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한 천재 구봉 송익필

2010.02.22 | 조회 10967
진성조 (증산도 본부)
 
“율곡 이이를 아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토정 이지함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스승 같은 벗으로 대하며 존중했던, ‘구봉 송익필’을 아는 사람은 그리많지 않다.
 
이지함의 수제자 고청으로부터‘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극찬받았고, 단학계에서는‘조선 5백년 유교역사상 최고의 도인’이라 평하는 인물. 그러나 타고난 멍에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펴보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 송구봉.
 
상제님께서는 임진왜란을 끌러냈을 법술(法術)과 그 인물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道典4:7:1∼3)

 
선도나 불도와 비교되는 유도의 법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말씀이다. 그럴지라도 당대 유가의 수많은 걸출한 인물들을 다 제치고 상제님께서 유독 송구봉을 언급하시며, 그가 맡았으면 7년 임진왜란을 8개월 만에 끌러낼 수 있었다고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신비한 일화들을 남겼지만 정작 역사기록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송구봉 선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율곡이 가르침을 구했던 송구봉
송구봉 선생은 1534년(중종29년)에 당상관(정3품이상) 송사련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이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호로 쓴‘구봉(龜峰)’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고양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에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유학의 정치역사에서 세조~중종까지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파들이 거의 물러나고,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였으며, 당쟁의 분열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분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송구봉은 천부적으로 머리가 아주 우수하여 7세에 이미 붓을 잡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20대 중반까지는 시문을 공부하는 한편, 성리학에 대해 연구하며 학문에 열중한다.
 
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책을 보고 이치를 깨우쳐 나갔고, 20대부터 그 이름이 알려지면서, 당대 최고 문장가들과 시를 짓고 품평을 했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정치경륜과 학문에 관해 깊은 토론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다.
 
송구봉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충의지사로‘조헌과 칠백의총’의 주인공인 조헌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김장생, 김집 부자(父子) 또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선후기 예학을 집대성하여 예학의 대가가 된다. 김장생-김집은 이율곡과 송구봉 모두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이들 부자는, 조선후기 성리학을 완전히 뿌리내리며 송자(宋子)라고도 불렸던 우암 송시열의 스승이 된다.
 
그렇다면, 유교 대가들의 스승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송구봉의 학문은 어느 정도였을까? 율곡과 얽힌 한일화가 있다.
 
이율곡은 조선역사상‘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급제)’이란 별명답게 대천재 유학자, 정치가였다. 그러한 율곡이 젊은 시절(23세)에‘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시험에서 1등으로 합격하자 선비들이 율곡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율곡은 답변을 피한 채,“ 송구봉의 학문이 고명하고도 넓으니 그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비들이 송구봉에게 몰려갔는데 그들의 수많은 질문에 그는 물 흐르듯 막힘없고 의문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답변을 쏟아내었다.
 
선비들은 송구봉의 학문과 언변에 감탄하였고, 이후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동생 송한필도 문학으로 명성이 높았는데, 서인의 원조이며 대학자인 이율곡도‘성리학을 논할 만한 사람은 오직 송익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한다. 이율곡, 성혼은 성리학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그와 편지로 주고받으며 많은 의견을 구했다 하니, 송구봉의 학문은 당대 비교상대가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학문과 언변을 한번 들은 사람이면 거의 모두 그에게 반할 정도로 인간적 매력과 카리스마가 넘쳤다. 지모(智謨) 또한 깊어 남들이 전혀 생각할 수없는 지혜를 잘 내어 종종 주변사람을 탄복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학문이 높고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송구봉은 조정 관료로 출세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쓰며 살아가는데, 이는 그의 집안내력 때문이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한 불운한 운명
송구봉의 집안에는 먼 조상 중에 고려 원종 때 상장군을 지낸 이가 있지만, 가까이로 고조부, 증조부는 벼슬 없이 지냈고, 조부는 말단 관직을 겨우 지냈다. 그러다 부친 대에 와서 외형상 크게 가문이 일어난다.
 
부친 송사련(1496~1575)은 그의 어머니가 좌의정 안당 부친의 몸종의 딸로서 비천한 출신이다. 그는 이런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고자 당대 권력자 심정 밑에서 관상감 판관을 지내면서 큰 벼슬로 출세하려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와 신분은 다르지만 이복(異腹) 외삼촌 뻘 되는 안당의 집안사람들과 지인(知人)들이 모인 곳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송사련은 안당, 안처겸 등이‘조광조 선생을 모함했던 심정, 남곤 등 간신배들을 몰아내고 선생의 불명예를 되찾자’는 모의를 계획하는 것을 듣게 된다. 송사련은 이를 심정에게 고발하고 이로 인해‘신사무옥(1521년)’의 참변이 일어나, 사건에 관련된 안당과 그 집안사람들이 처형된다. 송사련은 그 대가로 당상관으로 출세하고 안당집안 재산을 차지하여 한평생 권세를 누리다가 1575년에 80세 나이로 죽는다.
 
그러나 부친의 이러한 영화로운 인생과는 달리, 무고 당했던 안당 집안의 신원(伸寃)이 1540년에 회복되면서 송구봉(7세)의 인생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저 송씨 집안은 윗대 할머니가 안당 가문의 몸종이었고, 친족관계로 봐도 안당은 송사련의 외삼촌뻘도 되는데, 그 집안을 그렇게 도륙내다니…”하는 세간 사람들의 악평과 구설수에 송구봉 집안사람들은 시달리게 되지만 권세가 남아있어 큰 탈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신분사회에서 천출(賤出)이라는 점은 송씨 형제들에게는 큰 장애가 되어 송구봉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벼슬보다는 학문에 몰두하게 된다.
 
송구봉은 50대 초반까지는 율곡, 성혼 등 절친한 친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어 간접적으로 자신의 경륜을 정치와 학문에 반영한다. 또한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어 대학자, 교육자로서 비교적 무난한 생애를 보낸다.
 
하지만 그의 나이 53세 되던 해(1586년, 선조9년)에 이미 죽은 부친의 관작(官爵)마저 삭탈당하는 불운을 당한다.
 
본래 국법에 의하면, ‘노비집안이라도 2대 이상 양역(노비 아닌 신분)을 했던 집안은 노비를 면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의하면 송구봉의 집안은 조부 송린과 부친 송사련이 2대에 걸쳐 관상감 벼슬을 지냈으므로 노비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안당의 후손들은 원래 천한 출신인 송씨 집안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린다.
그러던 중 서인계인 정철과 원수지간이던 동인계의 이발, 백유양 등이 정철과 송구봉을 해치고자,‘ 송씨는 우리집 몸종이다’라는 소송건을 제기한 안당후손과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4대를 걸쳐 내려온 송씨 집안의 양적(양인증명 문서)을 모두 없애버린다.
 
송씨 집안은 꼼짝없이 안당 집안의 노비로 전락되고, 죽은 송사련도 법적으로 노비가 되고 만다. 보복심에 불타는 안당 집안의 노비가 되면 온갖 핍박과 가해가 있을 것이라는 건 너무도 뻔했기에, 70여명의 송구봉 일가는 성과 이름까지 바꾸며 뿔뿔이 도망간다. 이사실을 안 안당 후손들은 송사련의 묘소까지 찾아가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난도질한다.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출세 길이 막히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송구봉은 이를 원망하지 않고 타고난 운명이라 여기며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의 이런 재앙을 막아줄 수 있었던 30년 지기(知己) 율곡도 죽고(1584년), 송구봉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던 정철마저 유배를 가게 되면서 송구봉의 말년은 암운이 더욱 짙어진다.
 
동인계인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가혹하게 처리했던 서인계의 정철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동인들은‘정여립사건 수사’의 배후 조종자로 송구봉을 지목하며 왕에게 처벌을 간(諫)한다.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리고, 쫓겨 다니던 송구봉은 자수하여 결국 유배(58~60세)를 간다. 하지만 이때 그는 이 사건에 관련된 평생 벗인 율곡, 정철, 성혼의 명예를 지켜준다. 모든 인간관계에 평생‘바름[直]’을 실천할 것을 주장했던 그의 뜻대로 살았던 것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노비로 만들려는 안당 후 손들의 보복을 피해 고령의 몸을 이끌고 떠돌다가, 1596년(63세) 충남 당진군 마양촌을 만년(晩年)의 은신처로 삼아 정착한다. 그리고 그는 소식을 듣고 찾아 온 후학들을 가르치고 학문에 열중하며 말년을 보낸다.
 
험난한 인생의 가시밭길에도, 송구봉은 임진왜란(1592~1598년)을 당해 고통 받는 나라를 구하고자 나름대로 애써보지만, 그의 친구 율곡이 이미 죽고 없었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년, 그는 66세의 일기로 비운과 고난에 찬 인생을 마감한다.
 
 
송구봉에 얽힌 일화
역사기록은 종종 승자는 미화되고 패자는 왜곡되곤 한다. 그래서 야사(野史)나 구전(口傳) 속에 오히려 진실이 숨어있기도 한다.
 
송구봉은 뛰어난 문인이자 유학자이기도 하지만 정신수양과 도력이 높아 그의 신출귀몰한 재주는 많은 일화들을 남기며 전해져 온다.
 
송구봉은 안광이 번개가 치듯 너무도 강렬하여 이율곡을 제외하고는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한번은 선조가 가장 신임했던 이율곡이 송구봉을 조정 인재로 자주 천거하자, 마침내 선조가 만나보게된다. 선조 앞에 불려온 송구
봉이 시종 눈을 감은 채 말을 하자 선조가“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라고 물으니“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하옵니다”라 대답한다. 이에 선조가“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라 하여 송구봉이 눈을 뜨는데, 선조는 그의 안광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기운에 놀라 그만 용상에서 떨어졌다고 한다(기절했다는 얘기도 있음). 이후 선조는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에 구원병을 끌고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졌는데, 송구봉이 그 야심을 꺾은 적이 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한번은 이여송 장군과 여러 관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와서“우리스승님이 장군을 한번 뵙고자 합니다”한다. 이에 소년을 따라간 이여송과 수십 명의 호위병들이 깊은 산속의 한 초가집에 이르니, 눈에 천을 감고 있는 노인과 그 옆에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이“방안에 들어오시오”라고 말하자 이여송은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방안에 들어간다.
 
노인은 이여송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면서“그동안 조선을 위해 싸우느라 수고했소. 그러나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딴 마음 먹지 말고, 그대들 나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한다. 이에 분노한 이여송이 칼을 휘둘러 노인을 죽이려 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칼을 막으며 이여 송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내던져 버린다. 이에 이여송과 수십 명의 병사들이 노인과 소년을 공격하자, 노인이 천을 벗고 매서운 눈초리로 그들을 쏘아보니, 번개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들이 쓰러지게 된다.
 
노인은“장군은 이 아이 하나도 못 꺾으면서 어찌 나를 대적하겠소? 장군은 이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니, 나쁜 생각 먹지 말고 돌아가기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장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소이다”라고 말한다. 이에 겁을 먹은 이여송은 도망치듯 말을 타고 군영으로 돌아갔고, 그해 서둘러 철군을 한다.
 
이밖에도 송구봉이 이순신에게 거북선 제조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이야기, 김덕령을 훌륭한 장수로 가르친 이야기, 남명 조식과 교유하며 임진왜란을 대비했다는 이야기, 퇴계 이황의 만사(輓詞)를 써준 이야기 등 숱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일화의 대부분이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국난에 대비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내용들이다.
 
이율곡에게 왜군이 침략할 것을 알려준 이도 송구봉이라는 일화도 있다. 이율곡의‘10만 양병설’또한 송구봉의 지혜에서 나온 발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율곡의 이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그는 죽게 되고, 송구봉은 친구의 안타까운 죽음을 하늘에 통곡했다.
 
현존하는 송구봉에 대한 학술적 평가는‘당쟁에 휘말려 불우했던 지식인’에 그친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진 그의 모습은 제갈공명을 뛰어넘는 신비한 이적(異蹟), 선술(仙術)의 소유자로서 국난을 걱정하고 대비했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시골 노인들은‘송구봉 이야기’를 꺼내면,“ 그때, 그 어른이 조그만 벼슬만 했었어도 그까짓 왜놈들 단번에 쓸어버렸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때를 만나 쓰임을 받아야
상제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默)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道典4:7:1∼4)

 
유불선의 법술의 차이에 대한 이 말씀을 통해, 한편으로 그들은 당시 유불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최풍헌, 진묵대사(1562∼1633), 송구봉(1534~1599) 이들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천지의 기운을 받고 동시대에 태어났으며 높은 도력(道力)을 지녔던 인물들이다. 하지만 또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비상한 재주를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최풍헌은 선조에게 찾아가‘병권을 3일만 허락하면 왜병을 3일 내에 전멸하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허락받지 못해 조화권을 쓰지 못하고 통탄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진묵대사는 뛰어난 도력을 지녔으나 몸을 두고 시해(屍解)로 어디론가 간 사이 김봉곡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송구봉은 역시 천하를 경륜할 만한 재주를 지녔지만, 부친의 악업과 출생의 한계로 그 재주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또한 무능하고 의심 많은 군주(선조)와 동서인의 당파싸움(정여립 역모사건)으로 인해 나라에 전란이 닥쳤을 때에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부모(조상)이며, 또 자신이 사는 시대 역시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쓰임을 받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사람이 큰일을 하려면, 그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하고 또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큰일을 하기에 얼마나 좋은 개벽시대를 만났나! 또 부모조상의 음덕으로, 참 진리의 군사부(君師父)이신 상제님 같은 분을 만나지 않았는가! 이런 걸 한번 생각해보고, 이 시대에 인류창생들을 구원하는 천하사(天下事)일에 매진하길 바란다.”는 종도사님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가을개벽기의 우리 일꾼들은 천지가 성공하는 이 시대에, 조상의 음덕으로 그 스승을 만났고, 그 일을 만났으니 참으로 복 많은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우리의 능력을 함껏 발휘하여 천지사업을 반드시 성사시키는 역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1589년-기축옥사)
동인계 정여립이‘누군들 군주가 될 수 없으랴!’하며, 군주제 타파의 혁명사상을 가졌고, 그가 군사조직(대동계)을 기르는 등의 행동으로 인해, ‘정여립이 역모한다’는 밀고가 생기는데, 이것이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다.
 
정여립은 수배 당하자 자살을 하지만 이 사건은 개인적 원한과 동인-서인간 정권쟁탈전 양상을 띠게 된다. 서인들(율곡, 성혼학파)의 가혹한 수사와 처벌과 함께 선조의 교묘한 왕권강화 술책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3년간 1천여 명이 억울한 유배 및 처형을 당한다. 이때 퇴계학파 제자들은 희생이 적었던 데 반해, 전라도 출신 동인계 선비들 특히 남명(조식) 학파 제자들의 피해가 가장 컸다.
 
이후 다시 정권을 회복한 동인들은‘정여립사건 수사책임자’였던 정철을 처벌하는데, 죽일 것을 주장한 강경파(남명학파-정인홍 등)와 처벌만을 주장한 온건파(퇴계학파-류성룡 등)로 나뉘어 다시 북인, 남인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된다.
 
사학자 신정일은 이 사건을‘조선조의 광주사태’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가‘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당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나라가 피폐해져서 결국 임진왜란을 당하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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