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 상생으로 이루는 원시반본의 도

2009.10.23 | 조회 8396
증산도 진리의 주제가 무엇인가?

“증산도 진리를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것은 개벽이다. 앞으로 오는 가을개벽이다.”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가을개벽의 정신이 상제님이 말씀하신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원시반본 이념을 중심으로 상제님 도의 실천 정신을 간단히 정리해 주겠다.


원시반본의 다양한 주제들
‘원시반본’이란 무엇인가?

반본返本이란 돌이킬 반 자, 돌아갈 반 자에 근본 본 자다. 즉 근본으로 돌아간다, 근본으로 다시 돌이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본의 방향성이 ‘원시原始’다.

그럼 원시란 무엇인가?

인간의 역사는 시간성에 매여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실체는 없지만, 현실 삶의 과정에서는 엄연히 과거가 존재한다. 현재 속에 과거의 추억이 있고 상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이 살아오면서 야기된 문제의 근본을 끄르기 위해서는 그 문제의 시원始原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원은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고, 역사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또는 자기 조상일 수도 있고, 민족의 주신主神일 수도 있다.

원시반본은 한 인간의 문제로 보면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건강을 회복하는 것, 본래의 밝은 심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가 예술가라면 자신의 예술적 심성을 신도 차원으로 틔우는 자기 계발 문제 등 여러 과제가 근본의 본本 자에 담겨 있는 것이다.

또 가을이 되면, 한 그루의 초목도 모든 생명 기운을 뿌리로 돌려 열매를 맺으면서, 다음 해 봄철에 씨 뿌리고 농사지을 것을 준비한다.

기도하고 수행하는 것도 원시반본이다. 그런데 ‘아, 원시 반본해야지.’ 하고 21일 동안 청수 떠놓고 기도할 때는, 그 기도의 내용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만이 그 원시반본의 문제를 안다. 그런 경우 스스로 생명의 근본을 떠나지 않으면서 문제를 끌러내야 한다.

이렇듯 우리의 모든 현실 문제를 끌러낼 수 있는 건강한 삶의 지표가 원시반본의 이념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원시반본을 일심이나 하단전 호흡, 바른 호흡, 집중 등으로 얘기하기도 한다. 수행을 하다가 잡념이 생겼다면 원시반본이 안 된 것이다.

요컨대 개인에게는 마음이 근본이 될 수도 있고, 또 주어진 현실 상황에서 보면 경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고, 환경 문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다. 또 직장에서는 인간 관계가 근본일 수도 있고, 녹 지급에 있어서는 월급 문제가 근본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근본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것이 다 원시반본의 주제들이다.



‘때’를 전제로 한 증산도의 원시반본
그러면 도판에서 말하는 근본은 무엇인가?

선천의 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궁극적 실재實在, 즉 하늘이 태어난 근원, 땅이 태어난 근원, 인간이 태어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인간과 신명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근본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든, 도道라고 말하든, 신神이라고 말하든, 다르마(dharma)라고 하든, 생명이 태어난 궁극적 실재, 근원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에서 서양 사람들이 즐겨 쓰는 ‘큰 근원(the great source)’이란 말도 있다. 어쨌든 그것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질 수밖에 없다.

증산 상제님은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고 하신다. 상제님이 말씀하시는 근본이란 무엇인가?

상제님은 선천의 도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간성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만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 같이 『도전』 2편 41장 1절을 읽어보자.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은 끊임없이 매순간 시간의 과정 속에 떠 있다. 시간의 물결에 휩쓸려 있단 말이다.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다.’

곧 지금 이 때는 이번 우주 일 년에서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로 들어가고 있는 때라는 말씀이다. 가을에는 우주만유가 근본으로 돌아간다.
상제님은 또 “이제 개벽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일을 맡게 되었느니라.”(道典 2:37:5)고도 하셨다.

‘개벽 시대를 당하여 원시로 반본된다!’

지금 상제님은 “개벽 시대를 당하여”, 즉 선천 봄여름철을 끝마치고 가을철로 들어가는 ‘때의 정신’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성장, 분열의 극에서 성숙, 통일로 들어서는 ‘때의 큰 전환기’의 변화 정신, 도의 변화 정신으로 원시반본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선천의 동서양 불교, 서교 즉 기독교와, 도교, 유교에서도 도를 말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때’를 전제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증산도에서 말하는 도의 정신이 선천 동서양의 도가나 종교판에서 구도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다.

한마디로 상제님 도의 근본 정신이 원시반본이다. 이 원시반본 사상, 원시반본의 도를 모르면 앞으로 개벽이 어떻게 오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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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아버지 시대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니라.”(道典 2:13:3)는 상제님 말씀이 있다.

지난 선천의 봄은 천존 시대다. 서양 문화로 말하면 신존神尊 시대.

동서 문화가 전부 신화神話 시대로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신으로부터 왔다. 생명의 근원, 창조의 기원이 신이다. 동양 문화의 천존과 서양 문화의 신존은 근본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여름철은 지존 문화 시대다. 지존 시대에는 땅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대부분 땅의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또 이 때는 성자聖子 시대다. 약 2천 년에서 3천 년 전에 유불선 서교의 성자들이 등장하여 동서 인류의 문화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그 다음 여름철 말에서 가을로 들어가면 아버지 시대다. 동서양 성자들이 외친 ‘미륵불’, ‘앞으로 오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문화가 열린다.

그 시간의 변화 마디가 가을개벽이다. 한마디로 우주 질서가 바뀐다. 이 때 우주의 주재자, 통치자이자 조화옹 참 하나님이신 상제님이 직접 강세하신다. 그리하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천지 질서를 바로잡으신다. 불교의 결론인 미륵불의 용화 세계, 성자 예수가 전한 지상 천국을 이루시기 위해 상제님이 오시는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길, 원시반본
그러면 상제님은 왜 오셔야만 하는가? 상제님은 왜 오시도록 되어 있는가?

우주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다. 상제님은 여름철에서 가을로 들어설 때 오신다.

그렇다면 상제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여시는 새로운 도통 문이 무엇인가? 그 깨침의 경계가 무엇인가?


* 예로부터 상통천문(上通天文)과 하찰지리(下察地理)는 있었으나 중통인의(中通人義)는 없었나니 내가 비로소 인의(人義)를 통하였노라. (道典 2:13:4∼5)


한마디로 중통인의中通人義다!

여기서 ‘가운데 중中 자’는 무슨 뜻인가? 천지의 중심이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의人義란 사람 인 자에 옳을 의, 뜻 의, 근본 의 자다.

중통인의!

인간의 근본 되는 모든 문제에 통通하여 완전한 새 문화를 열 수 있는 진리를 내려주신다는 말씀이다. 그 진리가 바로 ‘천지공사天地公事’다.

상제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천지공사’라는 전혀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다. 그리하여 전 인류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 그 길이 바로 원시반본이다.

이 원시반본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쉽게 보면 또 이렇게 쉬운 진리가 없다.

지금 천지의 어두운 들녘을 서성이고 있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문제는 무엇인가?

참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촌의 모든 인간이 “옳소!” 하며 박수 갈채를 보내고 환호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진짜 궁극의 진리, 보편의 진리, 만인이 웃으며 “새 진리다! 대도 진리다!”라고 맞이할 수 있는 참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느 때에 살고 있는지, ‘때의 정신’을 밝혀 주는 진리다. 그것이 바로 증산도다.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 모든 변화는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가?’를 전하는 것이다.

그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지금은 개벽기라는 것이다. 원시반본을 하는 가을개벽기이자, 인류 문화의 틀이 바뀌는 대개벽기라는 것이다.



원시반본은 가을의 변화 정신
원시반본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첫 번째 뜻은, 무엇보다도 가을의 변화 정신, 가을의 추수 정신이다.

생명이 원시반본하는 이치는 한 그루의 나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초목은 일 년 사계절, 춘하추동 사시 변화의 질서를 가장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봄이 되면 고목과 같이 죽은 듯한 나무 뿌리에서 생명의 진액, 수액이 쭈욱 뻗어 올라와 생기를 띤다. 참 신비스럽다.

대자연의 생명에 활력을 주는 봄의 신비한 역동성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대지 속 밑뿌리에서부터 생명력이 쭉 뻗쳐 올라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친다. 잔가지까지 뻗으면서 나무에 생기가 오른다. 모든 것이 생명의 색, 녹색으로 바뀐다.

조금 있으면 계절의 왕 5월이 오는데, 금년은 좀 더워서 그런지 벌써 꽃이 활짝 피었다. 저 남녘에서 서울까지, 꽃이 일제히 다 피어 버렸다.

이것이 여름철 분열의 극의 시간대까지 생장하여 이파리가 하늘을 덮는다.

그런데 생장의 시간이 다 끝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바로 여기서 ‘극즉반極則反’이라고 하는 원시반본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의 생명 자체인 수액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道란 무엇인가? 도의 본성이 무엇인가? 도의 정신이 한마디로 무엇인가?

단순하게 “네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런 글귀가 있다. “반자反者는 도지동道之動이다.” 곧 ‘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주 일 년의 시간의 물결에 맞추어 무상히 변화해 가는 현상 세계, 즉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볼 때,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것은 때의 정신을 모르면, 인간의 역사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를 모르면 말할 수가 없다. 너무도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돌아가는 것이 도의 운동이다.”라는 말도 반쪽 얘기밖에 안 된다.

“이 때는 개벽 시대를 당해서 원시로 반본한다.”

“이 때는 원시로 반본하는 때다.”

‘이 때’는 바로 상제님이 숱하게 말씀하신 바 ‘천지 가을의 큰 운수로 들어가는 시작점’을 뜻한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가을의 정신’, ‘가을의 추수 정신’, ‘대자연의 가을의 변화 정신’원시반본인 것이다.

우리는 한 그루의 나무가 가을에 변신하는 모습, 곧 화려한 꽃과 무성했던 이파리들을 다 떨궈 버리고 열매 맺는 성숙의 정신, 추수 원리를 우주 가을개벽의 근본 정신으로 철저히 깨쳐야 한다.



우주 이법을 이념화시킨 증산도 근본사상
증산도의 진리는 선천 문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다. 상제님은 우주가 어떻게 둥글어 가느냐 하는 천지 이법을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는 시간의 틀로 드러내 주신다.

원시반본原始返本, 보은報恩, 해원解寃, 상생相生 등 상제님 진리의 주제는 이 우주 원리를 이념화한 것이다. 곧 강증산 상제님이 독창적, 인위적으로 ‘아, 이렇게 하는 것이 인류 문화를 설명하고 동서 문화를 포용하여 통일하는 데 가장 좋겠다.’ 해서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이 상제님 진리로 볼 때 지금은 여름철 말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때다.

봄에는 씨 뿌리고, 여름철까지는 기르고, 가을이 되면 봄여름의 진액을 다 거두어 열매 맺는다. 이것이 대자연의 유일한 목적이다.

인간 농사 짓는 우주 일 년의 변화도 초목 농사 짓는 지구 일 년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 목적도 가을에 열매 맺는 것이다.

봄에 인간이 생겨나서 여름철까지 자손을 번식시키고 문명을 개척하며 산다. 그런데 여름철 말이 되면, 가을의 숙살 기운, 서릿발 기운을 받아 초목의 이파리들처럼 목숨이 떨어질 운명에 처한다.

이 가을의 정신에 대해 근본을 꿰뚫으면, 신앙이 성숙한다. 상제님 진리 보는 눈이 확 트인다.

앞으로 오는 우주적인 가을 대개벽, 인간 문명의 틀이 바뀌는 문명사적인 대변혁에서, 그것이 환경 문제가 됐든, 문명이 충돌하는 전쟁 문제가 됐든, 남북 상씨름 문제가 됐든, 원시반본의 도의 정신을 벗어나서는 그 무엇도 설명될 수 없고 인식되질 않는다. 문제의 핵심이 정리 안 된다.

해원解寃, 상생相生, 인존人尊, 정음정양正陰正陽 도수, 선매숭자仙媒崇子 등 증산도 진리의 주제 언어, 사상 언어, 문화 언어가 모두 여름철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때의 정신, 가을개벽이라는 천리의 시간 정신에 근본을 둔 것이다.

‘원시반본은 가을이 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도의 정신을 이념화한 보편의 사상 언어다.’

이것을 늘 머릿속에 담아둬야 한다.

 궁극의 도, 원시반본
그러면 증산도의 원시반본 정신은 선천 문화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까지 동서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도를 닦는다, 도를 체험한다.” 하며 평생을 바쳐 명상과 수행을 해 왔다.

하지만 단순히 내가 마음의 문을 부수고 우주의 일심 경계에 들어갔다고 해서, 신성神性의 세계에 영원히 상주하는 법신法身을 얻었다고 해서 도가 다 구해진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분명히 기초적인 통通은 성취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도는 통하지 못했다.

궁극의 도는 무엇인가?

불가로 말하면 미륵불의 도의 세계기독교로 말하면 아버지 하나님, 천주님의 도 세계원시반본의 도다.

이 ‘천주’란 언어를 처음 쓴 사람은 동양 사람이 아니다. 물론 산동성에서 강태공이 유불선 이전의 원형 문화, 동방 신교 문화의 팔신제八神祭를 중국 한족 문화에 부흥시킨 예가 있다. 팔신제라 함은 천주天主, 지주地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일주日主, 월주月主, 병주兵主, 사시주四時主 등 신도神道를 여덟 범주로 나누어 제를 지낸 것이다.

이 때에도 천주가 있었지만, ‘천주’를 신도의 위격으로 처음 쓴 이는 서양의 신부인 마테오리치 대성사님이다. 그분은 동양에 와서 중국말에 통하고 사서四書를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아! 상제님이라는 문화가 있구나. 상제관이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분은 서양의 창조주, 성부 하나님과 동양의 상제관에 다리를 놓는 언어로 ‘천주’란 말을 썼다. 천주, 하늘의 주인(the Lord of Heaven)이란 말이다.

이것은 서양의 기독교인들이 2천 년 동안 써 온 언어인 창조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격적인 신의 위격을 뜻하는 언어로 동양적 신관에 접근한 것이다. 그분이 남긴 『천주실의天主實義』란 책을 통해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신앙했다.

이 ‘천주’란 말은 동서 신관을 통합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호칭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핵심 논리가 없다.

빌리 그레함(Billy Graham) 목사의 『성령론(The Holy Spirit)』이라는 책을 보면, 한 부자간의 대화가 나온다. 그의 친구의 아들이 성부, 성자, 성신도 각기 하나님이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 삼위 일체론은 2천 년 동안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논쟁이 거듭되어 오다가 지금은 쑥 들어가 버렸다.



원시반본은 문제 해결의 대도
우리는 원시반본을 순환의 문제로 얘기한다. 순환이 지속됨으로써 생명이 확보되는 것이다.

지구 일 년도 가을이 되면 초목이 원시반본을 한다. 만약 원시반본을 하지 않거나 거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명을 지속할 수 없다. 춘하추동 한 주기에서 끝나 붕괴되고 만다.

우주 일 년도 봄여름에서 가을이 되면 원시반본해서 일단 수렴하여 열매를 맺고 겨울에 푹 쉬고 다시 봄을 맞이한다. 이것이 바로 상제님이 말씀하신 생장염장의 도다. 봄여름은 생장하고 가을겨울은 수렴해서 열매 맺어 폐장한다. 문 닫고 봄을 준비하는 것이 폐장이다.

상제님은 가을의 도로서 원시반본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지만 이 원시반본의 가르침에서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안목을 얻는다. 즉, 원시반본은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가령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가을개벽을 모르고, 또 그에 대한 근본적인 깨달음이 없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바른 길인가?

그럴 때 우리 증산도 신앙인들은 어떻게 말해줘야 하는가?

“그 길은 원시로 반본하는 것이다.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한번은 우리나라 역사학자 송호수 교수가 이런 얘길 한다.

“아, 증산도는 한 마디로 원시반본이야, 원시반본.”

서울에서 세미나 할 때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나라 고대사 찾기를 주제로 말한 것이다. 원시반본의 도에 충실하면 우리 민족의 뿌리 문화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원시반본의 도에 통했을 때, 원시반본이라는 의식의 중심에 섰을 때, 우리 문화의 근본을 회복한다. 국조國祖의 문제, 우리 한민족사의 첫 출발점,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고대 국가의 성립 시기 등을 정확히 밝힐 수 있다.

원시반본은 생명의 존재 법칙
왜 원시반본이 중요한가?

지금은 이번 우주 일 년의 여름철이 지나고 가을로 들어서고 있다. 가을에는 우주만유가 원시반본을 한다, 근본으로 돌아간다.

종도사님께서 “원시반본의 본은 뿌리다, 뿌리!”라고 하셨다. 또 “뿌리를 찾아야 한다. 증산도는 뿌리 문화다.”라고 하셨다.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때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하는 자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는다.”는 상제님 말씀처럼, 이번에는 자기 조상을 배반하면 다 죽는다.

원시반본의 도는 대자연의 도요, 역사의 도요, 앞으로 열리는 새로운 문명의 도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만유의 생명의 도이자 존재 법칙이다.

이 원시반본의 도는 꼭 가을의 정신을 전제로 한 것일 수만은 없다. 왜 그런가? 우주 만유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근본을 떠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은 도의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 본능을 갖고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아야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도를 회복한다, 도로 돌아간다 할 때의 도의 본성, 즉 우주가 생겨난 생명의 근원, 빛의 세계, 중도실상中道實相 등을 항상 우리 마음과 생명의 의식 경계에서 확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문제다.


원시반본의 실천 이념: 보은, 해원, 상생


한 인간, 생물, 더 나아 지구, 하늘과 땅, 온 우주가 순간순간 변화해 나간다.

그런데 지금의 변화, 때의 정신은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가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인간은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 열매 맺는, 성숙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원시반본의 도다.

그러면 그것을 성취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상제님께서는 해원解寃, 상생相生, 보은報恩을 원시반본을 성취하는 구체적인 실천 이념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다.

보통 우리는 해원, 상생을 항상 음양적으로 붙여서 얘기한다. 그리고 보은을 세 번째로 말한다. 도운의 초기 시대에도 해원, 상생, 보은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제3변 도운에 들어와 상제님 도를 전하면서 진리의 틀을 다지다보니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은’이 맨 앞에 가야 한다.

왜 그런가?

우리 삶의 질서, 인간 문화의 질서 속에서 원시반본의 정신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보은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갚는 것. “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必報하라, 반 그릇 밥의 은혜도 반드시 갚으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속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신명, 나와 선령先靈, 부모와의 관계에서 볼 때 원시반본의 도가 곧 보은이라는 말이다. 갚을 보報 자에 은혜 은恩 자. 은사, 은혜, 은총이라고 할 때의 은 자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네가 나에게 얼마를 도와줬으니 나도 그만큼 도와준다는, 주고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신세진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가 아니란 말이다. 상제님이 그런 수준에서 우리에게 보은의 도를 내려주신 것만이 아니다.

 천지 부모에 대한 보은


그러면 상제님은 보은을 어떤 의미로 말씀하고 계시는가?
상제님이 전해 주시는, 원시반본의 도에서 말하는 보은은 무엇인가?

『도전』 6편 82장 5절에 나와 있는 여섯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 보자.

* 도통 천지 보은道通天地報恩 (道典 6:82:5)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상제님이 뜻하시는 이 말씀의 경계를 똑 부러지게 깨쳐서 전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도통 천지 보은’의 참뜻이 무엇인가?
우선 ‘도통’이라는 언어를 떼 내면, ‘천지 보은’이라는 네 글자가 남는다.
‘천지 보은’이 무엇인가? 천지에 은혜를 갚는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천지에 은혜를 갚아야 하는가?

천지는 만물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태모님도 “천지 알기를 너희 부모 알듯이 하라.”고 하시지 않는가.

사실 기도를 해 보면, 천지는 살아 있는 신神이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서양에서처럼 하늘만 살아 있는 우리 아버지라고 인격신으로 섬긴 것이 아니다. 하늘은 아버지이고,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땅은 아버지의 짝인 어머니라고 했다. “하늘은 신神이고 땅은 귀鬼다!”, 그래서 살아 있는 성령, 살아 있는 순수 인격, 대자연의 생명체로서 ‘귀신’이란 말을 쓴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 신관이 들어와서 ‘귀신’이라면 무조건 저급령低級靈으로 내리치는 잘못된 관념이 생겼다.

‘귀신’이란 말은 본래 스케일이 무척 큰 말이다. 신성神性의 음양적 변화의 실상을 체험하고 나서 붙인 정명正名이다. 서양적 표현으로는 ‘성령(the Holy Ghost)’이라는 말뜻과 느낌이 이와 비슷하다.

천지 부모에 대한 은혜를 갚는다!

이 말씀은 결국 인간 생명은 부모와 선령을 넘어서면 하늘과 땅이 그 근원이란 말이다. 하늘땅은 만물의 궁극적 실재, 생명의 큰 집이다. 따라서 천지는 나와 만물의 공통된 생명의 근원으로서 제1의 부모님인 것이다.

그러니 내 생명의 근원에 대한 일차적 보은은 천지 보은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왜 태어났는가?
천지의 열매로서 가을철 천지의 뜻, 그 거룩한 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다.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오직 하나인 온 우주의 염원을 성취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대우주 천지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커다란 꿈과 목적을 내려주셨다. 그러니 항상 감사하며 보은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도통이 천지 보은의 길
“이 때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다.”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역사 속에 사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은 무엇보다 보은이다.

원시반본의 또 다른 말씀이 보은이다. 우리 인간 삶의 제1의 도덕 이념이 보은이다.

그러면 ‘천지 보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인가? 그냥 떡 쪄서 올려놓고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하고 먹으면 보은이 되는가?

성숙된 인간 문화, 진화된 인문의 경계에서 볼 때, 가을개벽이라는 천지와 인간 성숙의 과제로 볼 때, 무엇이 보은인가?

천지 부모님께 보은하는 길크게 보면 하나다.

그것이 무엇인가? 도통道通이다. 도를 통하는 것! 즉 진리를 통해야 한다. “도통 천지 보은”

이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도통은 천지 보은이다.”

바로 이 때문에 상제님이 인간 세상에 내려오셨다. 그리고 지난날 동서의 모든 철인과 부처, 보살들이 이루지 못한 진리의 궁극의 경계, 중통인의의 도통을 이루셨다. 천지의 질서까지도 바로잡을 수 있는 궁극의 도통, 궁극의 진리를 성취하셨다.

천지에 보은하기 위해서는 대우주를 호령하시는 통치자 하나님, 주재자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인간으로 오셔서 새로운 도통문을 열어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제님이 새로운 도통 문화를 여신 것도 천지 부모에게 보은하는 차원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천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 길은 깨지는 것, 성숙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성숙의 길은 무엇인가?

진리를 바르게 체험하고 실천해서 진정 천지와 하나 되고, 나아가 천지의 뜻과 목적을 성취하여 진정한 천지의 주인 자리에 서는 것이다. 더 이상이 없다.

우리가 이렇게 상제님 신앙에 몸담고 진리 공부에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천지에 보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깨짐으로써, 상제님 진리에 대한 기본을 통함으로써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사회 생활도 잘하고, 신앙도 바르게 한다. 저질스런 종말론에 빠지지 않고 올바른 개벽관을 갖는다. 그리고 상제님 진리로써 현실을 바르게 보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진정으로 천하사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 일꾼들의 정신이 분열되어 두리번거리며 시간 깨먹는 건 가장 큰 죄다.

“도통이 천지 보은이다.” 참으로 멋진 말씀이다.


은혜를 저버리면 만 번 죽는다
다음으로 상제님이 보은에 어긋나는 삶의 기준으로 아주 준엄하게 경고하신 한 말씀이 있다.

배은망덕만사신背恩忘德萬死身이다.”

배은망덕은 만사신이라, ‘은혜를 저버리고 덕행을 망각하는 것은 만 번 죽는 몸, 만 번 죽어야 하는 몸뚱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천지에서 너를 낳아 기르는데, 천지 부모님의 뜻을 한 번도 헤아려 보지 않아서야 되겠느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천지 부모의 뜻을 수없이 헤아리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아, 인간이란 뭘까? 인간은 왜 태어나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는 거야? 이렇게 살아야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다. 그게 천지 부모에 대한 생각을 세속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은 허망하다. 뭔가 이뤄 놓았다 하고 보면 그게 아무 것도 아니다. 돈에 굶주려서 돈을 벌어 봤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물론 풍족한 것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거치적거리고 그것 지키느라 신경만 쓰인다.

그리고 공부를 많이 해 봤다, 박사도 몇 개씩 땄다, 그랬는데도 근본은 하나도 안 풀린다? 그러면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천지는 은혜의 모체


인간이 태어나 진리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이 뭔가? 하늘과 땅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진리의 마지막 문턱이 무엇인가? 하늘과 땅에 대한 체험이다.
진리의 첫 발자국을 떼는 것과 마지막 관문을 넘는 게 하늘땅으로 시작해서 하늘땅으로 끝난다.

상제님이 일곱 살 때 지으신 시가 있다.

* 遠步恐地坼이요 大呼恐天驚이라
멀리 뛰려 하니 땅이 꺼질까 두렵고
크게 소리치려 하니 하늘이 놀랄까 두렵구나. (道典 1:15:9)


왜 이 시가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이 깊은 뜻을 던져주는가?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상제님의 안목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상제님이 천지공사에서 천지 신명과 인간을 통치하시는데, 그 근본 정신, 도덕률의 제1조가 보은이다.

일본이 왜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망했는가? 이번에 개벽할 때 왜 중국이 크게 정리되는가?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을 보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제님이 신농씨神農氏와 강태공姜太公의 덕을 말씀하시면서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리라.”(道典 4:94:5) 고 하셨다.

신농씨는 화덕火德으로 제왕이 된 분이다.

중국의 옛날 장안長安, 지금의 서안西安에서 버스를 타고 두어 시간 가면 보계寶鷄시라는 곳이 있다. 보배 보 자에 닭 계 자. 이름이 참 이상하다 해서 거기를 가 봤다. 거기에 강수姜水라는 강이 있고, 신농씨가 태어났다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을 가보면 지금도 태곳적 냄새가 난다. 그 마을 윗산에 신농씨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 들어가 보면 신농씨가 태어나 농사법을 가르치고, 소 몰고 하는 것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그 분은 태양신이다. 태양 속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

이 신농씨(강씨)가 인간 역사의 성의 원시, 성의 뿌리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이 때는 원시로 반본되는 고로 강가가 개벽 일을 맡게 됐다.”고 하셨다.

신농씨는 의학의 아버지로서, 또 농사법을 가르쳐 준 시조로서 한량없는 덕을 인류에게 베풀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신명들이 신농과 태공 두 분의 은혜에 보답하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도 보은과 관련되는 역사의 한 예다.

그러므로 인류의 전 역사 과정이란 끊임없이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과정이다. 그 속에서 인간과 신명,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아야 한다.

자연은 보은의 제1의 대상 아닌가. 천지 부모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은혜의 근원이다. 은혜의 모체인 하늘땅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하는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나 모든 생명계의 조화는 보은을 바탕으로 함으로써만 제자리를 잡게 된다.


원시반본의 실천 방법, 해원 상생


그러면 원시반본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길이 무엇인가?

해원과 상생이다. 원시반본은 해원과 상생의 도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 달성될 수 있다.

해원의 해解는 푼다, 끌러낸다, 해소한다, 해결한다는 뜻이고 원이라는 것은 원통할 원寃 자다.

상제님은 “선천에는 상극의 질서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다스렸기 때문에 인간과 신명들이 원한을 맺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하신다.

원은 남에게 일방적으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하는 걸 말한다. 또 자기 의지로써 저항해 보았지만 역부족과 주어진 여건 때문에 억울하게 당한 걸 말한다.

이렇듯 지난날 선천 상극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 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죽음의 요소들, 비극의 근원이 되는 원과 한을 끌러 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원시반본이 이루어질 수 있다. “석가모니가 분명히 도를 통해서 알고는 했으나 창생들의 원통함을 끌러 주질 못했다. 원억의 고를 끌러 주지 못했다.”는 상제님 말씀이 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가장 원통하게 죽은, 그래서 인간 역사의 질서가 깨진 한 사람을 말씀하신다. 바로 4천3백 년 전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다.

* 원한의 역사의 처음인 당요(唐堯)의 아들 단주(丹朱)가 품은 깊은 원(寃)을 끄르면 그로부터 수천 년 동안 쌓여 내려온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릴지라...

단주의 깊은 원寃을 그 누가 만분의 하나라도 풀어 주리오. (道典 2:31:4∼7)

『도전』을 수없이 보다가, 어느 날 세수하고 맑은 정신으로 『도전』을 펴고 이런 말씀 한 구절만 보고 출근해 보자.

단주의 깊은 원을 풀면 수천 년 동안의 모든 원한의 마디와 고가 풀린다.”

여기서 단주의 깊은 원에 대한 한없는 감동을 받는다. 역사 인식이 새로워진다. 단주의 깊은 원, 그 기운이 들어온단 말이다.

상제님은 단주를 천상 제왕의 궁전인 자미원紫微垣에 보내셨다. 그리고 앞으로 단주로 하여금 세운世運을 관장하게 하신다.

상생의 도로써 세상을 고친다
* 그러므로 이제 천지도수를 뜯어고치고 신도神道를 바로잡아 만고의 원을 풀며 상생의 도道로써 세상을 고치리라. (道典4:14)


상제님은 병든 세상을 뜯어고치고, 나아가서는 천지의 상극 질서까지 바로잡아 상생의 도로써 새 세상을 여신다고 선언하신다.

이 성구 말씀을 보면, 상제님의 해원, 상생의 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선천 세상에서 갈구했던 진리의 모든 이상이 한갓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잠꼬대란 말이다.

오늘날 중동의 비극을 보라.

‘지상에 천국이 온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다 잠꼬대 아닌가. 이삼일이 멀다 하고 폭탄 들고 가서 “너 죽고 나 죽자. 내가 죽을 테니 너도 좀 죽어 줘야겠다.”고,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죠셉 캠벨(Joseph Campbell) 같은 사람은 『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에서 이런 얘길 한다.

“『구약』을 보면 이쪽 페이지에선 야훼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자비를 선포하다가, 몇 페이지 넘어가면 ‘나의 명을 좇지 않는 자는 가서 쳐죽여라.’ 이렇게 나온다.”

그는 이런 신화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이제 새 역사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신화, 새로운 진리, 우주적인 진리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증산도, 상제님의 개벽 문화다!

 현실적으로 해원 상생의 문화를 열어야
해원, 상생의 문제는 천도식도 해 보고, 가족과 친인척, 자손을 못 둔 선대 또는 억울하게 죽은 신명들을 잘 모셔드리다 보면, 내면으로 체험을 한다. 자기만이 아는 신도적 체험을 하고 확신을 갖게 된다.

‘원통함을 끌러라, 남에게 미움 사는 일을 하지 말아라. 신명이 먼저 알고 척이 되어서 보복을 한다.’

이런 말씀들이 전부 해원 사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상제님의 해원은 이런 단순한 일상 차원이 아니다.

천지 안에 있는 원 맺혀 죽은 인간과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새 세상을 열 수 없다. 새 세상이 올 수도 없다. 지축이 서서 자연적으로 가을개벽의 시간이 온다 할지라도, 그런 세상이 백 번 천 번 온다 할지라도, 현실 세계는 더 참혹한 원한의 죽음 세계로 빠져들 것이다.

그러므로 ‘새 역사를 만든다, 새로운 문명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적으로 해원 상생의 문화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해원 상생의 역사 질서를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에 정치인들이 인간 관계나 새로운 정치 질서, 정치 문화를 열기 위해 너도나도 ‘상생’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지만 상생은 그것 자체만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 그것은 반드시 개벽이 전제되고 해원이 함께 실현될 때 이뤄지는 것이다. 해원의 실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상생이 현실 삶의 모습으로, 회복된 인간 관계로 실현된단 말이다.



해원하는 만큼 상생의 질서가 뿌리내린다
우리 증산도에는 인간 생명과 마음,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든 문제를 전통적이면서도 전혀 새롭게,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진리 분야가 있다.

그것이 해원, 상생이다. 원과 한의 심리학.

서양에서 인간 심리를 여러 각도로 연구하고 있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볼 때 인간의 가장 큰 관심거리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 염원이다.

그 원과 한의 음양의 대비적 요소를 잘 들여다보고, 짓밟힌 상처, 원통함과 가슴속에 깊이 자라온 한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한恨은 보편적인 정서다. 모든 생명에는 자생自生하는 어떤 본질적인 문제, 인생의 근본 과제 때문에 맺힌 나름의 한이 있다. 이 한의 구조는 굉장히 복잡하다.

예컨대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영혼의 상처가 있다면, 그게 한이다. 이것은 원통함과는 다르다. 원통함은 피해 의식이 붙지만, 한은 성숙해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입게 되는 상처를 말한다. 그런 상처가 축적되어 맺힌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삶의 과정에서 쌓인 원초적인 한이 있는 것이다.

종도사님이 언젠가 “인간은 본래 고독하다.”고 하셨다. 그게 한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고독! 그것은 홀로 있기에 생기는 것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 속에 앉아 있어도 나 혼자뿐이라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이 내 생명의 근본에서 해소되지 않는 알 수 없는 한인 것이다.

가령 직접적 체험을 해서 세상과 진정으로 하나될 수 있는 성숙된 생명 의식, 문화 의식, 역사 의식이 자꾸 깨져야 하는데, 진리가 강력하게 열려야 하는데, 이게 잘 안 된다. 그러면 여기서 소위 ‘소외의식疏外意識’이라는 게 생긴다. ‘나는 분리돼 있다. 세상과, 진리와 하나 되지 못하는 어떤 틈이 있다. 그 틈새에 바람이 분다. 그래서 고독하다.’ 이런 걸 느낀다.

이번에 홍콩의 가수 겸 배우인 장국영이 호텔에서 뛰어내려 죽었다. 그의 본성에 깔린 게 바로 이런 문제다. 그가 수백 억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뭐가 부족해서 그런가?

증산도에서는 이렇듯 인간의 역사와 문명, 자연에서 벌어지는 모든 비극의 근원을 원한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이 사회가 됐든 신앙 공동체인 도장이 됐든, 지구촌의 문화 공간이 됐든, 모든 삶의 역사를 원과 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만큼 상생의 질서가 현실에 뿌리내리게 되는 것이다.

지난 상제님 도의 백 년 역사를 보면, 오선위기로 전개된 세운의 1, 2차 세계대전과 마지막 마무리짓는 제3차 남북 상씨름은 상극의 질서를 해소시켜 가면서 상생의 문화 질서를 열어나가는 과정이다.

 죽든 살든 일관된 신앙을 하라
상생이란 우리 인간이 상호간에 생生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상제님은 ‘살린다’, ‘남 잘되게 한다’는 뜻으로 생을 말씀하신다.


* 우리 일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다. (道典 2:15:8)

사실 상제님 일꾼을 만나면 인간으로서 모든 걸 이루는 것이다.

‘네가 나를 만나면 너는 인간으로서 모든 걸 이룬다. 내가 너의 꿈을 이뤄주는 상제님의 진정한 일꾼이다!’

바로 그런 일꾼 자리에 서는 것, 이것은 진리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어려운 게 아니다. 단순한 것이다. ‘그런 느낌을 강력하게 갖고 그런 감동이 식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깨달음이다.

또 상제님 신앙은 어떤 역경이 찾아왔다고 해서, 가령 부모 형제가 불운한 사고로 참혹하게 죽었다고 해서 그 뿌리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알고 보면 자동차 사고가 났다든지, 깡패를 만났다든지 하는 것은 신앙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제대로 하면 태을주 읽으면서 그걸 미리 다 본다. 그렇게 해서 미리 준비를 하게 된다. 신명이 “이 길로 가지 말고 돌아가라.”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 오고 실패를 맛본다 해도 좌절하지 않고,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 신앙은 꾸준히 해야 한다. 죽든 살든, 일관된 신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사람도 신명도 근본 신앙관은 털끝 하나 변함없이 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일 조금 하다가 뜻대로 안 된다고 정신이 왔다갔다하고 들락날락거리면 안 된다. 끝을 봐야 한다. 거기서 ‘천지일심天地一心’이라는 일심의 경계도 체득한다.

어둠에 빠져 본 사람이라야 광명의 세계를 제대로 안다. 크게 굶주려 본 사람만이 녹의 소중함을 안다.

상생, 상생!

상제님 말씀대로, 포교할 때 우리는 손에 살릴 생 자를 쥐고 다닌다. 개벽의 시간대로 성큼성큼 다가갈수록, 역사가 더 긴박하게 조여들어 갈수록 우리의 사명, 증산도의 존재 이유를 참으로 절실하게 느낀다.

내가 진리를 전해 주지 않으면 저 사람들은 영영 희망이 없다. 아무리 피곤해도 사람들에게 “이 책 한번 읽어 보라.”고, “이 책 속에 세상 둥글어 가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고, “우리 상제님이 개벽공사 여신 것이 담긴 증산도 경전 『도전』을 직접 읽어 보라.”고 권해야 한다.

『이것이 개벽이다』, 『도전』, 도훈 씨디(CD), 도훈 테이프 등 여러 가지를 잘 활용해야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만화책을 줄 수도 있다. 진리를 체계적으로 전해서 깨지게 하는 것이 목적 아닌가.



천지에 보은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라
진정 상생의 도로써 가을개벽기에 한 인간을 건져낸다는 것이 얼마나 지고한 사명인가.

<진주만> 영화를 보면, 숨이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병사들의 비극적인 모습이 나온다. 병사들이 물 속에서 “나는 살고 싶다. 죽기 싫다.”고 절규하면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걸 보라. 이처럼 생명의 본성은 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주어진 여건에서 정말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신의 건강, 환경, 지식, 신앙 이런 것을 돌아보면서, 남은 시간 동안 성실하고, 강력하고, 또 체계적으로, 문화 현실에 알맞은 논리와 언어를 구사해서 전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를 전하면 반드시 정신을 묶어서 일꾼으로 태어나게 하라. 열매 맺는 포교로 천지에 큰 공을 쌓으라. 아까 상제님 말씀 그대로 도통 천지 보은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상제님 도를 꼭 한번 이루겠다는 좋은 마음을 갖고 임해 주기 바란다.

-도기133년 4월 증산도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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