역은 중이 감춤과 미세함에서 밝음으로 발현하며 트이는 장으로서 이해된다. ‘연비어약’은 이제 그 위, 아래로 열린 장을 중심으로 천지와 모든 것들이 본질의 충만함 속에 활발한 생기로 밝게 드러나는 치중화의 경지를 한 번에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비어약은 천지가 천도의 자연스런 유행임을 단박에 깨닫게 한다. 주자는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연비어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비어약의 구절은 자사가 사람들을 위하여

요긴하게 한 말로서 생동감 넘치는 대목이다.”

(『중용장구』 12장, 주자주朱子註].


그러나 치중화의 세상은 인위적으로 새로 만들어지거나 외부에 제작,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중화의 지경이 인간 주체의 이성이나 의지에 의해 단순히 구성되고 의욕된 표상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치중화는 도무지 그런 인과적 사건과 무관하다. 치중화는 조작이나 제약 없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단순하고 소박한 상행常行[늘 그러함]이며 『주역』의 개념으로 말하면 이간易簡[쉽고 간이함]의 세계다.




‘나는 솔개, 뛰어 오르는 물고기’는 치중화 안에 간수돼 비로소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만물은 치중화에서 모든 종류의 욕망과 분별이 지은 비본래적인 것들을 떨구며 간이하게 서있다. 그러나 여기에 참이 있다.


중이 화和에 이르는 것은 천도, 즉 시원의 무형한 중이 품고 있는 이념이 인간의 참여 속에서 스스로 그 자체를 자연과 역사의 시공간, “위, 아래에” 온전히 현실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화는 중의 진리이다. 달리 말하면 치중화는 은미한 중 자체의 발현이며, [미발의] 중은 이미 중화를 머금고 있다.


그래서 중과 [치중]화는 다르지만 동일하고 동일하면서도 다르다. 다시 말해 중화는 ‘새롭게 다가오는 것’[중화]이자 동시에 ‘이미 있어온 것’이며 시원[중화]과 동일하지만 새로운 반복인 ‘또 다른 시원’이다.


우리의 관점으로 들여다 본 『중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의 발현에 대해, 그리고 존재와 인간의 공속성에 대해 말하는 하이데거에서 연비어약, 치중화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진리를 다시금 다음과 같이 요약하면서 이에 대한 답을 구해보자.


━━━━⊱⋆⊰━━━━


존재자와 관련하여 존재하게 함인 존재는 존재자로부터 그리로 자신을 밝게 드러내며 영역화하고 그 열린 장 안에 존재자를 간수한다. 존재자는 이를 통해 비로소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존재와 존재자는 그 탈은폐에서 번갈아 서로로부터 나눠지고 서로에게 향함으로써 단일함, 동시성을 견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기억과 감사의 사유로써 그 단일함이 견지되는 중심, 사이로 들어서 존재의 진리를 떠맡음으로써 일어난다. 여기에서 존재와 인간은 각기 진리와 진리를 지키는 자로서의 본질에 이른다.


그러므로 존재 발현은 존재와 인간이 하나로 어울리고 그 가운데 모든 것들이 제 본질로 빛나며 존재하는 사태이다. 말하자면 발현의 ‘마법’(Zauber)으로써, 그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 비로소 참되게 머물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어난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존재와 인간이 함께 속하는 발현의 중심[中]으로부터 그리로 돌아가 그 자체와 무관한 외적 규정들을 모두 떨치고 자신 안에 고요히 머문다.


“만물을 고요히 바라보면 스스로 얻은 것 같다

[만물정관개자득萬物靜觀皆自得]].”

(정명도程明道, 「추일우성秋日偶成)


하이데거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자기 본질을 얻는 이곳에서 구원을 떠올린다. 여기서 구원은 단순히 위험에서 벗어남을 의미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본래 어떤 것을 그것의 고유한

본질로 자유롭게 놔둠을 가리킨다.”

(Vorträge und Aufsätze)


“모든 것은 마치 머무는 것 같고,

모든 것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구원된 것처럼 보인다.”


횔덜린 시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명 가운데 나오는 말이다. 또 하이데거는 일체의 비본래적인 것을 떨군 “단순하고 소박한 것(das Einfache)이야말로 상주常住하는 위대한 것[존재]의 수수께끼를 보존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은 그것을 그저 단조롭게 보고 권태를 느낄 뿐인 이들에게는 달아나버린다.”는 말과 함께.


또한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시 「귀향」을 해석하며 그러한 존재의 진리를 고향이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구원이 허락돼 보이는, 저 존재 발현 또는 발현의 개방된 여지(‘시공간’)에서는 고향이 수립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의 열린 장은

참다운 생명이 움터 오르는 시원적인 장소이다.”

(신상희, 「하이데거의 초연한 내맡김」)


여기에 이르러 인간에게 자유와 안식의 삶, 즉 고향에서의 정주定住가 새롭게 허락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시사된 대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시원적 시원”, ‘가장 오래된, 그러나 잊힌 것’의 새로운 도래가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고 도래할 것에서 일찍이 늘 있어왔던 것을 고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존재의 참됨으로 향하는 우리의 맞이하는 모험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새롭게 다가오는 고향으로의 회귀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귀향에 필요한 것은 다만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곳, 그때는 『중용』이 말하는 치중화의 세상과 달라야 할 것 같지 않다.




연비어약을 기억하면서, 앞서 언급한 구절을 이어지는 문장과 함께 다시 한 번 인용하는 것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모든 것은 마치 머무는 것 같고, 모든 것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구원된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강물, 도시의 정원, 가파른 강가를 따라가는 오솔길, 깊게 떨어지는 여울물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황홀한 광경을 지어내고 있다.”(Hölderlins Hymne 'Anden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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