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향한 충절만큼이나 한글 사랑했던 사육신 성삼문의 충절과 한글사랑

대선 | 2024.10.09 03:11 | 조회 2067

                   임금 향한 충절만큼이나 한글 사랑했던 사육신 성삼문의 충절과 한글사랑 


  우리의 한글이 창제되어 반포된 지 올해로 578돌을 맞이한다. 이에 본고 는 우리의 한글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자랑스러운 충청인으로 성삼문을 선 정하고, 그의 충절과 문학세계를 우리 지역에 산재한 문화유적을 중심으로 살피고 그의 한글 사랑 실천에 대해 산 책하고자 한다.

   ◆ 성삼문의 충절과 문학세계 성삼문(成三問)은 1418년(태종 18) 에 도총관 성승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서 맏아들로 홍성군 적동면 적동리에 서 태어났다. 자는 근보, 호는 매죽헌, 시호는 충문, 본관은 창녕이다. 그의 이름을 삼문이라 한 것은 어머니 박씨 부인이 그를 낳을 때 하늘에서 “낳았 느냐”고 묻는 소리가 세 번 들려서 그 렇게 지었다고 한다. 성삼문은 박팽년의 아버지이며 저 명한 유학자였던 박중림에게서 사사 하던 어린 시절부터 인품과 학문 그리 고 서예에 이르기까지 실력을 두루 갖 춘 융합형 인재로 성장하였다. 총명했 던 그는 일찍이 18세에 생원시에 합격 한 후 시년 문과 시와 문과 중시에 급제 하여 집현전 직제학에 임명되었다. 이 후 사간, 부제학, 예조참의, 경연시독 관, 세 종 실록 편수관 등을 역임하며 세 종의 총애를 받았다. 11 리는 이곳 문절사는 1903년 고종의 어 명을 받아 성삼문의 후손 성주영이 건 립했다. 이는 그의 당숙 성희가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이유로 2년간 유 배 생활했고, 세조가 그에게 서울에 서 백 리 떨어진 곳에 나가 살라고 명 하여, 이곳 달전리로 피신해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룬 데서부터 비롯된다. 본래는 ‘달전사’였으나 1967년 사당 을 보수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글로 절개를 지킨다’라는 의미의 ‘문절사’ 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 주면서부터 문 절사가 되었다. 

   ◆ 성삼문의 한글 사랑 실천 논산 성삼문 묘역에 있는 무이문 삼문과 성인문 사당. 그리고 그 앞에 새로 제작된 신도비 모습. 세종 금남의 문절사 전경(왼쪽), 성삼문이 태어났다는 홍성 노은리 고택(오른쪽). 그러나 세종이 죽자 1455년에 세조 가 나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 탈하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졌다. 성삼 문은 이에 여러 충신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세조가 직접 모진 국문을 하자, 세조를 ‘나으리’라 호칭하며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연루된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도 말하지 않은 만세의 충신이요 충절의 표상이었다. 이렇게 꼿꼿한 지조와 의리와 충절 을 지녔던 그는 세조의 회유를 물리 치다가 결국 38세의 젊은 나이로 능지 처사를 당하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 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문인 으로서 <절명시>를 노래한 시인이었 다. 죽 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황천 가 는 길에 주막도 없다고 하니, 죽는 오 늘 밤은 어디서 잘 것인가’라며 덤덤하 고 의연하게 여유와 낭만을 이야기하 였다. 

   ◆ 홍성의 성삼문 문화유적 성삼문의 외손 엄찬이 살던 노은리 고택은 성삼문이 태어난 집이면서 고 려말의 명장이요, 충신인 최영 장군이 태어난 집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최 영의 집은 홍주 동쪽 23리 삼봉산 아 래 적동리에 있고 뒷날 성삼문이 살았 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노은리를 둘 러싼 삼봉산에 최영사당 기봉사가 있 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곳 동네 이름이 본래 적동 리였는데 노은리로 바뀐 것은 이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유허비의 앞면 비문에 ‘ 우암 송시열이 이 마을 이름을 노은 이라 하였다’라는 글귀에서 연유한 것 이다. 노은은 ‘노산군(단종)에 대한 은 집현전 여러 관직 역임하며 세종의 한글창제 업적 도와 계유정난 이후 박팽년 등과 단종 복위 꾀하다 처형당해 훈민정음 해례본 저술하고 한자사전격 ‘동국정운’ 편찬 혜’를 줄인 말로 성삼문의 단종에 대 한 의리와 충절을 마을 이름에 담은 것 이다. 그리고 성삼문의 충절을 기리기 위 해 이곳에 1676년(숙종 2)에 노은서 원을 세웠고, 녹원서원이라 사액되기 도 하였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 로 철거된 후 오늘날까지 복원되지 못 하고 있다. 다만 시신이 없이 사육신의 위패와 성삼문의 유품을 묻고 제사를 지내는 가묘 형태의 노은단이 있다. 노 은단에 오르는 계단 아래 오른쪽에는 ‘ 성삼문 선생 사적기’ 비와 ‘단심가’ 시 조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성삼문의 충 절을 전하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 할 제 독야청청하리 라 -성삼문, <단심가> 시조 전문 세조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절의와 지조, 그리고 사 군이충이라는 대의명분을 확립하기 위해 육신으로 맞서는 ‘투사’의 모습을 전통적 상징물인 소나무를 활용하여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홍성 노은리 고택 마을 이름에도 충절 정신 담겨 논산 양촌리 묘역에 들어서면 제사 지내는 사당・신도비 있어 세종엔 유품 등 간직한 문절사 꼿꼿한 충절과 지조 느끼게 해 홍주읍성에 있는 성삼문 선생상

   ▶ 쪽 아래 큰 길가에는 숙종 때 우암 송 시열이 묘소의 실전을 막기 위해서 친필로 쓴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무궁화를 가로수로 심은 매죽헌로를 따라서 가 다가 보면 홍성군 홍북면 상 리 도로변 야산에 성삼문 선생 부인 연안김씨 묘가 있고,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삼거리에 성삼문의 아버지 성 승 장군 신도비가 있으며 그 앞 야산 에 성승 장군 부 부 묘가 있다.

   ◆ 논 산 성삼문 묘역 한강변현 노량진에서 거열형을 당 한 성삼문의 시신은 조선 8도 여기저 기로 흩어지게 되었고, 이때 팔도로 보내진 시신 중 한쪽 다리 부분을 운 반하던 사람이 귀찮은 생각에 독설을 내뱉자 ‘아무 데나 묻어라.’라는 소리 가 들려, 지게꾼은 그 길로 달아나고 근처 신비들이 나서서 현재의 자리 충 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양촌리에 안장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쪽 다리가 묻 혀서 이곳을 ‘일지총’이라고도 한다. 성삼문 묘역에 들어서면 넓은 공터 끝에 삼문과 사당이 있다. 삼문에는 ‘ 무 이문’이라는 현판이 사당에는 ‘성 인각’이라는 현판이 있다. 사당에서 남쪽 골짜기 성삼문 묘소 가는 길 입 구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고, 약간 위쪽 산기슭에 성삼문의 신도비가 세 워져 있다. 4~5m 정도의 폭이 넓은 골 짜기 안으로 70~80m 정도 곧게 들어 가 계단을 오르면 절개와 지조의 상징 성삼문 묘소가 모셔져 있다. 

   ◆ 세종 금남의 성삼문 사우 문절사 성삼문의 신주, 영정, 유품, 친필 등 을 모셔 놓은 문절사가 앞산이 반달같 이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세종시 금남면 달전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 에 있다. 문 절사에 들어서면 가파른 돌 계단이 있고 입구 우측에는 성삼문의 업적을 기록한 ‘문절사비’가 세워져 있으며, 삼문에는 붉은색 바탕에 큼지 막한 태극문양이 있고 왼쪽에는 태극 기가 게양되어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 워 준다. 성삼문은 <수양산 바라보며>라는 본인의 시조처럼 백이 숙제와 달리 세 조가 주는 국록을 한 톨도 먹지 않고, 받은 날짜까지 적어 그대로 보관하면 서 단종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켰 다. 이러한 성삼문의 충절과 지조를 기 노은단 오른쪽 아래에는 그의 시호 를 딴 사당 충문사가 있고, 충문사 왼 매죽헌 성삼문은 38세의 짧은 생애 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와 업적 은 실로 다양하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 이라는 큰 상징성으로 인해 충신과 지 사로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본고는 그는 뛰어난 언어학자로서 한 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음을 재고 한다. 성삼문은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나타난 그의 직간, 상소와 백관들과의 대화를 보면 그의 언어는 조리가 있고 경위가 맞으며 강온이 조화되고 유창 하기가 물 흐르듯 해 군신을 모두 설복 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출중한 언어능 력으로 세종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 민정음을 창제할 때부터 참여하여 한 글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매죽헌은 또 타고난 언어능력에 중 국어까지 익히어 조정의 언관 승지로 서 한 중의 외교와 교류 관계를 모두 관 장하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신숙 주 등과 함께 요동에 귀양 온 음운이 론에 정통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 자문을 구하고자 13 회나 수레 다섯 대에 자료를 가득 싣고 천오백 리 길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성삼문은 훈민정음의 창제부터 주 도적 역할을 하며 훈민정음의 바른 사용을 위한 ‘훈민정음 해례’의 작 성 및 간행, 한자의 동음을 정 리한 ‘동국정운’ 편찬, 그리고 중국어의 표준 발음 사전이 라 할 수 있는 ‘홍 무정운역훈’ 등을 편 찬하였다. 그리고 ‘직해동자습’을 역 훈하여 실제 중국어 학습교재로 활용 하여 실질적인 훈민정음 창제와 보급 에 앞장선 한글사랑 실천 1등 공신이 었다. 이제 한글은 전 세계가 뛰어난 과학성을 인정하여 인류의 위대한 유 산으로 세계화되고 있다. 우리의 한글 이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고, 재러드 다이아몬드 등 세 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알파벳’이라고 극찬했다. 우리 한글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우 리가 먼저 아끼고 제대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글 창제의 중심에 세 종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충청인 매 죽헌 성삼문이 있었음을 기억할 일이 다.

                                                             <참고문헌>

   1. 방 경 태, "임금 향한 충절만큼이나 한글 사랑했던 사육신", 금강일보, 2024.10.8일자.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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