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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라고 묻지 마라 (2) - 신화에서 로고스로 발현에서 근거로

2021.07.08 | 조회 566 | 공감 0

‘왜’라고 묻지 마라(2)

– 신화神話에서 로고스로,

발현發現에서 근거로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존재의 생기生起를 표현하는 테시스나 포이에시스는 폭넓게 보면 작용이나 활동 일반에 속한다. 희랍에서는 이 작용, 활동을 ‘에르곤’(ἔργον)으로 불렀다. 인도 게르만어 ‘우에르그’(uerg)에 어원을 두고 있는 ‘에르곤’인과의 관점으로 이해되는 작용이 아니라, ‘어떤 것을 비은폐非隱蔽로 이르게 함’을 가리킨다.


서구 시원에서는 작용이나 활동을 어떤 것이 어둠과 감춤으로부터 스스로 그 자체를 밝게 드러냄 혹은 현존에 이름[자현自現; 발현] 또는 그렇게 되도록 함으로 여긴 것이다. 다시 말해 ‘에르곤’을 통해 내세워진 것은 선행하는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온전히 현존에 이른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미에서 본래적으로 현존하는 것의 현존[우시아]을 ‘에너르게이아’ 또는 ‘엔텔레키아’란 말로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별 존재자들(예컨대 어린 참나무)은 그것들의 본성에 해당하는 종적 형상(예컨대 성숙한 참나무)을 현실화하는 활동하는 가운데 존재자로서 현존한다. ‘에르곤’, ‘에너르게이아’엔 ‘앞에 내세움’, ‘현존에 이름’이란 포이에시스, 테시스의 의미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에르곤과 에너르게이아를 각기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작용 사태를 지시하는 ‘actio’(작동, 행위)와 ‘actus’(운동, 활동)으로 번역하고 사유했다. 이를 통해 앞에 내세워짐, 앞에 이르게 됨은 ‘하나의 작용에 의해 비롯됨’이란 의미로 바뀐다. 여기에 이르러 ‘actio’, ‘actus’로서 작용은 원인인 주체의 결과에 대한 관계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현실적인 것들은 인과의 틀 안에서 ‘작용된 것’, ‘작용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으로서 자신을 내보이게 된다.




심지어 신도 우리의 믿음 안에서가 아니라 신학 안에서 ‘최고의 원인’으로서 표상된다. 하이데거는 「기술과 전향」이란 제목의 강의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당대의 사유 방식을 거론하며 신은 인과율의 조명 아래에서 원인, 작용인의 수준으로 내려앉았다고 말한다.


근거를 찾는 형이상학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최종적으로, 궁극적으로 정초하는 ‘가장 근원적인 근원’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최고 존재자는 당연히 자신의 존재 근거를 따로 갖지 않는 ‘causa sui’(자기 원인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계속해서 근거의 근거를 쫓는 무한퇴행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 ‘causa sui’가 서구 형이상학이 신에게 붙인 이름이다. 다른 한편 이 논리는 신 존재 증명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이 철학의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철학의 신에게는] 우리는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을 바칠 수도 없다. causa sui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으로 무릎을 굽힐 수도 없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출 수도 없다.”

(Identität und Diffferenz동일성과 차이)


어떤 식으로든 신을 입증하려는 시도는 신을 사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은 도와 같이 형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원인은 작용인의 의미로 환원된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변화에 따른 것이지 원인에 대한 본래적이며 시원적인 규정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4가지 종류의 원인을 제시한 바 있다.


형상인(사물의 형태, 예컨대 제작될 조각상의 모습), 질료인(사물을 이루는 재료, 예컨대 대리석 등 조각상의 소재), 목적인(사물의 존재 목적, 예컨대 조각의 목적), 작용인(사물을 만들어 주는 능동적인 원인, 예컨대 대리석을 끌로 쪼고 망치로 다듬는 행동)이 그것이다.


근대에 들어서 이 가운데 목적인이 원인의 반열에서 탈락한다. 더 이상 목적을 원인으로 간주하지 않게 된 것이다. 여기에 형상인, 질료인이 작용인에 기초하게 된다. 이로써 작용인이 우세하게 되고, 나아가 단적인 원인이 된다. 사물의 생성과 변화에 책임이 있는 원인은 거의 유일하게 작용 관계에서만 구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작용의 인과 관계를 중심으로 보는 것은 주객분리의 관점과 맞물려 있다. 우리는 통상 경험된 사건에서 주체로서의 원인을 발견하거나 지어낸다. 예컨대 니체가 말하듯 ‘번개가 번쩍인다.’는 동일한 사태의 중복적 표현이다. 번개는 번쩍임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통상 우리는 번개를 원인, 즉 작용이나 속성의 주체[實體]로 그리고 번쩍임을 작용의 결과로 인식한다.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어-술어, 주체-속성이란 이성적 혹은 ‘이차적二次的’인 이분법적 구별 위에서 인과율에 따라 파악하는 것이다. 이로써 현존하는 것은 주체인 우리 앞에 마주한 객관, 대상이 되고 작용이 빚은 것, 즉 모종의 원인과 작용으로부터 나온 결과로서 이해된다. 모든 것은 반드시 선행하는 어떤 것의 작용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는 이제 우리가 ‘연달아’, ‘선행과 후속’의 관점에서 사물을 파악하기 시작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곧 인과관계는 시간의 도식에서 진행되는데 이때 시간은 ‘지금’의 연속으로서 비가역적非可逆的인 것이다.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저간의 사정을 확실한 어조로 밝히고 있다.


“작용, 그러므로 활동과 힘이 있는 곳에 실체가 있다. 오직 이 실체에서 저 현상들의 풍요로운 원천의 자리가 구해져야 한다. … 작용은 이미 인과성의 주체가 결과에 대해 갖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모든 결과가 그 때 일어나는, 즉 시간이 연이음에 따라 규정하는 변전하는 것에서 존립한다면, 이것의 궁극적 주체는 그 모든 변하는 것들의 기체基體로서 지속적인 것, 즉 실체이다.”

(『순수이성비판』 B251; A206)


인과적 지식의 기초인 인과율이 필연적이지도 보편타당하지도 않다는 사실은 영국의 경험론자들이 날카롭게 수행한 사유와 논리 속에 드러났다. 특히 흄에 이르러 결정적으로 인과율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인과율의 ‘신화’는 사실상 무너졌다. 감각적 경험을 유일한 지식, 진리의 원천으로 인정하는 입장에서 전개된 그의 논리는 반박 불가능하다. 어떤 ‘연이은’ 현상, 이를테면 ‘선행하는 사건 A와 후속하는 사건 B’는 시각이나 청각 등의 감각을 통해 경험되는데, 우리가 수용한 감각의 자료들에는 아무리 뒤져 봐도 ‘후속하는 것은 선행하는 것의 결과이다’를 지시하는 것은 없다.


즉 우리는 유일한 지식의 통로인 감각에 기초하는 한, ‘사건 A는 사건 B의 원인이다.’ 혹은 ‘사건 B는 앞선 사건 A의 결과이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건을 언제나 타당한 인과율에 바탕을 둔 필연적 지식이라고 한사코 믿는 입장을 영국 철학자 러셀은 닭의 예로써 설명한다.


러셀 비유 속 닭들은 일정한 시간만 되면 주인이 모이를 갖다 주자 처음에는 잔뜩 경계하고 주인의 손을 피해 달아난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반복되자 닭들은 주인이 나타나면 ‘예외 없이’ 그 결과로 모이가 놓인다고 여기게 된다. 그날도 같은 시간에 주인이 오자 당연히 모이를 기대하며 반갑게 다가갔으나 주인의 생각은 이번엔 달랐다. 그는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위해 닭 요리를 장만하려고 닭장에 온 것이다.



 

다시 이 인과율에 필연적이며 보편타당한 원리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앞서 언급한 칸트이다. 칸트는 흄의 입장을 수용하면서 그렇게 했다. ‘그렇다. 흄의 말대로 인과율은 경험되지 않는다. 인과율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범주로서 우리 안에 있다. 인식을 규정하는 형식적 원리로서 말이다.’ 그래서 두 사건이 ‘연이은’, ‘선행과 후속의 시간 계기’로써 접수되면 반드시, 필연적으로 인식의 기제는 인과율을 적용한다. 그렇게 해서 경험이, 경험적 지식이 성립된다.


이때 외부에서 주어진 직관의 내용과 내 안의 형식적 개념을 잇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두 이종적異種的인 것의 통합을 매개한다. ‘연이음’ 혹은 ‘잇달아’라는 시간 양상으로 지각되면 특별히 인과율의 범주를 적용케 한다. 칸트에게 인과율은 시간 흐름의 법칙인 셈이다.


이로써 칸트는 현상의 세계에 관한 한 흄의 회의론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의 성립가능성을 지켰다고 자임한다. 우리에게 알려지는 현상으로서 세계는 선험적 주관에 의해 구성된 것으로서 이미 인과성의 개념에 따라 정돈돼 있다우리가 집어넣은 인과적 질서를 따라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인과율이 경험 밖에 놓인 사물 자체에까지 적용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칸트의 주장은 경험의 선험적 개념과 구조가 인간과 다른 존재자에게 이 세상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것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reality)에 대한 이러한 ‘각성’은 당시 감수성 충만한 독일의 한 젊은 시인(Heinrich von Kleist)을 자살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그는 약혼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얼마 전 소위 칸트 철학이란 것을 알게 되었소.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철학의 사상 한 가지를 당신에게 소개하려고 하오. 그 사상이 내게 그랬듯 당신에게도 똑같이 심각하고도 고통스런 동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겁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모든 사람들이 푸른색의 안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명 안경을 통해 바라본 대상들이 푸르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눈이 사물들이 있는 바대로 보여주는지, 아니면 사물들이 눈에 속하는 다른 무엇을 사물들에 덧씌운 것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할 겁니다.


… 우리는 우리가 진리라고 부른 것이 정말로 진리인지, 아니면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인지 가려낼 수 없습니다.”

(Deutschland deine Denker독일 너의 사상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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