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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 전투와 체코군단 (3)

2021.01.18 | 조회 6084 | 공감 0

봉오동·청산리 대첩,

승리의 숨은 조력자 ‘체코군단’ (3)


상생문화연구소 정원식



독립군의 체코군단으로부터 최첨단무기 구매

체코군단의 일부부대는 1918년 7월 6일 적군과 백군이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 한 가운데를 지나 시베리아 맨 끝 블라디보스크 항에 도착했다. 연합군에 동조하는 체코군단은 항구 지역 일대에서 적군을 몰아냈다. 동시에  이 항구를 연합군 항구로 선포하여 모든 연합군 선박에 개방했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주둔할 때,  ‘덴니크(Denník)’ 라는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특히 같은 식민지 국가로서 동병상련을 느껴서인지, 3.1운동 발발 17일 후에 관련 소식을 다음과 같이 3회 보도했다. 이는 한국민들의 일제로부터 독립에 대한 염원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시위 군중은 황제(고종)의 장례 행렬에 참여했는데, 군과 경찰은 이러한 움직임이 독립운동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한편, 체코는 1918년 10월 28일 건국 선포하였는데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체코는 독립을 쟁취한다. 그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고 있던 체코군단은 1920년 2월이 돼서야 볼셰비키 정부와 정전협약을 체결하고 배편을 이용하는 대신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그래서 체코군단 장병들은 이때 효용성이 사라진 무기를 대거 우리 한국독립군에게 판매한다. 이 때 북로군서 독립군 부대가 사들인 무기는 박격포 2문, 기관총 6정, 소총 1천 200정, 탄약 80만 발이었다. 이들 무기는 주로 체코 라돌라 가이다 장군이 지휘하던 부대가 보유하던 무기였다.



<독립군이 구매한 주요 무기 현황>


재미난 사실은 체코군단이 보유하던 무기가 미국산 러시아제 무기라는 것이다. 산업시절이 열악했던 제정 러시아는 자국 육군의 개인화기인 모신나강 소총(M1891)을 생산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미국 레밍턴사에 150만 정과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수송문제로 47만 정만 납품했다. 혁명으로 납품을 못하고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에 공급됐다. 5만 정은 체코 군단에게 제공됐다.


일본 외무성 밀정 보고서에 “북간도의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은 거액을 들여 체코군단이 무장했던 모신나강 소총 1,200정과 탄환 수십만 발, 권총 430정과 탄환 5천발, 맥심 기관총 2문 등을 구입해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를 무장시켰다.“ 라고 나와 있다.


또한 북로군정서 이우석 분대장 회고에 의하면, “무기 구입 자금이 루불화였는데 혁명으로 휴지 조각이 돼 버려 다시 신권을 모으긴 했으나 모자라는 돈은 현지 동포들의 은비녀와 금가락지 등 온갖 귀중품으로 대신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북로군정서가 소총 1,800정, 기관포 7문, 대포 3문 등을 갖춘 북간도 최강의 독립군 부대로 발전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덴니크 신문에서도 독립군의 무기구매와 관련한 보도기사를 1920년 3월 7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군 이나하기 대장이 러시아 당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일본에 예속된 한국이 러시아 영토에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일본대장은 이 서한에서 '1월 20일 소련 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의 무기 구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여전히 서류상으로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대장은 '만일 러시아 당국이 조치를 취하기를 꺼리거나 할 수 없다면 일본군이 어쩔 수 없이 상황 통제를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위 기사는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군에게 무기를 건넨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일본군이 당시 체코 군단이 체류하고 있던 러시아 당국에 보낸 항의서한을 공개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제국 일본이 체코군단으로부터 우리 독립군에게 첨단무기가 흘러들어가는 사태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한 이강혁은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서도 현지 동포들의 은비녀와 금가락지, 놋쇠 요강 등을 모아서 현물로 무기를 구매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당시 총 한 자루 가격이 1년 노임에 해당하는 30원~45원으로 현 가치로 300만원~45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무장독립투쟁 역량 확보를 위해 얼마나 많은 군자금이 필요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봉·청 전투는 북간도 동포들이 음지에서 수행한 정보원 역할과 각종 보급품 지원은 물론, 생활용품까지 팔아 첨단무기를 구매하는 위국헌신 정신과 최진동-최운산 장군 형제 및 최재형 선생 등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제 정신이 등이 빚어낸 값진 승리였다. 


독립군 지휘관들은 국제정치라는 역학관계를 이용하여 최첨단 무기를 구입하여 봉·청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독립운동사 시각을 한반도와 중국대륙이 아닌, 세계사적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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