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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26)

2022.10.28 | 조회 3099 | 공감 0

「삼일신고三一神誥」의 수행(2)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존재의 하향도, 성명정性命精 삼진三眞

옛날이나 지금이나 철학에서 구명해야할 4대 중심 과제는 존재론存在論과 우주론宇宙論, 인식론認識論과 수행론修行論의 분야로 압축해볼 수 있다.


존재론은 실재實在하는 것을 찾아 그 자체를 해명解明하는 탐구이고, 우주론은 모든 생성의 근원을 찾아 그 원인(原因, aitia)을 밝히는 작업이고, 인식론은 참된 앎의 기원起源을 찾아 인식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고, 수행론은 본연의 인간성을 찾아 타고난 생명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문제는 이들 각 분야에서 정리한 원리가 현상계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충분히 감당堪當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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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을 통찰하여 가장 종합적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인식방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수론象數論이다. 상수는 바로 ‘수數’와 ‘상象’을 결합하여 다양한 변화의 본질을 인식하는 원리다.


서양철학에서 상수론의 기원은 우주만물의 변화현상을 ‘수의 비율’로 표현한 퓌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569~475)에서 찾아볼 수 있고, 반면에 동양철학에서 상수론은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등에서 진수를 찾아볼 수 있다. ‘하도’에 등장하는 열 개의 수數와 낙서에 배열된 아홉 개의 수는 한민족의 가장 오래된 고유 경전으로 알려진 「천부경」에 기원을 두고 있다.


『환단고기』에 의거하면 「천부경」은 태고의 시원국가 환국시대桓國時代에 출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하나[一]에서 열[十]까지의 기본수基本數와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기본수들은 단순한 셈법으로서의 수가 아니라, 우주자연의 창조변화 법칙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상수象數이다. 따라서 「천부경」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상수론으로 볼 수 있다.




「천부경」의 대의大意를 요약하자면, 먼저 “일시무시일 석삼극무진본一始無始一 析三極無盡本”이라 하여 ‘무無’에서 튀어나온 ‘하나’는 시작이고, ‘셋’으로 분석되어도 그 본질이 변함이 없음을 전제하고, 다음으로 “일묘연만왕만래 용변부동본一玅衍萬往萬來 用變不動變]”이라 하여 그 ‘하나’에서 무수한 것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지지만 결국 그 본질로 돌아가게 되는데,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 하여 바로 다음의 생성을 위해 완성된 ‘하나’로 돌아오는 것으로 매듭짓는다.


시작으로서의 ‘하나’는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전적으로 더 이상의 상위가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를 상징한다. 그런 ‘하나’는 전일全一하다. 왜냐하면 ‘하나’가 ‘셋’으로 분석되어도 그 본질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는 ‘하나의 전체’로서 개별성과 보편성을 가진다. 이는 ‘하나’가 개별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완전한 존재이고, 통일성이라는 의미에서 보편적인 존재임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개별성과 보편성을 통섭統攝하는 ‘하나’는 부분과 전체에서 항상 동일한 본질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본성상 차별이 없는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천부경」의 상수론은 존재론의 원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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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한 ‘하나’는 모든 존재의 근원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는 무제약적無制約的인 존재를 상징한다. 즉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의 생성은 그 원인이 있고, 궁극의 원인은 근원根源의 ‘하나’에 이른다.


이 ‘하나’는 생성 변화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根源이요 완성完成이라는 의미에서 궁극의 ‘제1원인’이다. ‘제1원인’은 자체로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것들의 생성변화를 일으키는 원동자原動者이다.


따라서 현상계의 모든 것들은 근원의 ‘하나’에서 시작하여 분열 성장하고, 성숙하여 결국 근원의 ‘하나’로 돌아가 완성되기 때문에, ‘하나’는 끝남과 동시에 새로운 존재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부경」의 상수론은 우주론의 원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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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한 ‘하나’는 생성을 일으키는 원동자라는 의미에서 성스럽고 거룩한 ‘신의 마음’을 상징할 수 있다. ‘신의 마음’은 ‘안으로나 밖으로나 텅 비어 있는[外虛內空]’ 존재이지만,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체로 아무런 형체가 없을지라도 창조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전일한 ‘신의 마음’은 본성상 부분과 전체를 감싸고 있으면서 현상계로 들어와 모든 것에 침투해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실현實現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천부경」의 상수론은 수행론의 원리를 담고 있다.




‘신의 마음’으로 정의된 ‘하나’는 그 존재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근원의 ‘일신一神’, 즉 조화성신造化聖神으로 말할 수 있다. ‘조화성신’은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다양한 것들을 짓는 근원이다. 이는 ‘신의 마음’이 곧 시공時空의 영역으로 들어와서 실제로 창조[生]와 성육[成]에 직접적으로 역사役事하게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신의 마음’은 자체로 보면 ‘초감성적超感性的인 실재’로서 ‘일신’이지만, 현상계로 들어와서는 시공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주만유를 창조하는 “생물지심生物之心” 형체를 갖추어 만물을 이루는 “성물지심成物之心”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시공의 영역으로 들어온 ‘신의 마음’은 자체로 형체가 전혀 없지만, 대광명의 형상形像으로 표상表象된다. 이는 ‘생물지심’으로서의 신神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광명의 형상은 시공 안에서 벌어지는 성육으로 작용할 때에는 형체를 갖추어 장존長存하는 생명력으로 표징表徵된다. 이는 ‘성물지심’으로서의 기氣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공의 영역으로 들어온 ‘신의 마음’은, 자체로 보면 ‘생물지심’의 ‘신’이지만, 현실적인 형체로 드러나는 측면으로 보면, 밝고 투명한 ‘성물지심’의 ‘기’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배달국倍達國 시대의 발귀리發貴理는 『환단고기』의 “송가頌歌”에서 “광대한 비움에 광명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상이요, 무한한 기氣가 항존恒存하니 이것이 신의 변화이다[大虛有光 是神之像 大氣長存 是神之化]”라고 정의한다.


‘생물지심’으로 표현되는 ‘신의 마음’은 ‘으뜸’이라는 의미에서 원신元神으로 말할 수 있고, ‘성물지심’으로 표현되는 ‘신의 마음’은 밝고 밝아 어둡지 않은[炯炯不眛] 원기元氣로 말해질 수 있다. ‘신의 마음’을 ‘원신’으로 말한 것은 새로움이라는 창조성의 구조에서 말한 것이고, ‘원기’로 말한 것은 성육이라는 변화성의 구조에서 말한 것이다.


그럼에도 ‘생물지심’의 ‘원신’과 ‘성물지심’의 ‘원기’는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다. 한마디로 ‘신은 기이다[神卽氣]’.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하고[三神者 外包一氣]”, “일기는 안으로 삼신이 있다[一氣者 內有三神]”고 정의한다.


‘생물지심’과 ‘성물지심’으로 분석되는 ‘신의 마음’은 현상계에서 ‘일체삼용一體三用’의 논리에 따라 자신을 구현한다. 여기에서 ‘일체一體’는 본체로서 전일한 ‘일신一神’을 말하고, ‘삼용三用’은 실제로 구현하는 신의 세 손길[三神]을 뜻한다. 세 손길은 창조의 의미에서 조화造化, 성육의 의미에서 교화敎化,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중도적인 의미에서 치화治化의 손길로 역사役事한다.


그럼에도 세 손길은 전적으로 같은 본성이라는 의미에서 ‘일신은 즉 삼신[一神卽三神]’이다. 이는 ‘신의 마음’이 바로 ‘일신’을 본체로 하여 우주만물의 생성으로 구현됨을 뜻한다. 이 과정을 존재의 하향도下向道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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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하향도로 펼쳐지는 현상계에서 인간의 창조변화는 어떻게 분석되는가?

인간도 ‘신의 마음’이 들어와 개별적인 생명체로 탄생하게 되는데, 이 또한 본체로서의 ‘일신’이 시공 안으로 들어와 창조와 성육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작용함을 뜻한다. 즉 ‘생물지심’이 ‘원신’의 의미에서 조화의 손길로, ‘성물지심’이 ‘원기’의 의미에서 교화의 손길로 작용하게 되기 때문에, ‘신의 마음’은 ‘원신’과 ‘원기’의 융합체인 개별적인 생명체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단군세기』 서문에서는 “조화의 신이 내려와 나의 성이 되고, 교화의 신이 내려와 나의 명이 되고, 치화의 신이 내려와 나의 정이 된다[造化之神 降爲我性 敎化之神 降爲我命 治化之神 降爲我精]”고 정의한다.


‘성명정性命精’은 신으로부터 받은 ‘진실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삼진三眞’이다. 이는 ‘신의 마음’이 ‘성명정’으로 전환됨을 뜻한다. 왜냐하면 창조 변화되는 것들은 필연적으로 시공時空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공 안에서 창조된 개별적인 인간의 경우에서, 조화의 손길은 ‘원신’의 의미에서 ‘진성’으로 작용하고, 교화의 손길은 ‘원기’의 의미에서 ‘진명’으로 작용하고, 치화의 손길은 ‘진성’과 ‘진명’을 조율하는 중도적인 의미에서 ‘원신’과 ‘원기’의 융합인 ‘진정’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성명정’은 ‘하나’의 개별적인 생명체를 구성한다. 왜냐하면 ‘성’이 없는 ‘명’은 없고, ‘명’이 없는 ‘성’은 없으며, ‘성’과 ‘명’의 통일체가 바로 ‘정’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삼진’이 개별적인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 안착安着하게 되는가이다. 「삼일신고」에 근거해보면, ‘삼진’은 ‘삼방三房’에 안착한다. ‘삼방’은 인간의 ‘마음[心]’, 생명의 ‘기운[氣]’, 생명을 유지하는 ‘몸[身]’으로 분석된다. 


여기에서 ‘진성’은 ‘마음의 방[心房]’으로 들어가 개별적인 인간성을 규정하는 ‘본성本性’이 되고, ‘진명’은 ‘기운의 방[氣房]’으로 들어가 개별적인 생명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수명壽命’이 되고, ‘진정’은 ‘몸의 방[身房]’으로 들어가 개별적인 생명체의 생존력을 규정하는 ‘정수精髓’가 된다.


전통적인 단학丹學에서는 ‘진성’이 거주하는 마음의 방은 머리 부분에 있는 상단전上丹田이고, ‘진명’이 거주하는 기운의 방은 가슴 부분에 있는 중단전中丹田이고, ‘진정’이 거주하는 몸의 방은 배꼽 밑에 위치해 있는 하단전下丹田이라고 규정한다.




조화의 손길로 작용하는 ‘진성’은 왜 마음[心]의 방에 들어와 있는가?

그것은 ‘성’이 ‘생명을 구현하는 마음[性=心+生]’으로 규정規定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역周易』의 「계사繫辭」는 “그것(하늘의 마음)을 이루는 것이 성이다[成之者性]”라고 정의한다. 교화의 손길로 작용하는 ‘진명’은 기운[氣]의 방에 들어와 있다. 개별적인 생명의 ‘수명’은 자연의 기운, 즉 우주적인 생명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화의 손길로 작용하는 ‘진정’은 몸[身]의 방에 안착한다. 인간 몸체의 생명력을 규정하는 ‘정수’는 대자연의 정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의 방’, ‘기운의 방’, ‘몸의 방’에 안착한 ‘삼진’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가?

『주역周易』 「계사繫辭」에서 “그것(하늘의 마음)을 계승하는 것은 선이다[繼之者善]”라고 했듯이, ‘마음의 방’에 안착한 ‘진성’은 ‘선한 마음[善]’으로 발현된다. ‘선한 마음’이란 전혀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우주적인 마음, 즉 ‘도심道心’이다.


반면에 ‘기운의 방’에 안착한 ‘진명’은 ‘맑은 기운[淸]’으로 구현된다. 그 기운은 맑고 맑은 우주적인 생명의 기운이요 대자연의 순수한 기운으로. 수명受命과 사명使命을 다하는 ‘천명天命’이다.


그리고 ‘몸의 방’에 안착한 ‘진정’은 ‘두터운 힘[厚]’으로 발현된다. ‘두터운 힘’은 본래 대자연의 생명력, 즉 우주적인 생명력과 같은 것으로, 진리사명을 실현하는 돈후한 생명력이다.


그러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신의 마음’이 전환된 ‘진성’, ‘진명’, ‘진정’으로 구현된 ‘신’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에는 ‘선악善惡’이 있고, 생명의 기운에는 ‘청탁淸濁’이 있고, 몸에는 ‘후박厚薄’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개별적인 인간에게는 삶의 과정에서 따라다니는 착한 마음[善]과 거짓된 마음[惡], 맑은 기운[淸]과 오염된 탁한 기운[濁], 두터운 힘[厚]과 비루한 힘[薄]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상에 살면서 항상 삶의 조건에 적응하고 의식적으로 변화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삼진’이 ‘악한 마음’, ‘탁한 기운’, ‘비루한 힘’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도심’을 구현하지 못하게 되고, ‘천명’을 따르지 않게 되고, 본연의 ‘정력’을 보존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다가 지쳐서 늙고[老] 병들고[病] 죽게[死] 되는 한계상황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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