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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18)

2021.05.06 | 조회 9187 | 공감 1

지감止感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총명하고 밝은 사람은 느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여 오직 한 뜻으로 행하고, 삼망을 고쳐서 삼진에 이르면, 삼신의 (조화의) 기틀이 크게 발휘하느니, (삼신의) 성에 통하고 공업을 완수하는 것이 이것이다[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삼일신고」)-(1)



지감止感’ 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수행을 통해 생각이나 느낌과 같은 감성적인 마음의 발동을 멈추는 것이다. 이는 마음의 문을 닫아서 감성적인 느낌은 물론이고 이성적인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죽은 사람처럼 마음의 활동이 전적으로 없도록 하는 것인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마음[心]은 온갖 것들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판단이나 인식활동이 일어나는 방房이다. 마음의 방[心房]에서는 기쁨[喜], 두려움[懼], 슬픔[哀], 노여움[怒], 탐냄[貪], 싫어함[厭]의 감성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것들은 진실한 성[眞性]에서 나오는 것들이 아니다.


따라서 ‘삼문三門’을 통해 드나드는 ‘희ㆍ구ㆍ애ㆍ노ㆍ탐ㆍ염’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모두 상황에 따라 잠시 동안 발생하여 표출되는 허망한 생각이나 느낌들이다. 그래서 ‘지감’은, ‘희ㆍ구ㆍ애ㆍ노ㆍ탐ㆍ염’의 마음을 멈추고, 오로지 ‘선한 마음[善心]’이 주체가 되어 참마음[眞心]에서 나오는 마음을 따르도록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마음[惡心]’이 주체가 되어 허망한 마음[妄心]에서 나오는 ‘희ㆍ구ㆍ애ㆍ노ㆍ탐ㆍ염’의 마음이 참된 것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런 사람은 결국 악한 사람[惡人]의 마음으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선심善心’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중용中庸의 덕德으로 표출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즐거운 생각이나 느낌이 일어난다면[喜] 자신의 즐거움으로 탐닉하지도 않고 항시 평정平靜을 유지하며, 타인의 즐거움에 대해서는 격하게 응대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운 생각이나 느낌이 전율하게 된다면[懼] 스스로 겁에 질리지도 않고 느긋한 마음을 유지하여 의연하게 대처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타인에 대해서는 극복할 용기를 주어 두려움을 헤쳐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복받치는 슬픔과 서러운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면[哀] 스스로 절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여 태평하게 행동하며, 슬픔과 서러움에 젖은 타인에 대해서는 비탄으로 한 맺히지 않도록 위안을 베푸는 것이다.


노여움의 생각이나 느낌이 휘몰아친다면[怒] 스스로 격분하거나 성냄에 빠지지 않고 인자함을 유지하여 온화하게 행동하며, 분노에 싸인 타인에 대해서는 원망이 해소되도록 조화調和하는 것이다.


나아가 탐욕스런 생각이 솟구쳐 나오게 된다면[貪] 욕정을 잠재우고 평정을 유지하여 청렴하게 행동하며, 타인의 지나친 탐욕에 대해서는 모두가 부질없는 것임을 설득하는 것이다.


싫어함이나 염오감이 든다면[厭] 스스로 미워하거나 실증내지 않고 친밀감을 유지하여 행동하고, 타인의 염오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희ㆍ구ㆍ애ㆍ노ㆍ탐ㆍ염’의 여섯 가지 생각이나 느낌[六感]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의 방에서 삼문을 통해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허망한 것들이다. 반면에 ‘선심’은 삼신 하느님의 본질적인 특성인 ‘성性’에 의거하는 인간 본연의 마음이다. 본연의 마음은 ‘조화신이 내려와 인간의 성이 된’ 마음이다. 


‘진성眞性’에서 나오는 ‘선심’은 전혀 물들지 않은 삼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한없이 넓고 깊은 가장 보편적인 사랑의 마음이다. 이는 한마디로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도中道의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선심’ 자체는 분명히 삼신의 ‘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본연의 마음이고, 본연의 마음은 곧 ‘중도의 마음’이다. 




‘중도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체로 선한 마음도, 악한 마음도 발현되지 않는 적정寂靜한 마음이다. 이는 ‘지감’의 수행법을 통해 도달해야하는 궁극의 마음으로 볼 수 있다. 적정한 마음이 발현되는 인간은 마음이 평정[心平]하여 삼신 하느님이 내려준 ‘성’에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性通].


‘지감’의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인위적인 분별심이 전혀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무위법無爲法’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에서 생각이 일어나는 분별심을 인위적으로 없애가는 ‘유위법有爲法’이다.


‘무위법’은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무위자연법無爲自然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어떠한 사념思念도 의식에 떠오르지 않게 하는 수련법으로 마음을 자연스럽게 가라앉혀 선정禪定에 들어가 본연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선정에 들어가면 일체의 상념이 없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계에서 텅 빈 마음만이 남는다.


반면에 ‘유위법’은 일념一念을 가지고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잡다한 생각이나 망념들을 떠오르는 대로 인위적으로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수련 방식이다. 기억 속에 잠재적潛在的으로 축적되어 있던 이러저러한 생각이나 망념들이 의식에 불현듯 솟구치는 대로 모두 제거하게 되면 오직 남는 것은 일념도 없는 ‘공空’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무위법’이든 ‘유위법’이든, ‘지감’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잡념을 버림으로써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마음에 도달하는 수행법이다. 즉 ‘지감’의 궁극 목적은 마음조차 없는 무념무상의 경계에 들어섬으로써 곧 삼신에게서 받은 ‘성’을 관통할 수 있는 계기로 삼는 것이다. 이는 곧 일상의 자아로부터 초극하여 자기완성으로의 ‘진아’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수행법을 참고해 볼 때, ‘진아’를 찾기 위한 ‘지감’의 수련법修練法은 ‘명심견성明心見性’을 주로 하는 불교계통의 수행법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불교의 수행법은 ‘견성見性’에 이르는 마음수행을 중시하는데, 그 이론적인 체계는 불교의 ‘유식설唯識說’이 대표적이다.




‘유식설’은 크게 감각感覺의 대상과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구분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감각의 대상은 소위 다섯 감각기관인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에 대응하여 있는 ‘5경[五境], 즉 눈을 통한 ‘색色, 귀를 통한 소리[聲], 코를 통한 향기[香], 혀를 통한 맛[味], 신체를 통한 접촉[觸]’의 영역이다.


반면에 사유의 대상은 감각의 대상을 넘어서 있는, 즉 사유의 주체가 되는 ‘자아自我’를 포함하여 객관화된 개념세계이다. 즉 객관화된 개념세계는 ‘뜻[意]’에 대응하는 법경法境으로 보편적인 관념, ‘이름이나 말[名言]’로 표현되는 법계法界로 지칭된다.


‘자아’는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는 마음[심]의 주체이다. 의식의 경계에는 ‘여섯 가지의 식[六識]’이 있다. 즉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뜻[意]의 ‘6근六根’에 대응하여 여섯 가지 경계인 색깔[色], 소리[聲], 향기[香], 맛[味], 접촉[觸], 법[法]의 ‘6경六境’이 있는데, 이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발생하는 것이 곧 ‘의식’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하는 마음은 눈으로 봐서 아는 안식眼識, 귀를 통해 들어서 알아채는 이식耳識, 코를 통해 냄새를 맡아서 느끼는 비식鼻識, 혀로 맛을 봐서 느끼는 설식舌識, 신체의 접촉을 통해서 느끼는 신식身識, 그리고 다섯 가지 식[前五識]을 분별하여 통합하고, 추론하여 판별하는 통각統覺하는 표층적인 의식意識의 총화이다.


나아가 표층적인 의식 활동으로 일어나는 ‘6식[六識]’ 이외에, 그 배후에는 무의식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7식(七識 : 마나식)’‘8식(八識 : 아뢰야식)’이 현전한다. ‘7식’과 ‘8식’은 현행現行의 모든 표층적인 의식 활동을 조종操縱하는 원인이요 근원이다.


다시 말하면 ‘7식’은 분별의식을 통해 현실적인 자아의 욕망과 집착을 일으키는, 즉 현행의 모든 의식이 발원하는 무의적적인 마음으로 ‘마나식’이고, ‘8식’은 우주전체의 모든 ‘식’을 포함하는 근원의 마음, 즉 모든 마음종자를 저장하고 있는 순수의식純粹意識으로 ‘아뢰야식’이다.


따라서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표층적인 마음활동은 아뢰야식의 전변활동轉變活動이다. 왜냐하면 현상계의 표층적 의식 활동이 낳은 종자種子는 모두 심층의 아뢰야식에 저장되고, 심층에 저장된 아뢰야식의 종자는 다시 ‘연기’의 고리로 표층의 현상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감’의 수행목적은 표층의식으로 전변하는 감성적인 의식을 멈추고, 삼진의 ‘성’을 회복하여 우주의 순수의식에 진입하는 것이다. 삼진의 “성은 삼신을 지키는 뿌리[性者 神之根也]”이다. 삼진의 ‘성’이 무너지면 삼신의 마음은 떠나간다. 지난至難한 수행을 통해 삼진의 ‘성’을 관통하면 ‘진아’가 되어 곧 ‘삼신일체’의 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진아’와 ‘삼신’이 하나가 되면, ‘진아’는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여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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