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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본 세계사 (3)

2021.09.27 | 조회 681 | 공감 0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서 본 세계사 (3)

정략결혼을 통해 대제국을 이루다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합스부르크 왕가는 운이 좋았다. 천운이 따르지 않았더라면 20세기 초까지 그렇게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행운은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기에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역사가들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말부터 천년을 중세라고 한다. 근대는 16세기부터 시작되는 셈인데 원래 중세라는 말은 ‘중간에 낀 시대’(medium aevum)라는 뜻이다. 이른바 16세기의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이 보기에는 중세는 자신들의 새 시대와 찬란한 그리스·로마 시대 사이에 낀 어두운 시대였던 것이다.


근대 초 합스부르크 가의 흥기는 기사적 행동 즉 전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결혼을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왕가와 귀족들의 혼인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다. 신랑과 신부가 자신들의 배우자를 애정에 기반을 두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문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우자를 정했던 것이다. 공주나 왕자는 당연히 다른 왕족이나 대귀족과 결혼을 한다. 애정에 따른 결혼과는 전혀 동떨어진 결혼형태였다.


정략적 입장에서는 신부가 남자 형제가 없는 무남독녀라면 최상이다. 신부의 아버지가 죽으면 신랑은 신부와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랑인 외국인이 신부 나라의 왕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의 왕자 막시밀리안(1459-1519)이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운 좋은 남자였다.


그는 부르군디(프랑스어로는 부르고뉴) 공국의 무남독녀 마리아와 약혼했는데 물론 그의 부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재위 1452-1493)의 정략결혼 정책의 일환이었다.



부르군디의 마리아


대부분의 역사가들에 의해 무능하고 게으른 황제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3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 바로 아들을 부르군디 공작의 딸과 약혼하게 만든 것이었다.


당시 부르군디 공작은 프랑스 왕의 가신이었다. 그는 부르군디 공국을 프랑스 왕에게서 독립된 왕국으로 만들려고 시도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러나 대담공이라는 별명이 붙은 부르군디 공작 샤를에게는 부르군디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벨기에도 그 지배하에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방은 상업이 번창하여 부유한 도시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와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샤를은 부르고뉴와 인접한 로렌 공작과 싸웠다. 프랑스 왕은 말할 것도 없고 스위스 인들도 그의 적이 되었는데 부르군디 공작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이 대담한 인물은 결국 로렌 공작과 스위스 인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1477년 낭시 전투)



낭시 전투 후 발견된 샤를


후사로는 19세의 딸 마리아가 있었다. 부친이 전사하자 마리아에게는 도처에 적들이 득실거리고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라는 약혼자 막시밀리안뿐이었다. 그래서 두 젊은이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막시밀리안은 18세였다. 마리아는 곧 연이어 아들과 딸을 낳았다. 필립과 마르가레타였는데 후일 모두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된다.


그런데 마리아는 1482년 남편과 사냥을 나갔다가 낙마하는 바람에 등이 부러져 죽었다.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였다. 막시밀리안은 졸지에 홀아비가 되었지만 부르군디 공국을 혼자서 차지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행운은 계속된다. 그는 또 4년 뒤에는 부친의 도움으로 로마 왕의 자리에 오르고 이를 바탕으로 1508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 있었다. 로마 왕이라는 칭호는 독일 왕을 말한다. 물론 독일의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는 왕으로서 독일 왕이 로마제국의 계승자인 것처럼 내세우기 위한 공허한 칭호였다.



막시밀리안 황제


결혼을 잘 하는 바람에 부르군디 공국을 차지하였던 막시밀리안은 결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들 필립(무척 잘 생겨서 역사에서는 ‘필립 미남공’이라고 부른다)을 당시 떠오르는 강국 스페인의 공주와 결혼시켰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 사람들로부터 ‘후안나 라 로카’ 즉 광녀狂女 후안나라 불린 사람이다. 후안나 공주에게는 포르투갈 왕에게 시집가서 포르투갈 왕비가 된 언니와 오빠가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요절하였다. 심지어 언니가 낳은 아들도 어린 나이에 죽었다. 후안나 외에는 이사벨 여왕(재위 1474-1504)을 계승할 인물이 없었다. 후안나가 카스티야의 여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후안나는 우울증 증세도 있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였다. 그래서 후안나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스페인으로 온 필립 미남공이 후안나의 부친인 아라곤 왕 페르난도의 양해 하에 카스티야 왕이 되었다. 그러나 미남공 필립도 명이 짧았다. 카스티야 왕이 된 지 수개월 뒤 그만 죽고 말았다.(1506)


필립에게는 아들이 둘, 딸이 넷 있었다. 그 가운데 장남인 카를(스페인어로는 카를로스)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었다. 여섯 살에 불과하였고 모친 후안나가 살아 있어 왕위가 즉각 주어진 것은 아니다. 왕위는 아라곤 왕이자 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이었던 페르난도 왕이 1516년에 죽자 주어졌다. 모후 후안나와 함께 공동으로 통치한다는 조건이었다.



카를로스 황제. 막시밀리안 황제의 손자로서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였다.


카를로스는 불과 16세의 나이에 스페인 왕이 된 것이다. 오늘날이라면 고등학생 정도의 어린 나이였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이런 일이 왕정 시대에는 비일비재하였다. 왕의 아들이 왕위계승의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스페인 왕이 된 지 3년 뒤에는 자신의 조부인 막시밀리안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더 나아가 부르군디 공국의 공작으로서 유럽 최대의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가 된 것이다. 아라곤 왕의 통치권에 속한 이탈리아 영토인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도 카를로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또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카스티야 왕국이 차지한 중남미 아메리카 땅도 카스티야의 속령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카를로스의 영토에 속했다.


최근 STB 상생방송에서 틀어주고 있는 드라마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는 바로 이 카를로스 1세를 다룬 사극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는 카를 5세이다. 카를(Karl)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섯 번째 황제라는 것이다. 위의 드라마는 스페인 국영방송에서 제작하여 2015년과 2016년에 17부로 방영되었다. 상생방송에서는 각편을 둘로 나누어 34회로 방영하고 있다.




카를로스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이다. 그의 조부 막시밀리안이 부르군디 왕녀와 결혼하고 그의 부친 필립 미남공이 스페인 공주와 결혼하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왕국이 그의 영토가 된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과 아메리카가 덧붙여진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영토가 아니었을까?


그 모든 영토를 다스린다는 것이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최대군주 카를로스는 죽기 수년 전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원하던 일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특히 당시 세력이 일취월장하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유럽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일에 실패한 것이다. 독일의 수도사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이 신구교로 갈라져 원수처럼 싸웠다. 구교(가톨릭)을 대변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그는 신교도들을 격파하지 못했다.


이러한 신성한 과업에 실패한 그는 스스로 왕조에서 물러나면서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 왕의 자리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각각 물려주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시 스페인 왕실과 오스트리아 중심의 신성로마제국으로 나뉘게 된다.



카를 5세(좌)와 펠리페 2세(우)의 모습


프리드리히 3세부터 시작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정책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놀리는 노래가 생겨났다.


“다른 자들은 전쟁을 하고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는 결혼을 하여라.

다른 자들이 마르스 신으로부터 얻는 것을

비너스 여신이 네게 주니.”


결혼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는 유럽 최대의 지배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른 왕가에서 전쟁을 통해 힘들게 얻는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는 정략결혼을 통해 쉽게 손에 넣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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