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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칼럼] 철학을 바라보다

2020.03.25 | 조회 4004 | 공감 0

빛이 있습니다. 기다리면서

   

                                          황경선(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萬物靜觀皆自得).”

“유연현남산(悠然見南山).”


‘가만히 바라보는 것(靜觀)’ 또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悠然見)’은 어떤 종류의 바라봄인가? 일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시각과 뭐가 다른가? 혹은 일상적, 이론적 이해에 가려져 있으면서도 그것의 가능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 ‘유연현남산.’ 앞의 시는 정명도程明道(1032~1085)의 ‘추일우성秋日偶成’이란 시에 들어 있는 구절이다. 후자의 것은 도연명陶淵明(365~427?)의 시詩에서 가장 탁월한 것의 하나로 꼽히는 ‘음주飮酒 오수五首’의 일부분이다. ‘추일우성’은 ‘가을날 우연히 짓다, 이루다’는 뜻이며 도연명의 ‘음주’ 뜻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가만히, 물끄러미 만물을 남산을 바라볼 때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나를 향해 자신을 내보이는가, 또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인가? 


시원의 세계 이해를 간직하고 있는 말들은 이런 질문들이 어리석거나 단순히 대답될 수 없다고 말한다. ‘見’의 의미가 그렇다. ‘눈 목目 자’와 ‘어진 사람 인儿’ 자가 결합된 ‘見’은 주로 ‘보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나타나다’, ‘드러나다’, ‘내보이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고 이 경우 ‘현’이라 읽는다. 독일어의 ‘Blick’도 마찬가지 사정이다. 현재 거의 ‘봄’, ‘바라봄’, ‘시선’, ‘시야’ 등을 가리키지만 ‘내보임’, ‘나타남’의 의미로도 쓰인다. 


서양철학자 하이데거는 이에 더하여 바라봄이 “빛 안에 밝게 열림과 비은폐된 것으로 들어섬, 즉 빛남의 시원적인 방식”(Parmenides)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밝음 속에 드러난 혹은 환히 트인 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바라봄이며 주시注視라는 것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여기서 하이데거가 ‘발현(Ereignis)’의 어원에 관해 밝힌 설명을 상기한다. ‘발현’은 하이데거가 그의 사유 내내 물었던, 말하자면 그가 오롯이 향한 ‘하나의 별’이었던 존재의 진리를 호명하는 말이다. 


주요한 하이데거 해석가 중의 한 사람인 오토 푀겔러는 ‘발현’과 함께 하이데거 사유는 그 목적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에게서 존재의 진리는 언제나 열어 밝혀짐, 비은폐, 환히 열림, 밝게 트임의 사건이다. 발현은 이제 그 사태를 가장 부합되게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발현은 ‘Ereignen’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Er-eignen은 근원적으로 ‘er-äugen’, 즉 ‘erlicken(바라보다)’, ‘im Bicken zu sich rufen’(바라보며 자기에게로 부르다), ‘an-eignen(제 것으로 삼다)을 가리킨다.’”(Identität und Differenz) 발현의 어원에는 'Auge(눈)'의 의미가 함축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어원의 맥락을 고려하면 발현은 바라봄이 바라보이는 것으로 향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자기 안에 불러들이는 사태로써 일어난다. 발현하는 존재와 바라보는 인간 사이의 호응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바라보면서 자기에게로 부르는 것’은 밝게 드러나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것을 향해 바라봄을 바치는 인간인가? 무엇이 무엇을 제 것으로 전유하는가? 바라보이는 것은 누구 혹은 무엇이며 바라보는 것은 또 누구 혹은 무엇인가? 


앞서 바라봄과 관련된 오래된 말들은 바라봄 속에 밝게 열리는 것은 시원적 의미에서 그 자체 바라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분명한 것은 저 물음에 양자택일 식으로 답할 수 없으며 그런 방식으로는 발현 안에 참되게 다가선 게 아닐 것이란 점이다. 


발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을 기약한다. 다만 여기서는 만물이, 남산이 시인을 향해 스스로를 내보이면서 바라보고, 시인은 그 유혹에 상응하여 바라보는 가운데 그것들이 밝음에 감싸여 고유하게 드러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충분할 듯싶다. 


이제 글을 시작하며 인용한 도연명의 시로 돌아가 보자.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꽃을 따다)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본다(彩菊東籬化 悠然見南山).” 




다수의 주해자들은 여기서 ‘見’은 단순히 ‘보다’가 아니라 ‘나타나다’, ‘드러나다’란 뜻의 ‘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이 국화꽃을 따다 물끄러미 남산을 바라봄은 동시에 남산이 시인을 향해 밝음 속에 드러남, 나타남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시詩에선 ‘현’은 (남산을 향한 시인의) 바라봄이면서 동시에 (남산이 시인을 향해) 그 자체로부터 순수한 나타남과 내보임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아울러 나타남, 빛남, 스스로 내보임은 그 근원적 방식에서 또한 바라봄이며 주시함이다. 이 때 우리는 ‘바라보여진 것’이다. 


이에 따라 ‘유연현남산’에서는 이중의 바라봄이 문제가 된다. 시인을 향해 밝게 빛나며 스스로 내보이는 것의 바라봄과 그 응시에 응대하는 시인의 바라봄이 그것이다. 시인은 스스로 밝게 트임 속에 나타나는 동시에 그를 바라보는, 그를 향해 눈짓하는 남산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시인의 ‘물끄러미 바라봄’은 무엇을 고려하고 기대하는 계산적 관심에서 작용하고 현실의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자신의 요소로서 의욕하는 의지로부터 추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표상함의 모든 의욕을 비우고 다만 순전히 그 존재에 즉해서, 그것에 사로잡혀 보는 것이다.모든 것들이 존재의 밝음 아래 그 자체로 고유하게 나타나도록 자신을 내맡기고 기다리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아무 것도 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기다려야 한다.”(Gelassenheit)라고 말한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모습이 수면 위에 비친다. 그러나 기러기도 저의 모습을 수면에 떨어뜨릴 생각이 없고 수면도 그 모습을 담을 뜻이 없다.” 이 또한 무심한, 무욕의 바라봄〔情〕과 바라보이는 것〔景〕이 하나를 이루는 교융交融 속에 길어져 나온 것일 터다. 


남산을 유연히 바라본다. 잣나무를 가만히 응시한다. 이러저러한 모든 계산적 사유를 여의고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고’ 바라 볼 때, 바라봄은 남산, 잣나무가 있다는 존재의 밝게 트임과 하나로 물든다. 


이 가운데 비로소 그것들은 남산 자체로, 잣나무 자체로 들어선다. 그것들은 상상 없이 보고 왜곡 없이 들으며 기다릴 줄 아는 순연한 응대를 향해 처음으로 이러저러한 본질 외적인 규정들을 모두 떨구어 내고 그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드러낸다. 


남산은, 잣나무는 경제적 이용 가치, 건강을 위한 유용성, 학문적 관심의 대상 등 자신과 무관한 규정의 외피外皮를 벗고 고유함, 참됨으로 머문다.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 


그래서 가만히 바라봄, 물끄러미 바라봄은 사태 그 자체를 민낯 그대로 대면하는 탁월한 만남의 양식이다.


이 만남은 밝게 열림 속에 들어서서 바라보는 남산의 존재와 그리로 순연히 마음을 모으는 시인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함께 속함으로써 일어난다.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것은 서로를 향하며 자기의 것으로 삼는 방식으로 바라봄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 경우 시인이 남산을 보는가, 남산이 시인을 보는가? 혹은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앞서는가? 등 주객분리의 전제 위에서 둘 사이의 선후나 능동, 수동을 묻는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여기엔 주체도 대상도 없다. 주객관계는 저 바라봄의 공속성, 통일성이 열어주는 ‘사이’에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2차적이며 인위적인 것이다. 


바라보는 주체와 바라보이는 대상을 갈라놓고서는 그것의 기반인 바라봄의 사태 자체에 끝내 닿을 수 없다. 만남의 심연이 시원적인 것이다. 물의 하류에서 수원水源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저 만남의 장場에 그에 속하는 온갖 것들이 하나로 어울려 각기 고유함에 이른다.각각의 것은 조화調和 속에 제 모습으로 돌아가 그 자체 안에 고요히 머문다. 이 모든 것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일어난다. 


“밝게 갬(Aufheiterung)이 모든 것을 환히 트이게 함으로써 그 환히 트인 것은 각각의 사물에게 그것들이 자신들의 방식대로 속하는 본질공간을 허락해준다. 


이러한 본질공간 안에서 사물들은 마치 조용한 빛과 같은 환히 트인 것의 광채 속에서, 저의 고유한 본질에 자족하면서 서 있게 된다.”(Hölderlins Dichtung)  'Aufheiterung'은 통상 ‘날씨가 맑게 갬’, ‘침체된 기분이 풀림’을 의미한다. 이때 하이데거는 그것으로써 존재가 내보이고 바라보면서 밝게 열리는 사태를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라봄은 수동적인 것이거나 단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다. 밝음, 빛남과 바라봄이 하나로 물드는 이곳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바라봄의 주시자 없이는 우주도 없다. 


그 점에서 인도의 영성가 마하라지는 바라봄을 “실재의 망루”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아이 앰 댓(I AM THAT)』) 그렇다면 바라봄의 무위無爲는 모든 것을 비로소 참되게 존재하게 한다는 의미로 오히려 최상의 유위有爲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의 ‘회상(Andenken)’이란 시를 해명하며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은 상주常住하는 것 같고, 모든 것이 전혀 규정돼 있지 않음에도 마치 구원된 것처럼 보인다. 아름다운 강물, 도시의 정원, 가파를 강가를 따라난 오솔길, 깊게 떨어지는 시냇물은 하나의 황홀 속에 모여 있다.”(Hölderlins 'Andenken') 아마도 이것은 횔덜린의 시를 통한 하이데거의 바라봄 속에 보인 ‘남산’이고 ‘잣나무’이고 또한 ‘만물’일 것이다. 



휠더린(Friedrich Holderlin, 1770~1843) 


하이데거에 따르면 나타나게 함, 빛나게 함, 내보임은 또한 말함이다. 그는 나타남의 근본 방식은 바라봄이면서 또한 말함이라고 밝힌다. 밝음에 들어선 것은 근본적으로 말 건넴으로써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와 같은 “보여주기(Zeige)로서의 말(Sage)”에 언어의 본질이 있다고 이해한다.(Unterwegs zur Sprache) 그래서 남산과 만물의 나타남, 내보임은 우리를 향한 눈짓이며 바라봄인 동시에 또한 자기에게로 부르는 말함의 사건이다. 


독일어 'sagen(말하다)'의 고어 'sagan'이 그러한 사태를 일러준다. 'sagan'은 ‘말하다’는 뜻과 함께 ‘내보이다’, ‘나타나게 하다’, ‘보게 하다’, ‘듣게 하다’란 의미로 쓰였다.(Unterwegs zur Sprache)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 사유와 인도의 명상적 사유 전통 사이의 비교를 두고 벌어진 한 토론에서 뜻밖의 발언을 한다.(Zollikoner Seminare) 


“hell과 함께 Hellen은 소리란 의미에서의 Hallen과 같은 것을 뜻한다. 〔'hell'은 ‘맑은’, ‘밝은’ ‘청명한’을, 'Hellen'은 ‘밝히다’, ‘환하게 하다’를 그리고 'Hallen'와 ‘울리다’, ‘울려 퍼지다’를 의미한다.〕 존재의 밝게 드러남을 위한 고유하고 시원적 조건인 Hellen(빛, 밝음)은 근본적으로 Hallen(소리, 울림)으로써 일어난다.” 


또 답변의 끝에 자신의 유명한 말을 덧붙임으로써 여운을 남긴다. 


“이 점이 궁극적 진리에 대한 인도의 통찰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존재는 언어의 집이다.’라는 나의 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설명들을 고려하면 적어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과거에 바라봄과 말함, 빛과 소리, 말하자면 ‘관음觀音’은 서로 쉽게 분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의 전락轉落은 ‘빛남이 바라봄이요 그것이 또한 소리며 말씀’임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면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밝게 드러나며 우리를 향해 주시하고 스스로를 알리는 것의 말함은 침묵의 소리이고 정적의 울림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나타남, 밝게 드러남과 그것을 간수하여 지키는 바라봄의 관계는 침묵의 말과 거기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언어로 이르게 하는 청종聽從의 그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저 존재의 발현 속 은은한 울림과 인간 사이의 대화는 사실상 존재가 인간을 통하여 언어로 성음화聲音化되는 모노로그라고 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모노로그, 즉 언어는 오직 자기 자신과만 고독하게 얘기한다는 데 언어의 비밀이 있다고 한다.


남산과 만물이 건네는 말에 경청하고 그것을 언어로 순수하게 옮기려면, 말하자면 우리를 향한 저 밝음의 ‘인사人事’에 올바로 답례하려면, 바라봄에 요구되듯 여기서도 표상적이고 분별적인 ‘말’로써 규정하고 전달하려는 의지를 비워야 한다. 


그런 종류의 일체 ‘말’을 여의고, 침묵 속에 물러서 존재의 말함이 스스로 말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에 대해 마음에 모종의 계산을 걸어두고 이러저러한 말을 할 때, 그것은 ‘말 아닌 말’이고 “가장 상하기 쉬운 잡담”이 될 것이다. 무념無念하면 도道의 체를 보고 유념留念하면 도의 몸짓만을 볼 뿐이라는 말이 전하고자 한 뜻도 그러할 것이다.


하이데거에게는 침묵의 소리로써 말하는 존재의 구술을 받아 적는 또는 따라 말하는 것이 곧 존재 사유며 그것이 또한 시작詩作의 근원적 방식이다. 


글머리에 소개한 두 시구는 그러한 본질적 시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두 구절 또한 시짓기의 사유로부터 발화發話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빛이 있습니다. 기다리면서. 눈이 있습니다. 준비된 상태로.(『아이 앰 댓(I AM THAT)』 )


저 빈 곳을 보라. 텅 빈 방에 밝은 빛이 차 있다. 기쁨이 여기 머물지 않는가(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장자』 「인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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