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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인도 탐방단 보고: 불교 유적지 4편

2020.06.18 | 조회 827 | 공감 0

불교 최초의 여성 출가 유적지, 바이샬리 대림정사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노종상


붓다의 출가지 및 붓다의 유일한 유물인 발우鉢盂를 모신 성지, 스투파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케샤리야대탑Kesariya stūpa을 떠난 탐방버스는 계속 달린다. 


인도탐방과는 다른 목적도 있었으므로 탐방버스는 동남방향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2,500여 년 전 붓다가 걸었던 이승에서의 마지막 여정과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케사리야에서 바이샬리까지는 55km. 어디를 가더라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나름대로 풍요함을 지고 살거나 간난을 이고 살거나,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두 곳을 오가는 버스나 기차는 없다. 가도, 가도 허허벌판뿐이다. 문득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이 떠올랐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낯선 친구 만 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천안 삼거리를 지나도/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가는 길.//신을 벗으면/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 리, 먼 전라도 길.


‘문둥이’ 시인의 고통스러움이야 함께 할 수 없으므로 제쳐두고, 천안 삼거리를 지나 전라도 길을 가면서 시인은 징게맹경 그 넓다는 벌판을 그렇게 노래했다. 그렇게 먼 길이던가, 그곳이! 고작해야 천 리, 그 길이 그토록 멀더란 말인가. 




중국, 인도 등지를 여행해면서 우리는 참으로 작은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면, 나그네만 느끼는 감정일까. 작아도, 작아도 너무 작은 땅덩어리에서 산다, 우리는! 뭐, 그렇다고 기죽을 일이야 있겠는가. 작은 땅덩어리로되, 큰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면서 다시 차창 밖으로 눈길을 밀어낸다. 


여기는 인도 땅, 케사리야 대탑을 지나 바이샬리로 가는 길,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은 아득히 펼쳐진 벌판이다. 인도 어디를 가나 저 끝없는 벌판을 보면 참으로 허허로운 웃음만 나올 뿐이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지평선뿐이다. 찌는 듯 땡볕 아래에 물기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척박함을 제외하면, 그 넓이가 좀 부러운 것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탐방버스는 달린다. 광활한 벌판을 지나고, 강을 지나고, 지친 탐방객의 마음이야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버스는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여기는 와이샬리Vaisalī였다. 고대 도시 바이샬리, 빨리어 웨샬리Vesālī, 한역경전에 비사리毗舍離로 기록된 곳이다. 바이샬리는 붓다 출현 이전부터 리차비국의 수도였다. 당시에 바이샬리는 대도시였으며 바이샬리 공화국의 수도였다. 현재의 인도 비하르 주의 히말라야―강가강(갠지스강)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넓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무념스님의 얘기는 좀 다르다. 와이샬리가 당시 왓지국의 수도였다는 것이다. 


왓지국은 여러 부족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공화정 형태의 부족연맹국가였다. 물론 당시의 공화정이란 것이 지금의 민주공화국과는 같은 것은 아니다. 과거 신라의 화백和白제도와  같이 귀족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수평적 배타적 부족회의체였다. 그 부족 중 릿차위족과 위데하족이 강했으며, 릿차위족의 수도는 웨살리이고, 위데하족의 수도는 미틸라였다. 둘 중에서도 릿차위가 강해서 릿차위를 왓지와 동의어로 사용했다고. 


붓다의 시대에 바이샬리는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다. 많은 사람이 살았다. 일설에는 당시 바이샬리에 7,707가지의 놀이터와 그만큼의 연꽃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바이샬리는 불경 및 불전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바이샬리는 수행자 고타마 싯다르타는 물론 붓다와도 인연이 깊은 지역이다. 


인간은 왜 고통스러운가? 왜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生老病死]가 고통 아님이 없는데, 이 고통을 영원히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이 물음 하나를 풀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천륜까지,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태자라는 신분까지 훌훌 털어버리고 고국 까삘라빠스뚜를 떠나 출가의 길에 오른 싯다르타가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곳이 바이샬리였다. 


붓다가 된 뒤에도 당신과 바이샬리의 인연은 깊었다. 먼저 당신의 교단(상가)을 당시 바이샬리에서 이루어지던 민주주의적 방식에 따라 조직했다. 불교 교단을 의미하는 ‘상가saṁgha’라는 말은 원래 이 지역에서 발생한 상공업자들의 동업조합(길드)이나 공화제를 의미하는 용어였다. 


『법구경』 주석서 『법구경이야기』 3권(무념·응진 스님 번역)에는 바이샬리의 기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붓다께서 성도 후 2~5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바이샬리에 예년에 없던 가뭄이 들었다. 타는 가뭄에 농작물이 말라죽고 집집마다 식량이 바닥이 났다. 마을마다 줄초상이 일어났다. 굶어 죽은 시체가 버려져 저자에는 송장 씩는 악취가 진동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악취는 많은 악귀를 불러 들였다. 이윽고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기근, 악귀, 역병의 세 가지 재앙이 도시에 덮친 것이다. 왓지인들은 라자가하의 웰루와나에 계신 붓다를 초청하여 재앙을 물리치려고 했다. 


붓다는 그들의 칭을 받아들여 바이샬리를 방문했다. 붓다께서 왓지의 영토에 들어서는 순간, 하늘에서 홍수가 질 정도의 비가 내려 금방 대지를 해갈시키고 저자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를 쓸고 가버렸다. 붓다는 『보배경』을 설하며 시자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웨살리를 돌아다니며 내가 설한 『보배경』을 암송하여라." 말했다. 


아난다가 『보배경』을 독송하며 거리를 돌아다니자 악귀들이 모두 도망쳤다. 역병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재앙이 물러가고 대지는 다시 평온을 찾았다. 


『보배경』은 말한다. 



불사不死에 뛰어들어 목적을 성취하여 지복을 얻어 적멸을 즐기나니 

승단이야말로 훌륭한 보배, 이 진실에 의해 행복하기를!

…이곳에 모인 존재는 지상이나 하늘이나 어디에 있든지

천신과 인간의 존경을 받는 이 가르침을 공경하여 행복하여지이다!

이곳에 모인 모든 존재는 지상이나 하늘이나 어디에 있든지

천신과 인간의 존경을 받는 승가를 공경하여 행복하여지이다!(『보배경』)


이후 바이샬리 백성들은 이 『보배경』을 늘 가슴에 품고 다녔고, 오늘날도 남방 초기불교 불자들은 늘 암송하고 있다. 


바이샬리가 불교역사에서 중요하게 기억되는 다른 하나는, 이 도시가 최초의 여성 출가지라는 점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초기불전 『앙굿따라 니까야』에 포함되어 있는 『고따미경』에 전하고 있다. 


한때 붓다께서는 까필라왓투의 니그로다 원림에 머무셨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붓다에게 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부처님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만하시오, 고따미여. 그대는 여자가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을 안으로 출가하는 것을 요청하지 마시오.”

두 번째, 세 번째로 거듭 요청했지만 붓다는 거절했다.(『고따미경』)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누구인가? 까필라왓투의 왕비요, 붓다의 이모이자 당신을 직접 양육한 어머니에 다름 아니다. 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출가를 원했으나 붓다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 후 붓다는 고향인 까필라왓투를 떠나 바이샬리에서 큰 숲의 꾸따가라살라에 머물렀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삭발을 하고 노란색 가사를 입고 500명에 이르는 사꺄의 여인들과 함께 걸어서, 걸어서 바이샬리로 왔다. 까삘라성에서 바이샬리까지 약 400km, 사꺄족 여인들의 행색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온통 먼지투성이였으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 있었다. 아난다 존자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발이 퉁퉁 부어올랐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온통 먼지투성이였으며, 슬픔과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면서 문밖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존자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따미경』)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착한 아난다가 붓다에게 여인의 출가를 요청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두 번, 세 번 거듭 간청하였으나 붓다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난다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난다 존자는 방법을 바꾸어 질문했다. “부저님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면 예류과預流果(욕계·색계·무색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나 일래과一來果(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 그러나 이 성자는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라고 함)나 불환과不還果(욕계의 수혹을 완전히 끊은 성자. 이 성자는 색계·무색계의 경지에 이르고 다시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 함)나 아라한과阿羅漢果(성문聲聞들 가운데 최고의 성자. 욕계·색계·무색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를 실현할 수 있습니까?”(『고따미경』) 


아난다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붓다는 “실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아란은 기다렸다는 듯 간청한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하여 예류과나 일래과나 불환과나 아라한과를 실현할 수 있다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부처님께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분은 부처님의 이모였고 유모였고 양육자였으며, 부처님의 생모가 돌아가셨을 때 부처님께 젖을 먹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자도 집을 나와 여래가 선포하신 법과 율 안으로 출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아난다여, 만일 마하빠자빠띠 고따미가 팔경계八敬戒를 받아들인다면 그녀는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고따미경』) 


여성 출가라는 사건은 그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기꺼이 팔경계를 받아들여 비구니계를 받았다. 나머지 500명의 여인들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를 은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역사적인 비구니교단이 출범한 것이다. 해피엔딩이다. 그때 비구니가 된 여인들은 붓다의 『난다까의 교계경』을  듣고 모두 성자의 지위에 들었다. 


2,500년 전, 불교 상가에 첫 비구니 교단이 출범한 바이샬리, 그곳에는 여성출가에 공덕을 남긴 아난다를 기념하는 스투파가 전하고 있다. 꼴로와 지역의 유적지에 있는 대림정사가 그곳이다. 


아난다 스투파는 물론 아소카 석주는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형태로 남아 있다. 사자상이 앉아 있는 대좌에는 문양이 없고, 명문도 없어 다른 아소카 석주와 다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이 석주가 아소카 석주 이전에 세워진 원형이라는 주장을 재시하기도 한다.


아소카 석주 옆에 있는 아난다 스투파 역시 아소카 왕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976년과 1978년의 발굴에서 이 스투파는 마우리아 시대에 세워졌으며 이후 두 번의 증축이 있었다는 사실이 고증된 것. 또한 스투파 주변에 있는 승원터는 꾸따가라살라重閣講堂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이 승원터가 꾸따가라살라라고 한다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500명의 사까족 여인들이 붓다는 찾아와 출가 허락을 받았던 바로 그곳이 된다. 



▲대림정사 안내판



▲여성출가에 도움을 준 아난다를 기리는 아난다 스투파와 아쇼카 석주



▲아쇼카 석주. 이 아쇼카 석주는 가장 완벽하게 남아 보관되고 있는 유물이다. 석주의 사자상의 머리는 열반지 쿠시니가르를 향하고 있다. 



▲스투파와 석주 앞에 있는 연못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붓다가 목욕할 수 있도록 원숭이 들이 파놓은 연못이라고 한다. 일명 원숭이 연못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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