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보고서 분석 같은 전통적 방법이 아니라 수학·통계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퀀트 투자법’으로 현대 금융 역사상 가장 성공한 투자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수학자 제임스 사이먼스(86)가 10일 별세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헤지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창업자 사이먼스가 이날 뉴욕 맨해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사이먼스는 수학자로서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투자 업계에 뛰어든 인물이다. 1938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난 사이먼스는 MIT를 졸업하고 UC버클리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25세에 하버드대 교수에 임명된 촉망받는 수학자였다. 그의 ‘천-사이먼스 이론’은 모든 기본 입자가 ‘0차원’의 점이 아닌 진동하는 끈이라는 ‘끈 이론’의 토대가 돼 지난 세기 가장 널리 인용된 수학 논문 중 하나가 됐다. 수학과 양자물리학 등에서 획기적 연구를 발표하며 학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돌연 1978년 뉴욕에 투자회사를 차리고 투자자로 변신했다. 스물한 살 비교적 이른 나이에 첫 결혼을 한 그는 돈이 필요했다. NYT는 “자신의 천재성을 투자에 활용해 최대한 많은 돈을 벌어보겠다는 포부”였다고 했다.
사이먼스가 1978년 설립한 투자회사 이름은 ‘모네 매트릭스(Monemetrics)’였다. 돈(money)과 계량경제학(econometrics)을 조합해 만들었다. 그는 최고의 인재를 고용해 시장 데이터를 분석, 투자에 성공할 수 있는 완벽한 수학적 공식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학자, 컴퓨터 공학자, 데이터 전문가, 알고리즘 개발자, 기상학자 등을 최고 대우로 데려와, 투자에 활용할 수학 공식을 만들었다. 투자를 통해 주식이나 채권 거래가 미적분학이나 편미분방정식처럼 예측 가능하다고 봤다. 그는 당시 친구에게 “자는 동안에도 돈을 벌 수 있는 모델을 원한다”고 했다. NYT는 “페루의 감자 가격, 아프리카의 정치 불안, 아시아 작은 나라의 은행 통계 등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활용했다”고 보도했다. 요즘으로 치면 빅데이터 분석을 한 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알고리즘과 인공지능(AI)을 사용한 개척가”라고 밝혔다. 그가 개척한 퀀트 투자는 오늘날 모든 투자의 기본이 됐고 현재 월스트리트 주식 매매 거래의 거의 3분의 1이 퀀트 방식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퀀트 투자법은 시장에서 성과를 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의 핵심인 메달리온 펀드는 1988년부터 2018년까지 30년 동안 1000억달러(약 137조2500억원)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 기간 연평균 수익률 66%는 전례 없는 기록으로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유명 투자자들을 능가했다. 그가 2010년 르네상스 최고경영자(CEO)에서 은퇴할 당시 재산은 110억달러(약 16조원). NYT는 “현재 가치 기준으로 160억달러(약 22조원)에 달하는 규모”라고 전했다. 포브스는 현재 그의 순자산이 314억달러(약 43조)로 세계 51번째 부자라고 추산했다.
사이먼스의 투자법이 늘 성공한 것은 아니다. 통화 완화 정책이 대세를 이룬 지난 10여 년은 퀀트 펀드의 암흑기였다. 퀀트 펀드는 주로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종목을 선정하는데, 환율 변화 등 거시 경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코로나19가 덮친 2020년은 퀀트 펀드에는 악몽 그 자체였다. 그의 일부 펀드는 연간 30% 가까운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은퇴 이후 그는 자선 활동에 시간과 돈을 더 많이 들이며 세계 최대 자선사업가 중 한 명이 됐다. 그는 평생 60억달러(약 8조2000억원) 이상을 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먼스 부부가 세운 ‘사이먼스 재단’은 최대 규모의 기초 과학 연구 민간 자금을 보유한 재단으로 꼽힌다. 그는 전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는 부자들의 서약 ‘기빙 플레지’의 최초 서명자 중 한 사람이었고, 매년 수학·과학 교육 부흥을 위해 막대한 돈을 내놓고 있다.
<참고문헌>
1. 이해인, "워런 버핏도 울고 간 수익률...‘천재 수학자’ 제임스 사이먼스 별세", 조선일보, 2024.5.13일자. A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