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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인도 탐방단 보고: 불교 유적지 3편

2020.06.13 | 조회 1181 | 공감 0

붓다의 출가지 및 붓다의 유일한 유물인 발우鉢盂를 모신 성지,

케샤리야대탑Kesariya stūpa


상생문화연구소 노종상 연구위원



인도 탐방 4일째, 탐방단은 오늘 목적지는 바이샬리(와이샬리)Vaishali. 정확하게는 바이샬리에 있는 대림정사라는 사원으로 향했습니다.




붓다의 나라

2월에 한겨울의 추위를 나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때 아니게 따가운 햇볕과 더위가 몰려왔습니다. 버스를 타고 뿌연 먼지속을 얼마나 달렸을까요. 달리는 동안 탐방객의 눈길은 사람 사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특히 붓다에게 관심이 많은 탐방객에게 붓다의 나라 사람들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500년 전, 북방 불기로는 3천 년 전, 이 메마른 땅을 맨발로 다녔을 붓다를 떠올릴 때마다 후예들의 모습 어딘가에는 당신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호기심이 뭉클거렸습니다. 탐방객은 그것을 찾고 있었죠. 붓다의 핏줄을, 땀을, 숨결을, 그림자를….


이제, 기회가 왔으니까, 당신의 말씀이 아닌 무엇을, 더욱 진솔한 사람의 냄새를, 향기를 맡고 싶다는 마음이 일었지만, 탐방객의 그런 어쭙잖은 희망은 곧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요. 붓다의 후예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는 참으로 가난이 넘쳐나는 풍경뿐이었습니다. 거룩한 붓다의 모습도, 보살도, 아라한도 없었습니다.


지구촌 어느 곳인들 크게 다르겠냐만은, 뜨겁게 솟구치는 마음을 꾹꾹 눌러 죽이며, 눈을 황소같이 크게 뜨고 보면 볼수록, 그곳 사람들은 헐벗고 가난했습니다.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가난한 풍경들이었죠.



기대와 실제, 그 사이

한국에서 탐방객은 잘 가공된 말씀으로만 붓다를 만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그랬을 것입니다. 붓다의 나라 인도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탐방객이 찾아 헤맸던, 와 보고 싶었던, 체험해 보고 싶었던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붓다의 말씀처럼 성스러운 풍경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거리마다, 도로마다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 릭샤, 그리고 사람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혼란과 무질서의 광란을 이루고 있었으며, 어느 곳이 쓰레기장이며 어느 곳이 시장인지 분간조차 할 수 없고,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만 주인 없는 소와 개, 온갖 날짐승들이 쓰레기장을 뒤지듯 저자거리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미세먼지 정도가 아니라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온통 뿌연 흙먼지가 안개처럼 뒤덮여 있는 이 인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룸메이트 김박사가 “왜 불교를 믿는 곳들은 이렇게 가난해요?” 하고 물어옵니다. 말인즉, 인도에서 불교의 성지가 있는 곳은 주로 비하르 주이고, 이 비하르 주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다는 것을 지적한 물음이죠. 물음을 받아든 탐방객의 가슴은 무척 아픕니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됩니다. 탐방객의 그런 실망 따위는 처음 얼마동안의 나그네의 첫인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그런 풍경이야말로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민낯임을, 진솔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나라에 올 때부터 저 황금빛 찬란한 거룩한 붓다의 모습을, 온통 장엄한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보려고만 했던 것은 아닐까 되돌아봅니다.


저들의 감정 깊은 곳이야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저들의 눈빛 어디에도 가난의 불행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불행 따위의 가치 기준이야 각자 가지고 있는 마음이 문제 아닐까, 누가 누구를 동정하고, 실망한단 말인가. 몇 푼어치 되지 않은 문명의 껍데기를 가지고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꼴에 지나지 않을 터다.'


속된 말로 개구리 올챙잇적 생각 못하는 꼴이요, 우리나라 70년대, 60년대를 생각하지 못할 모양새였죠.


갑자기 신동엽 시인의 시 〈껍데기는 가라〉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붓다의 출가지

어림잡아 두 세 시간을 달리니 그날 목적지인 바이샬리까지는 55km를 남겨둔 곳, 케샤리야Kesariya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붓다 당시 케샤리야는 16국가 중의 하나인 왓지국의 북쪽 변방입니다. 그때 그곳에는 깔라마라고 불리는 반독립 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수도는 께사뿟따로 초기 경전에는 『께사뿟따경』이 전합니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스스로가 ‘이러한 법들은 유익한 것이고, 이러한 법들은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이런 법들은 지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법들을 전적으로 받들어 행하면 이익과 행복이 있게 된다.’라고 알게 되면, 그것들을 구족하여 머물러라. (『깔라마경』, 『앙굿따라 니까야』, 대림스님 옮김)


탐방단이 탄 버스가 멈추자. 왼쪽 차창으로 들어온 탐방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스투파stūpa입니다. 말이 탑이지 퇴락한 왕릉처럼 보이기도 하고, 작은 산이나 높은 언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케샤리야 스투파. 케샤리야 대답大塔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깔라마경』을 설한 곳을 기념하기 위한 스투파입니다.


얼핏 보아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이지만 규모부터가 엄청난데요. 둘레가 424m, 높이가 16m나 됩니다. 학계에서는 돔의 원래 높이는 51m 정도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스투파의 아랫부분은 굽타시대, 윗부분은 팔라시대에 축조된 건축물입니다.


2020년 5월 18일 방영된 BBS 불교방송의 「부처님 행적 답사기」에서 관음사 회주 우학스님은 “이 케샤리야 대탑이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이라고 합니다. 이 스투파는 아직도 발굴 중입니다.

 

오랫동안 역사 저편에 묻혀 있던 이 스투파를 발굴한 학자는 영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커닝햄Sir Alexander Cunningham(1814~1893)입니다. 그가 이 스투파를 발굴했을 때 3㎡크기의 벽돌방이 발견되었고, 안에는 커다란 붓다의 흉상이 있었습니다.

 

이 수투파가 유명한 것은 『깔라마경』 설법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는 이유만은 아닌데요. 다름 아닌 붓다의 출가지로서 더욱 유명세를 탔습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왕국에서 보낸 붓다의 태자시절은 이미 불교경전뿐만 아니라 불전문학에서 많이 전한 얘기이므로 생략합니다.




붓다의 생애를 부분, 부분 나누었을 때, 적어도 불교인들에게는 어느 한 부분 중요하지 않는 날이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굳이 가장 중요한 날을 꼽으라면 아마도 성도한 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 인간이 붓다가 된 날! 여기에 탐방객이 또 하나를 보태자면 바로 출가한 날일터! 바로 그날, 카필라바스투의 태자 고타마Gautama 싯다르타Siddhārtha가 출가하는 날입니다. 


이날 밤 태자는 조용히 밤이 깊어가는 것을 기다렸다. 사랑하는 처와 갓 난 왕자에게 무언의 작별을 하기 위해 태자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밤이 깊어지자 마부 찬나Channa에게 사랑하는 말 칸타카Kanthakā에 안장을 얹게 하고, 이 말을 타고 몰래 성을 빠져 나왔다. … 태자는 밤길을 서둘러 아누피야Aupiya 읍 근처에 있는 아노마Anomā 강을 건넜다. 새벽녘에 강가에 서서 보석으로 장식된 왕자의 옷을 걸식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카락을 자르며 그 밖의 모든 장식을 다 버렸다. 마부 찬나는 계속해서 태자를 따라가기를 원했으나. 태자는 왕자의 의복을 그에게 맡겨 왕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애마 칸타카는 이별의 슬픔을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고 전한다.(이기영, 『석가』)


이기영 교수의 글에서 케샤리야는 나오지 않지만, 이곳이 붓다의 출가지라면 ‘보석으로 장식된 왕자의 옷을 걸식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카락을 자르며 그 밖의 모든 장식을 다 버린’ 그때 그곳이 바로 이곳이라는 얘기일 터. 그리고 이곳에는 붓다의 출가를 기념하기 위해 스투파가 세워져 있습니다. 




케샤리야 스투파는 『깔라마경』 설법지, 붓다의 출가지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붓다의 유일한 유품인 붓다의 발우를 모셨던 성지입니다. 


그러니까 붓다가 출가한 날로부터 50년 뒤, 붓다로서의 한 생애를 길 위에서 보낸 붓다는 당신의 반열반般涅槃할 땅 쿠시나가르를 찾아가는 최후의 여정에서 왓지국을 지나갔습니다.


내딛는 걸음, 걸음은 코끼리 걸음처럼 무거웠음을 왓지국 사람들도 알았습니다. 이 길이 붓다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것을. 왓지 사람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붓다의 뒤를 굴비 엮듯 줄줄이 따라갔습니다.

 

가네. 가네. 붓다가 가네. 붓다의 마지막 길을 따라가는 왓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연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붓다도 걸음이 무거웠는지.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모두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붓다의 말씀이거늘, 감히 거역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이번만큼은 거역하고 싶었습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께샤리야에 도착. 걸음, 걸음마다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놓던 붓다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들고 있던 발우를 뒤따르는 왓지사람들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 장엄함을, 이 처연함을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비구bhiksu에게 발우가 무엇이던가

아니, 비구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는 남자로서 출가하여 250계를 받아 지니는 이를 가리킨다. 그런 거추장스런 의미를 다 벗겨버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비구란 ‘걸식하는bhiks 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걸사乞士’라고 한역한다. ‘걸사’라 함은 비구는 항상 밥을 빌어 깨끗하게 생활하는 것이니, 위로는 법을 빌어 지혜의 목숨을 돕고, 아래로는 밥을 빌어 몸을 기른다는 뜻이다.


오. 이런 의미도 껍데기가 덧붙여졌다. 좀 더 솔직하게, 생물학적으로, 발우란 불교 수행자에게 있어서 먹고 살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게 밥을 비는 밥그릇이요, 반찬그릇이니까.


그 도구는 붓다는 당신의 마지막 길을 굳이 따라오는 왓지 사람들에게 주었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을 터다.


그 중의 하나는 이 길이 당신의 마지막 길이라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한 도구가 이제는 없어도 된다는. 무념스님의 『인도 불교성지순례가이드』에 따르면 세상에 남아 있는 붓다의 유일한 유품인 이 발우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Kandahar의 한 작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칸다하르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가장 전쟁이 치열한 곳이다.


나무미륵존불 여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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