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단가문자를 집대성한 권극중

2010.02.22 | 조회 5452


 
 한말 한반도에 강세하신 강증산 상제님은 유·불·선의 진액을 뽑아 모아 하나로 통일하여 새 삶의 길을 열어주셨다. 상제님은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섭리에 따라 인류의 시원 성씨인 진주 강씨(晋州姜氏) 문중의 문(文) 자 회(會) 자님을 성부님으로, 수백년 전래의 전통적인 동방의 단학수행 집안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양(良) 자 덕(德) 자님을 성모님으로 하여 동방의 이 땅에 강세하셨다. 상제님께서 외가로 삼으신 성모님 집안의 내력을 살펴보면, 조선왕조 500년 역사상 전통적인 단가(丹家) 계통의 수행자 가운데 그 이론을 집대성하고 선(仙) 수행을 실천했던 가장 큰 인물로 청하자(靑霞子) 권극중(權克中)이 있다. 성모님은 바로 그 권극중의 9대손이시다. 청하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단학사상은 은둔적 지식층을 통한 내면적 전승에 의존했는데, 그의『참동계 주해』가 나옴으로써 비로소 사상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단학사상은 유·불·선 이외에 한국인의 심층적 의식구조에 지하수처럼 면면히 흐르던 제3의 사상을 한국사상사의 지평에 드러내주었다고 평해진다.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살며 동방단가 이론을 집대성한 권극중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보고 상제님과는 또한 어떤 인연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생애와 학문 탐구로의 길
 권극중(1585∼1659)은 조선 선조 18년(1585년) 3월, 전라도 동면(東面) 송산(松山)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기이한 꿈과 함께 푸른 안개가 자욱했다하여 호를 청하자(靑霞子)라 했으며, 자는 정지(正之)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그는 6∼7세 때부터 문장에 소질이 있어 사람들은 왕발(王勃)이 다시 태어났다고 하였다. 8세 때 임진왜란 와중에 모친의 상을 당하였는데 전란 속에서도 모친상을 극진히 모셨다.
 
 13세 때는 석계(石溪) 최명룡(崔命龍)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했다. 그러다가 22세 무렵에 석계가 연산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에게 권극중의 학문과 자질이 뛰어남을 추천하여 만났을 때, 당시 청하자는 『심경(心境)』, 『근사록(近思錄)』 등의 공부를 마친 후 『역경(易經)』을 공부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에 사계가 청하자에게 역경의 이치에 대하여 물었는데, 청하의 뛰어난 답변에 탄복하였다 한다.
 
 이후 사계의 권유로 몇 달간 그의 문하에서 머물며 공부했다. 그는 또 석계의 지도에 따라 현주(玄洲) 조찬한(趙纘韓)을 좇아 시문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시문에 대한 그의 자질이 탁월하여 석주(石洲) 권필(權?)이 극찬했다고 전한다.
 
 28세 때인 광해군 12년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잠시 태학에 유학하였으나 그 후 계축옥사와 영창대군의 죽음 등 세도가 어지러움을 보고 낙향하였다.
 
 1618년 광해군 10년에 인목대비 폐출사건이 일어나자 청하자는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면서 “선비라는 이름이 되는 것은 강상대의(綱常大義)가 있기 때문이요. 이제 국모가 없어지는 날을 당하여 어찌 입신의 바람을 가지겠는가.”라 하였다. 그 후 2년 뒤 전시에 나섰다가 우연히 스승 석계의 임종소식을 접하고 스승의 장례를 지낸 후 과거보러 가는 길을 접고 귀향하였다. 이로부터 깊은 실의와 좌절로 세상사에 뜻을 접고 은둔적 삶으로 일관하며 일생을 학문탐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청하자는 학인들과 성리학을 담론하거나 시우들과 교류하며 도가적인 성향의 다양한 인물들과도 만났는데 청하자가 ‘선인’이라 칭송한 박남평, 단학에 저명한 남궁두, 북창 정렴의 후손인 정두경,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을 세상에 알린 이식 등이 그와 교류하였다.
 
 
 동방 단학문자(丹家文字)의 개산조(開山祖)
 청하자는 55세에 『참동계 주해(參同契 註解)』전5권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유가의 역의 쾌상과 도가의 단법원리가 자연히 부합됨을 세세히 밝히며 서로 동일하다는 단역참동론(丹易參同論)의 견해를 편다. 또한 유불선 삼도(三道)는 태극을 종지로 하며, 모두 대역(大易)에서 나왔다는 독특한 견해를 주장한다. 그리고 태극은 만물의 근본이 되며 만물은 변화를 통해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데, 다시 태극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것이 단가수련이며 생사를 극복하는 불생불사(不生不死)의 도라는 것이다.
 
 이는 선인이나 부처가 다같이 지향하는 바이므로, 선과 불은 그 근원이 하나라는 선불동원론(仙佛同源論)을 주장한다. 이것은 조선조 기철학을 대표하는 화담 서경덕이나 율곡 등과는 다른 견해로 불사(不死)를 추구하는 단학사상의 근거를 세웠다.
 
 그리고 청하자의 사후 시문을 모아 편집한 『청하집(靑霞集)』이 있는데 제7권의 「독서록」에서 그는 태극을 우주가 삼라만상으로 분화되기 이전 이(理), 기(氣)가 혼연일체 된 상태로 파악했다. 이것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나 조선조의 이율곡이 태극을 이(理)로 규정하고 음양을 기(氣)로 간주하였음과, 그리고 율곡이 이와 기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므로 사물의 존재이전에 이(理)가 선재(先在)할 수 없음을 주장한 것과 비교해볼 때, 권극중의 독자적인 견해라고 평가한다.
 
 단학사상에 관한 권극중의 업적에 대해 정두경은 “그의 학문은 삼교(三敎)를 넓게 섭렵하였으며 단학수련에 더욱 깊었다.”고 했으며,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그를 ‘단학과 방술의 대가’로 지목했으며, 황윤석은 『증보해동이적』에서 ‘우리나라 단학 이론의 개창자’로 평가했다. 그 외 이규경은 단학파의 저서로서 후대에 전해질 목록을 거론할 때 『참동계주해』를 언급하였다.
 
 도교사상사적 위치에서 최치원이 고대의 대표자라면 김시습은 조선단학사상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전반적 틀은 성리학적 이기론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단학사상에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 후 정렴이나 한무외 등은 단학사상의 주체성은 확립하였으나 방향의 시사에 그쳤다.
 
 청하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독자적 입장을 지닌 이론적 틀을 세우고, 철학적 의미를 발굴하여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단학의 일대 변혁을 이루었다. 또한 단학에 불교와 성리학을 융회시켜 유·불·선 삼교일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한다. 이것은 태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문화의 심층부에 흐르고 있는 유·불·선 이전의 뿌리문화인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드러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청하자가 제시한 수련단계와 방법
 청하자가 제시한 수련단계 또한 이전의 조선 내단사상에서는 보기 어려운 체계적인 것이었다. 김시습이나 정렴, 한무외 등에게서 단편적으로 논의되던 것이 보다 조직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그는 인간의 잠재된 능력에 따라 수련방법에도 3단계의 차등이 있다고 본다. 첫째가 상승원돈교(上乘圓頓敎)로서 탁월한 자질을 소유한 자가 단번에 성명(性命)의 전체를 체득하는, 즉 깨달음과 닦음을 일시에 마치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길이다. 둘째는 중승원명교(中丞圓命敎)로서 점진적으로 진보하는 자가 성명의 전체를 증득하지 못하고 기질에 따라 선문이나 단법에 치중하는 경우이며, 셋째는 하승체연교(下乘諦緣敎)로서 보통 이하의 사람이 성명의 근본은 깨닫지 못하고 선행에 힘씀으로써 윤회과정에서 인간과 천상을 벗어나지 않는 정도를 뜻한다.
 
 그는 이중 두 번째 단계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적 선정수련과 단법의 수련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는 성명쌍수론(性命雙修論)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순서에 있어서는 먼저 단법수련을 한 후 선정을 닦는, 선명후성(先命後性)의 방법을 권한다.
 
 그가 제시하는 수련단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먼저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간직하는 ‘연기(煉己)의 준비단계’를 거친다. 다음으로 ‘수명(修命)의 단계’로 진입하는데, 이 과정은 정(精)과 기(氣)의 상호작용을 통해 금단(金丹)을 형성하는 채약(採藥) 과정과 형성된 금단을 인체에 주류시켜 몸을 변화시키는 주천화후(周天火候)의 단계를 거친다.
 
 이후 무념무상의 선정(禪定), 또는 무위자연의 삶을 통해 도를 체득해나가는 ‘수성(修性)의 단계’를 거쳐 ‘선인(仙人)의 경지’에 이른다.
 
 
 서산리(書山里)와 객망리(客望里)
 전라도 동면 송산에서 태어난 청하자가 광해난정을 만나 낙향하여 공부할 때 그가 공부하려고 쌓아둔 책이 산과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학문적 덕성을 기리어 마을이름을 ‘책을 산처럼 쌓아두고 공부하는 도인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서산리(書山里)’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효종10년(1659년), 그가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 164년이 지난 1823년 8월에 도내유림들의 발의로 서산사가 창건되어 청하자를 향사(享祀)하다가 고종5년인 1868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지금은 ‘서산사유허비’가 남아 있다.
 


 
 이 서산리에서 남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시루산 아래 객망리(客望里)가 있다. 객망리는 본래 불멸의 생명, 선인을 기다리는 마을이라는 선망리(仙望里)로 불리다가 손바래기, 객망리로 바뀌었다. 손에는 ‘신(神)’, ‘선(仙)’의 의미가 있으며 객망리는 불멸의 생명을 열어주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을이란 뜻이다. 그리고 시루산에는 ‘선인이 글을 읽는 형국’인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 객망리에서 지금으로부터 136년 전 조선 고종 8년 신미년 서기 1871년 음력 9월 19일에 새 우주를 열어 도탄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건지시기 위해 강증산 상제님께서 인간으로 강세하신다. 그런데 상제님의 어머니인 권씨 성모님께서는 청하자 권극중의 9대손으로 청하자가 공부하던 서산리에서 상제님의 성령을 잉태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자손이 끊어져 홀로 사시는 외할머니 때문에 10대 소년기와 20대 청년기 때 종종 외가에 다니셨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외가의 도(道)적 환경은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의 성장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렇듯 상제님의 성령이 잉태된 서산리는 수백 년 전래의 정통적인 동방의 단학수행 집안으로 상제님의 외선조인 청하자 권극중이 공부하던 마을이며, 상제님이 태어나신 객망리는 청하자가 추구했던 ‘불멸의 생명, 선인’을 기다리는 마을로 동방 선사상의 원형이 압축되어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청하자 권극중에 의하여 유·불·선 이외에 한국인의 심성 속에 전해져오던 제3의 사상이 한국사상사의 지평에 드러났다면, 상제님은 인류문명의 본 고향, 신교(神敎)의 종주국인 동방의 조선에 강세하시어 유·불·선의 진액을 거두어 후천문명의 기초를 정하셨다.
 
 이렇게 볼진대 상제님께서 인류 최초의 성씨인 강씨 문중과, 단학수행 집안의 성모님 가계를 외가로 취하여 오신 것 또한 태고로부터 이미 천지에서 도수로 질정된 일이 아니겠는가! _ 문운용 / 증산도 본부
 
 
 참고자료
 『조선시대의 내단사상』 김낙필저 대원출판
 『권극중의 삼교회통론 연구』 제갈문우저 원광대학교석사학위논문
 『증산도 도전』 증산도도전편찬위원회 대원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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