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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고 묻지 마라 (1)-어쩌다 물길의 하류에서 수원을 구하게 됐을까

2021.07.05 | 조회 1088 | 공감 0

‘왜’라고 묻지 마라 (1)

- 어쩌다 우리는 물길의 하류에서

수원水源을 구하게 됐을까?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이리저리 살았을 거라 착각도 마라.” 가수 진성이 부른 ‘태클을 걸지마’의 노랫말이다. 이미 ‘안동역에서’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지만, 특히 재작년부터 일기 시작한 트로트 붐에서 각광을 받으며 가히 레전드의 반열에 오른 진성이다.


판소리 베이스의, 토해내는 듯한 그의 창법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진성류流’를 이뤘다. 위 구절은 그가 무명의 고달픔과 생활고로 힘든 시절 찾아 뵌 선친의 산소에서 문득 멜로디와 함께 떠오른 가사의 일부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알려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친의 가호 때문일까? 묘소의 터가 좋아 발복發福을 한 것일까? 2005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가수 진성의 삶에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인생사는 책 한권으로 써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비교,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또 대개는 자신이 떠맡은 삶의 무게는 유독 힘들다. 각자의 존재함 혹은 살아냄이 문제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신이나 천사天使, 또 온갖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것들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 방식이다.


그 한 세월을 왜 묻는가. 그것을 다 담을 말은 모자란다. 아니 없다. 고작 ‘어휴, 할 말은 많습니다만 … .’라고 말을 아끼거나 ‘아이고!’ 하며 웃어넘길 뿐이다. 내가 살아온 벅찬 세월은 말이 될 수 없는데, 말 사이에 있는데 왜 묻느냐는 것이다. 또 어림짐작으로 넘겨짚거나 자기 생각으로 미리 판단하며 ‘착각도 마라’라고 한다. ‘어허허 어허허~’ 그래서 노래 중간 그의 삶이 그렇게 ‘말 아닌 말’로 발화發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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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의 마지막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라고 했다. 중국 진나라 말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은 또 다른 관점에서 우리가 침묵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여기에 참이 있건만 말하려도 말을 잊는다

[此中有眞意 欲辯已妄言].”(飮酒 五首)


참이 있는 ‘여기’는 마음 멀어져 절로 외진 가운데 수레 소리 그치고 분망한 생각들이 끊기며 남산, 국화꽃, 하늘을 나는 새가 비로소 그것들의 참모습으로 드러나는 존재 발현發現의 때이자 장소이다.


이 자발적自發的 생기生起의 자리에 참이 있건만 이를 옮기고 싶어도 말은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말로써 형용하여 왜곡하느니 차라리 말을 잊는다. 그럼에도 말을 포기할 수 없는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말을 통해 부득이하게 혹은 의도적으로 사태를 은폐, 왜곡하고 ‘죽일’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존재 발현 앞에 스스로를 억지해야 하며, 그런 의미로 우리는 ‘수줍어야’ 한다.




존재나 신神 또는 도道 등의 참은 말 사이, 이론적 사유 사이의 여백에서 말한다. 아마도 여름 한낮 뜨거움 같았던 실존의 고유한 삶도 거기에 속할 것이다. 그러니 형식과 논리가 지배하고 명료한 의미와 체계를 좋아하는 언어로는 붙잡히지 않는다. 언어로 움켜쥐려 하면 참은 달아나고 모습을 감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대로 “자연은 숨기를 좋아한다.”


배우 이순재도 한 보험 광고에서 모델로 나와 신뢰 가득한 굵은 목소리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입시켜 드립니다.’라고 한다. 자신이 광고하는 보험사는 가입 심사를 하지 않을 것이란 멘트이다. 수익이 최대 목적일 보험사가 무조건 그럴 리는 만무할 것이다. 아마도 그 대신 보험료를 높게 적용하거나 보험금 지급을 깐깐하게 해서 결국 이문을 유지하거나 높이려는 셈법이 당연히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보험의 세계에서 가입자의 경우는 아무리 꼼꼼히 묻고 또 묻고 따지고 또 따져도 지나치지 않다. 이순재씨의 ‘호언장담’만을 무조건 믿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나 묻고 따져서 병통이고, ‘이유’, ‘근거’만 캐다 본연의, 날 것 그대로의 사실을 놓치고 있는 물음 과잉의 시대에서 저 카피는 화두話頭가 될 수 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


저 집요한 ‘왜’의 추궁을 껐을 때, 그만 묻고 따질 때 세계는 어떻게 드러날까? 더러 두려워하듯, 야만과 미신, 불합리의 세계일까? 아니면 혹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롭고 놀라운 세상이 두꺼운 ‘왜’의 외피外皮 속 감춰진 속살로 드러날까?




한때 하이데거와 같이 노자를 공동으로 번역했던 중국인 학자 폴 쉬이 샤오(Paul Shih-yi Hsiao)는 어느 날 그의 기업가 친구와 함께 하이데거를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기업가가 “노자는 많은 면에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 중국인은 왜 그런 식으로 말하죠?”라며 노자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친구의 물음이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고 느꼈던 폴 쉬이 샤오는 당시 중국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알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일반 논리학을 처음으로 정초하여 오늘날 전지구적이 된 서구 사유와 논리의 형식과 규준을 정초한 인물이다.


그러자 하이데거는 “그들이 몰랐던 것에 대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끼어들었다. 적어도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서구 시원이나 서구화되기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형식 논리와 그를 바탕으로 묻고 따지는 사고방식이 부재不在한 것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겼던 것 같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인과율에 바탕한 확신이다. 불을 때지 않은 굴뚝에서 연기날 수는 없다. 비가 오는데 옷이 젖지 않을 수 없고 눈 녹은 진창길을 신발을 더럽히지 않고서 걸어갈 수 없다. 내 맘대로 벼락치고 바람이 일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모든 현상은 죄다 인과적으로 설명되거나 비록 지금 원인을 찾지 못하거나 불충분하다 해도 언젠가 인과적 설명 가능한 것이다.


인과율의 지배는 신성神性과 조화造化, 영성靈性의 영역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었다. 신들은 ‘죽거나’ 그들이 거처하던 산과 바다, 해, 달, 심지어 부엌 아궁이나 장독대 같은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떠났고 신들과 교감하며 조화를 부리던 신령한 이들도 자취를 감췄다. 미토스(mythos; 神話)에서 로고스(logos)로! 이제 아무도 신화를 앎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신화의 ‘비인과적’, ‘비논리적’ 얘기 속에 담긴 우주의 비밀, 민족의 운명을 주목하지 않는다. 신화를 통해 시원의 조상들이 건네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신화는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오직 이성과 언어의 합리성에 향해 눈뜬 자는 그만 눈 감고, 저 시원의 본래성에 눈먼 자는 그만 눈을 뜨기로 하자.


‘왜?’, ‘왜?’를 끊임없이 물으며 유용한 가치를 내놓으라는 닦달에서 사물을 놓아두고 그것들에게 휴식을 주자. 그때 과연 무엇이 보이는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기다려 보기로 하자.


물론 이제껏 저 ‘감기를 권하는’ 눈을 한사코 부릅뜨며 합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인과적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분투가 생산력을 확장하고 다양한 발명과 개발을 이끌어 오늘날과 같은 인류의 삶을 열어왔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만큼 인과율의 권위는 갈수록 공고해졌다


또 앞으로도 합리적 정신과 그에 바탕한 과학, 기술은 여전히 인류 미래의 생존과 번영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형세가 그 역운歷運상 기왕의 물음의 시대에서 새로운 사유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면?


합리적으로 근거를 캐묻는 물음의 시대는 그 이전 신화의 시대나 시원의 세계의 극복인지 타락인지에 상관없이 서구의 정신을 지배했다. 나아가 그것은 서구적 삶과 사고방식이 광범하게 지배함에 따라 지구의 숙명이었다. 그렇듯 이번에는 로고스가 물러나는 또 다른 존재 역운이 들어선다면?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미 상실한 그러나 여전히 상주하는 시원의 새로운 반복이 일어난다면?


이제 인류가 지나온 존재 역사 아래 저 물음의 시대가 어떻게 스스로를 관철해 왔는지 상기해 보자. 그 때 우리는 위험을 감지하는 동시에 구원을 예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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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우리들이 거의 문제 삼지 않는 근거나 원인의 의미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왜’나 근거, 원인의 개념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 말들은 본래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는 원인이란 희랍적으로 사유하면 ‘야기함’(ver-anlassen)으로서 ‘poiesis’를 의미한다고 한다. 포이에시스는 ‘현존(Anwesen)하지 않는 것이 현존하도록 내세움’, ‘어떤 것이 밝게 드러나 현존에 이르게 함’을 말한다. 포이에시스는 테시스로써 수행된다는 것이다.


독일어 ‘wirken’(하다, 작용하다)의 유래인 그리스어 ‘테시스’는 정하여 세움[定立]’, ‘앞에 둠’, ‘어떤 것이 스스로부터 그 자체를 앞에, 가까이 내세우도록 함’, 즉 ‘현존에 이르게 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존이란 ‘감춤과 숨김으로부터 스스로를 밝게 드러내며 가까이 머묾’을 말한다. 결국 포이에시스나 테시스는 은닉으로부터 우리를 향해 스스로를 밝게 드러내며 현존에 이르는, 이르게 하는 존재의 동사적 사태를 기술하는 개념인 셈이다.




한편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런 의미의 테시스는 ‘자연自然’을 의미하는 ‘피시스’(physis)에도 숨겨진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자연은 원래 스스로부터 그 자체를 내보이는 자발적自發的 생기生起이고 발현發現으로서 테시스의 사건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피시스’는 서구 시원에 그리스인들이 존재를 부르던 표현이다. 희랍인들은 ‘앞에 내세움’, ‘현존하게 됨’을 존재의, 또 그에 앞서 자연의 실상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며 현존에 이름, 가까이 머묾’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런데 존재나 피시스의 근본특성인 앞에 내세움은 본래 ‘원인’, ‘근거’의 의미였다. 그렇다면 이는 있음 혹은 자연은 스스로가 자기의 근거라고 밝히는 것이다. 존재는 앞에 내세워짐이고, 또 그 때문에 혹은 그것을 근거로 스스로 그렇게 있다는 것이다.


더 단순하게 얘기하면 있는 것은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이다. 공허한 동어반복일까? 아직은 모호하지만 다음의 사실은 비교적 뚜렷이 드러났다고 본다. 서구 시원에서 있는 어떤 것의 존재 근거나 원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수고롭게 구하거나 따질 필요가 없었다. ‘왜’라고 묻지 마라.


이와 같은 ‘앞에 내세움’이란 의미의 ‘원인’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예술가와 그가 지은 작품의 경우가 그렇다. 예술가는 자신이 짓는 것 안에 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앞에 내세우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작품’이 탄생된다. 그런 의미로 예술가는 작품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때 원인은 시원적 의미의 그것, 즉 앞에 내세움이지 오늘날 통용되는 인과적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아무도 그런 뜻에서 예술가를 작품의 원인이나 근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몸짓을 불러줘 시인은 꽃을 비로소 꽃으로서 있게 했지만, 그렇다고 그나 그의 호명呼名이 꽃의 존재 근거나 원인인 것은 아니다. ‘저 작품의 원인은 아무개 예술가야.’ 말의 뜻이야 어떻게든 전달될 수도 있겠지만 기이하게 들릴 게 틀림없다.




그리스인들은 또한 그와 같이 자발적으로(spontaneously) 생기하는 존재를 진리로서 경험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를 ‘알레테이아’(aletheia)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에게 진리는 존재자와 일치하는 어떤 주관적인 표상이 아니라 존재자들의 존재 자체였던 것이다.


예컨대 장미가 꽃을 피우면서 자신을 활짝 드러내 보이듯이 존재자들이 자신을 환하게 드러내면서 활짝 열려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die Anwesung ins Offene) ‘스스로 앞에 내세움’은 존재이며, 그것은 또 진리라는 것이다.


이성적 추론을 통해 근거를 확보하려는 전통 형이상학을 원인론(aeteiology)적이라고 규정한다면 그와 같이 ‘은닉으로부터 비은폐非隱蔽로 이름’의 존재와 진리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원적 사유는 비은폐론(aletheiology)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과정을 겪으며 이 시원의 비은폐론에서 저 형이상학의 원인론으로 떨어졌을까? 어쩌다 강江의 수원水源을 떠나 하류에서 수원을 구하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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