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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의 메시지

2024.03.06 | 조회 1331 | 공감 0

영화 <파묘>의 메시지

- 여우였던 무라야마 지준 


영화 <파묘>에서 무라야마 지준(준지)의 비중이 높지않아서 감독이 말하는 메시지는 아니지 않나싶었는데, 무라야마 지준(村山 智順)에 관한 논문을 읽다보니, 정작 영화에서 말하는 모든 사건의 원흉은 무라야마 지준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곡성>에서도 무라야마 지준이 배경으로 나오는데요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일본에서 풍수나 주술, 천문 등 음사와 관련된 것들은 음양사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영화에서 친일파에게 묘를 쓰라고 한 '기순애=키츠네=여우=음양사=무라야마 준지'였죠





"신으로 모셔져 있던 이 몸은 원래 남산의 신궁으로 갈 예정이었다. 망할 여우 놈이 이곳에 데려왔지"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18일, 아마테라스 신과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사, 곧 “신사를 조선 경기도 경성부 남산에 창립하고 사격을 관폐대사에 열列할 것”이라는 내각고시가 내각 총리대신 하라 다카시原敬로부터 나왔습니다. 


서울의 남산에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으로 불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천조대신)와 메이지 천황을 모신다는 건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로 조선인의 조상과 통치자를 일본인의 조상과 통치자로 바꾸겠다는 뜻이죠 




일제는 일본의 신도(神道)를 식민지 조선의 국교로 하려했고, 불교, 기독교 이외의 민족종교(대종교, 천도교, 보천교 등)를 모두 신종교이자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탄압했습니다. 


"정령은 동물이나 인간의 영이 사물에 붙어 만들어진 거에요. 이 땅엔 있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 될 것. 그것과 마주했을 때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를 가능케하는 학문적 근거를 댄 인물이 무라야마 지준이었습니다. 무라야마는 <조선의 풍수>, <조선의 귀신>, <조선의 무격>, <조선의 점복과 예언> 등 네 권의 책을 쓰면서 조선의 민중신앙을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미신에 불과하다. 한국인은 무격에 의지하는 소극적 행태를 보인다'고 비하했습니다.




결국, 무라야마는 1935년 <조선의 유사종교>를 썼고, 조선총독부는 종교 담당부서를 학무국에서 경무국으로 옮겼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 담당 부서를 지금의 문화관광부에서 행정안전부의 경찰청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때부터 한국의 민족종교(천도교, 대종교, 보천교)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 했습니다.



"이건 일본 귀신이다. 일본 귀신은 이유 없이 아무나 다 죽인다."


영화 중반부터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쓰는 풍수가 상덕, 무당 화림, 법사 봉길, 장의사 영근 등은 일본의 정령, 요괴와 대결을 펼칩니다. 소위 풍수와 정령, 귀신, 음양오행의 대결인데, 이것은 조선의 정신과 일본 정신의 대립으로 이해됩니다. 




무라야마 지준은 조선의 풍수와 귀신, 정령을 일본의 신도(神道)와 비교하여 전 근대적이고 미개한것으로 치부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우리의 무속과 전통 신앙, 종교를 '사이비'나 '이단' 정도로 치부합니다. 


일제강점기 무라야마 지준이 주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인들의 머리(山) 속에 박아놓은 쇠말뚝은 '조선의 무속, 민간 신앙은 미개하며 야만적이다'라는 인식이며,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 한국의 정신을 근대 시기 일제가 만든 종교(Religion)의 틀에 가둬놓고 '신종교, 유사종교, 사이비종교'로 왜곡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대일항쟁에 뛰어들고 민중의 희망이었던 동학(천도교), 대종교, 보화(보천교)는 그들이 규정해놓은대로 '종교'가 아니라 한국의 정신, 인간이 가야하는 길(道)이었습니다.


▼ 무라야마 지준과 조선총독부 관련 참고 논문

한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면적이고 근본적이며 장식 없는 문화를 고찰해야만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의 그것은 묘지풍수라고 무라야마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묘지 풍수란 자손의 현실적 번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중략) 즉 묘지 풍수는 선인에게 안주할 땅을 바치고 이로써 그 영(靈)을 영원히 수습하려는 일차적 추효관념(追孝觀念)보다도 오히려 자손의 번영, 행복을 위해 선인의 분묘를 길지(吉地)로 구한다는 이차적이고 이기적, 현실적인 관념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것이라 하였다. 


무라야마는 조선인에게는 ‘불에 의한 정화’라는 관념이 무의식적으로 잠재해 있어서, 악귀가 입을 통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불로  조리하는 것이 조선의 일반적인 식생활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맵고 냄새나는 것을 악귀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고추, 파, 마늘이  많이 사용되며,  제사나 굿을 할 때 팥떡 등 적색음식물이 주로 사용되는 것도 축귀법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중략)  무라야마는 축귀법적 측면을  부각시켜서 조선의 문화가 귀신신앙의 지대한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것인 양 일반화 했다고 할 수 있다. 


무라야마는 특히 조선의 민간신앙에서 주도적인 존재로서의 무(巫)의 폐해에 주목하였다.


그는 조선의 무격신앙을 ‘조선 민간의 기초신앙의 중추’라고 정의하면서도 악귀를 모신다는 이유 등을 들어 그것을 미신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총독부의 어용신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성신문에서의 기사자료들을 인용하여 조선의 무격신앙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원시 민간신앙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현대의 생활에 기여하는 바가 없”으며, “사상의 계발, 문화의 진보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반사회적인 범죄의 원인이 되고 경제생활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초자연적인 힘 또는 존재를 설명하는 하나의 신앙체계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무라야마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문명 진화론적 입장에서 일본은 문명, 조선은 야만, 미개라는 양분적 사고 하에 조선의 민간신앙을 원시적이라고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민중은 자력갱생적 기력의 왕성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의 힘에 속박되어 운명관, 숙명관의 인생관에서 해방되지  못하였으며, 과학적인 지식의 보급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현상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는 상식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민중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힘으로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다만 축귀로 귀신의 재앙을 없애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그러한 소극적 생활유지욕구가 귀신의 활동을 더욱 성하게 하고  무격을 찾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무라야마는 보았다.


김희영. (2009).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조선인식 -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 日本文化學報, 0(43), 323–342.


3·1운동 이전인 무단정치시기에는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식민지 종교정책의 기반이 조성된 때로서, 1911년 불교 통제를 위한 ‘사찰령’과 유림 회유를 위한 ‘경학원 규정’을 만들고, 1915년에는 신도와 기독교를 규제하기 위해 ‘포교규칙’을 제정한 것에서 그 특징을 찾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 ‘신종교’를 이른바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본 천황의 신격화와 신사참배 및 내선일체 사상이 강요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1939년 종교단체법이 만들어지며 ‘신종교’의 입지는 더욱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어, 강제해산당하거나 오히려 종교보국운동에 동원되기도 한다. 즉 종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일본 메이지시대의 종교정책이 조선총독부로 이어지고 있다. 


그 실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신도, 불도 그리고 기독교만 공식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되고 나머지는 모두 ‘좌도(左道)’ 또는 ‘사교(邪敎)’나 ‘유사종교’ 혹은 ‘사이비종교’ 등으로 규정되는 상황이었다.


1919년 문부성 종교통첩에 나오는 ‘종교유사의 행위’라는 표현 이후 1926년, 1929년의 ‘제2차종교법안’과 ‘제1타종교단체법안’에 나오는 ‘유사종교’라는 용어가 1920년대 후반 조선에서도 정착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지고 있다


이후 ‘유사종교’라는 용어는 1935년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의 『朝鮮の類似宗敎』에 이르러 한국의 ‘신종교’를 학문적으로 분류하는 범주로 악용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일제가 이 ‘유사종교’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의 ‘신종교’를 통제, 탄압, 해산하는 근거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신종교’를 종교단체를 담당하는 학무국이 아니라 경무국을 중심으로 감시, 탄압하는 정책으로 일관한다. 한국에서 자생한 민족종교는 정식 종교가 아닌 ‘유사종교’로서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중적인 잣대를 제시하여 엄중한 관리와 와해 또는 해체를 유도했던 것이다


무라야마 지쥰(1891~1968)은 일본 니이카타 출신으로 일찍 어머니를 잃은 뒤 묘광사에 들어가 그 사찰 주지 무라야마 지젠의 양자가 되었다 한다. 그는 1916년부터 1919년 7월까지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고, 종교사회학에 관심이 있었다. 대학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 촉탁으로 조사활동을 하는 한편 세브란스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다 한다. 1941년 무라야마는 조선 총독부 촉탁직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조선장학회의 주사로 근무하였고 1945년 양부 무라야마 지젠이 세상을 뜨자 그 사찰의 주지가 되었다. 


그가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일제의 조선통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 시기로서, 이른바 ‘내지연장주의에 의한 동화(同化)정책’이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시기이다. 즉 이 시기 일제의 구관(舊慣)제도에 대한 조사사업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는데, 무라야마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 사람들을 정신적, 사상적으로 어떻게 하면 동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이조 중세부터 유사종교 발생 당시 조선민중의 정신생활은 지적 비판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맹목적 신앙에 의지하며 대단히 현세적인 생활전개를 신비적으로 동경’하는 등 이른바 ‘조선민중의 무지’에서 한국 ‘신종교’ 출현의 배경으로 이해하고 있다.


‘유사종교’의 장래를 위해서는 ‘해산하든가 아니면 외적 운동이 아니라 내부성찰에 전념하여 참다운 종교로 다시 태어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요컨대 당시 한국 ‘신종교’가 더 이상 ‘유사종교’로서 ‘민중들을 현혹시키지 말고 해산하든가 내부 성찰을 통해 다시 태어나 종교로서 공인을 받지 않으면 쇠퇴의 길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한국 신종교가 ‘경제적으로는 곤궁을 초래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소요사건을 일으키고 민중을 신동하며 인심을 현혹하고 구습을 고집하고 진흥운동에 배치되는 등 식민지 통치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나아가 ‘사회로부터도 혐오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사상적으로는 혁명사상을 고취하고 민족의식을 농후하게 조장하였고 근로정신을 저해하고 사회운동 발생의 기초를 만드는 등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입장이자 분석결과를 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영, (2017). 식민지시대 한국 `신종교` 단체의 동향과 특징 - 『朝鮮の類似宗敎』(村山智順, 1935)의 재검토를 중심으로. 韓日民族問題硏究, 0(32), 32, 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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