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초석 놓은 엘리스 아펜젤러

대선 | 2024.06.21 16:35 | 조회 181
앨리스 아펜젤러가 이화학당 대학과 8회 졸업생 두 명(맨 왼쪽·오른쪽)과 이화학당 선교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 앞쪽에 있는 사람이 앨리스 아펜젤러예요. /이화역사관© 제공: 조선일보

  미국 하와이에 사는 한·미 청소년들이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찾아갔어요. 학생들은 이곳을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이 다닌 배재학당을 설립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가묘(假墓)에 꽃을 바쳤다고 해요. 헨리 아펜젤러는 1902년 배를 타고 전남 목포의 성경 번역자 회의에 가다가 전북 군산 어청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하는데요. 여기서 그는 조선인들을 먼저 탈출시키려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그의 시신도 끝내 찾지 못해 가묘가 만들어졌답니다.

  그런데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가묘는 아펜젤러 집안의 가묘(家墓·가족 묘)이기도 합니다. 장녀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와 장남 헨리 도지 아펜젤러가 함께 잠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장녀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에 대해 알아볼게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 아기

  헨리 아펜젤러 목사는 미국 북감리회 최초의 조선 선교사였어요. 1885년 임신한 아내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정동은 서양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였어요. 아펜젤러 목사는 이곳에 정동제일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웁니다.

생후 6개월 무렵의 앨리스 아펜젤러. /이화역사관© 제공: 조선일보

  아펜젤러 부부는 조선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집 대문을 활짝 열고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게 했다고 해요. 하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은 외모가 너무나 다르게 생긴 서양인을 무서워했고, 아펜젤러 부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고 해요. 그러던 1885년 11월 9일, 아펜젤러 목사 집에 회색 눈의 예쁜 여자 아기가 태어납니다. 한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서양 사람인 이 아기의 이름은 앨리스 리베카 아펜젤러입니다. 앨리스가 태어나자, 아펜젤러 목사에게 다가오지 않던 사람들이 귀여운 아기를 보려고 그의 집으로 모여들었어요. 작은 아기가 사람들 마음의 경계를 풀어버린 거죠.

   앨리스는 조선 아이들과 함께 놀고 공부하면서 조선말과 조선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습니다. 어느덧 10대로 성장한 앨리스는 아버지 안식년으로 1900년 미국에 건너가 미국 학교에 다니기 시작합니다. 앨리스는 미국 친구들에게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조선 노래도 불러 줬다고 해요.

                                                 조선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다

   미국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한 후 교사로 경력을 쌓은 앨리스는 1915년 자신이 태어나고 어릴 적 자랐던 곳이자, 아버지가 소명을 다한 조선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처럼 선교사로 파견된 것이었죠. 이화학당 교사로 파견된 앨리스는 본격적으로 조선 여성 교육을 위해 힘쓰게 됩니다.

   이화학당은 오늘날 이화여자대학교가 된 학교예요. 1886년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이 땅에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정동제일교회 옆에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 아펜젤러도 조선 여성 교육에 관심이 있었어요. 조선에서 남성들만 교육받고 여성들은 집에 갇혀 지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죠. 당시 여성들은 교육은커녕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다고 해요. 이런 모습에 가슴 아파했지만, 조선 사회에서 여성 교육에 남자 선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어요. 이러한 그의 마음은 앨리스가 조선 여성 교육에 헌신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신촌 캠퍼스 집무실에 앉아있는 앨리스 아펜젤러. /이화역사관© 제공: 조선일보

  앨리스는 조선 여성들이 성품이나 재능, 지적 능력 등에서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느꼈어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느 나라 여성 못지않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당시 이화학당에선 초·중·고·대학 과정의 공부를 배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여자에게 대학 교육은 필요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사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전문학교 인가를 받기도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여성 대학 교육이 이어져야 한다고 확신한 앨리스는 1922년 이화학당 당장으로 취임해, 1925년 전문학교 인가를 받아냅니다. 이로써 이화학당의 대학 과정은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독립해 오늘날 4년제 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전문학교가 되자 이화 졸업생들은 교사 자격증을 받아 사회에 더 많이 진출할 수 있게 됐어요. 또한 앨리스는 졸업생들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이화의 교수로 키우는 데도 힘썼습니다. 훗날 조선 여성들이 스스로 학교를 이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려는 마음이었죠.

                                                          한국에서 눈감다

김다인 이화역사관 연구원© 제공: 조선일보

정동 이화학당에 학생이 점점 많아지면서 새 캠퍼스 설립 계획을 세웠지만 돈을 마련하는 게 어려웠어요. 1928년 안식년을 맞아 조선을 떠나게 된 앨리스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이화의 새로운 캠퍼스 마련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칩니다. 그는 “차라리 배가 난파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모금 과정은 힘겨웠다고 해요.

하지만 그 덕에 미국 등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신촌에 새로운 캠퍼스를 지을 수 있게 됐어요. 오늘날 신촌에 있는 이화여자대학교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에요. 앨리스 아펜젤러 교장의 노력으로 1935년 신촌으로 이사한 이화여자전문학교는 전문 시설을 갖추고 더욱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1940년 앨리스는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심정을 편지에 남겼어요. 2차 세계대전으로 미·일 관계가 악화돼 미국인들이 조선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이 미국 본토로 귀국해 교수로 일하던 앨리스는 조금이라도 한국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은 마음에, 선교회에 한국에서 가까운 미국 땅 중 한 곳인 하와이에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하와이에서 조선인을 위한 선교 사업 등의 활동을 계속했어요.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한국에 돌아갈 길이 열리자, 앨리스는 1946년 이화의 신촌 캠퍼스로 돌아옵니다. 이화는 이화여자대학교라는 이름의 종합대학교로 성장해 있었어요. 앨리스가 닦아 놓은 기반 덕분에 광복 후 첫 번째로 종합대학교가 됐기 때문이죠. 이화여대의 명예총장이 된 앨리스는 학교를 위한 활동을 계속했어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해주고, 학생들을 가르쳤죠.

   그러던 1950년 2월 20일 학교 채플을 인도하던 중 뇌일혈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장례식은 정동제일교회에서 사회장으로 진행됐어요. 사회장은 사회에 이바지한 공로가 큰 사람이 죽었을 때, 그와 관계한 각종 사회 단체가 연합하여 장례를 치르는 걸 말해요.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발표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해 “앨리스 아펜젤러는 한국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며 애도사를 남겼습니다. 정동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조선과 여성 교육에 헌신한 앨리스 아펜젤러는 그렇게 서울 양화진에 잠들게 됐습니다. 

                                                          <참고문헌>

  1. 김다인, "아버지인 배재학당, 딸은 이화여대 초석 놓았죠", 조선일보, 2024.6.20일자. A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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