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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 (8)

2020.08.26 | 조회 262 | 공감 0

일체삼용一體三用(삼일기체三一其體와 일삼기용一三其用)의 논리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동북아 한민족의 문화정신에는, 마치 선조先祖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gene)처럼, 오래전부터 전수되어 전해지는 민족 고유의 ‘밈(meme)’이 자리하고 있다. ‘밈’이란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사유나 믿음이 전달될 때 기억에 안착되거나 복제될 수 있는 ‘문화적 유전자’이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세판’으로 결판을 내는 놀이나 민속 경기競技,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살아도 ‘석잔’ 죽어도 ‘석잔’이라는 말,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의 음식에도 ‘삼시 세끼’, 인간 생명의 잉태와 출산을 도모하는 ‘삼신할머니’ 등의 개념은 ‘삼수三數’가 함유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삼수’가 들어가 있는 한민족의 문화적 유전자는 바로 ‘삼수논리三數論理’에 기원한다. ‘삼수논리’는 까마득한 옛적부터 한민족의 사유방식으로 고착되었고, 현재까지 일상적인 삶의 습속習俗에 원형 그대로 전수되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삼수논리’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 기원起源은 「삼일신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이렇게 정의한다. 


“「삼일신고」는 신시 개천시대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서 그 때 글로 지어졌는데, 대체로 집일함삼과 회삼귀일의 뜻을 근본 강령으로 삼는다.(三一神誥 本出於神市開天之世 而其爲書也. 盖以執一含三 會三歸一之義 爲本領)”


「삼일신고」의 근본 강령綱領“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온다[會三歸一]”는 것이다. 이는 ‘삼수논리’의 근간이 되는 ‘일一’과 ‘삼三’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즉 ‘집일함삼’의 약자는 ‘일삼一三의 논리’로 ‘하나’가 각기 ‘셋’으로 분화됨을 말한 것이고, ‘회삼귀일’의 약자는 ‘삼일三一의 논리’로 ‘분화된 셋’이 모여 원래의 ‘하나’로 돌아가 통일統一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집일함삼’과 ‘회삼귀일’의 사유를 담은 ‘삼수논리’는 곧 ‘일체삼용一體三用’의 논리로 정착定着한다. 

‘일체삼용’이란 ‘하나의 체[一體]’와 ‘셋의 쓰임[三用]’이란 뜻으로, ‘체’와 ‘용’에 대한 필연적인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집일함삼’은 온전하게 존재하는 근원적인 ‘하나의 본체[一體]’가 ‘세 손길로 작용하여 자신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드러낸다[三用]고 보는 사유방식이고, 


반면에 ‘회삼귀일’‘세 손길로 작용하여 현실적으로 드러낸 모습[三用]’이 곧 ‘하나의 본체[一體]’로 귀환한다고 보는 사유방식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체삼용’의 논리는 언제부터 정착되어 오늘에까지 문화적 유전자로 전해지게 된 것일까?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에 의거해보면, ‘일체삼용’의 원리는 「삼일신고」가 출현한 태고의 문명 개창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신시시대에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가 도를 통한 후에 아사달에 와서 제천행사를 보고 예식이 끝난 후에 찬송하는 글에서 그 연원을 확인할 수 있다.


발귀리는 “송가頌歌”에서

“셋은 하나를 그 체體로 하고, 하나는 셋을 그 용用으로 한다. 유무의 혼합과 허조의 오묘함이 하나로 순환하고, 체와 용은 갈라짐이 없음(三一其體 一三其用 混妙一環 體用無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말한다.


그런데 ‘삼일기체’는 「삼일신고」의 강령인 ‘회삼귀일’과 같은 의미이고, ‘일삼기용’은 ‘집일함삼’과 같은 의미이다. 이들의 의미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 ‘일체삼용’의 논리이다. 즉 ‘회삼귀일’과 ‘삼일기체’, ‘집일함삼’과 ‘일삼기용’은 결국 ‘일체삼용’의 논리에 대한 두 가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체삼용’의 논리는 인식론認識論과 존재론存在論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집약된 인식론은 두 줄기, 즉 연역적演繹的 사유방식과 귀납적歸納的 사유방식이 있다.


하나의 본체가 세 손길로 작용하여 자신을 현실적으로 드러냄을 밝히는 ‘집일함삼’과 ‘일삼기용’은 연역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고, 반면에 세 손길로 작용하는 현상의 근원을 찾아 그 본체를 밝혀 정의하는 ‘회삼귀일’과 ‘삼일기체’는 귀납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존재론의 사유방식은 본체론本體論과 현상론現象論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집일함삼’과 ‘일삼기용’은 근원의 존재[一者]를 밝혀 현상의 많음[多者]을 인식하는 논리이고, ‘회삼귀일’과 ‘삼일기체’은 거꾸로 많음의 근원을 추적하여 하나의 본체를 찾아가는 논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근원의 본체가 무수하게 분화되어 현상의 모든 것들이 전개되어 나감을 설명하는 방식이고, 후자의 경우는 현상의 모든 것들이 결국 근원을 찾아 본체로 돌아감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동양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일체삼용’의 논리는 단순한 체용론體用論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체’는 주체 또는 본체의 의미이고, ‘용’은 그 본체의 쓰임 또는 작용을 뜻한다.


주체로서의 본체는 독립적이고 자존하는 것이지만, 작용으로서의 쓰임은 본체에 귀속해 있다. 이 말은 본체란 작용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작용은 본체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래서 작용은 항상 본체에 의거해서 일어나고, 그 본체의 내용을 현실적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승언은

“일반적으로 체는 근본적이고 내재적인 것이요, 용은 체가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다. 체가 독립적이긴 하지만 용에 의해 드러나고, 용은 체에 귀속되므로 상호작용 관계를 통해 형이상학적 존재를 설명할 수가 있다.”(『천부경 철학연구』)고 말한다.


따라서 체용론은 본체本體와 작용作用의 관계를 따짐으로써 존재를 탐구하는 방식, 즉 근원의 존재와 이로부터 출범하는 현상의 관계를 밝혀내는 논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체용론’에서 보듯이, ‘일체’와 ‘삼용’은 논리적인 구분이지, 실제로 각기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점을 발귀리는 ‘송가’에서 “체와 용은 갈라질 수 없음[體用無岐]”을 극명하게 천명闡明하고 있다.


만일 근원의 ‘본체’만 있고 현상으로 드러나는 ‘작용’이 전혀 없다면, 이는 아무런 내용이 없어서 존재 의미가 없게 되고, 반면에 만일 현상의 ‘작용’만 있고 근원의 ‘본체’가 없다면, 이는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어서 맹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체용무기’의 뜻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소’, ‘말’, ‘돼지’, ‘개’, ‘인간’ 등의 서로 다른 여러 종種이 있다고 하자.


이들 각각의 종의 개념은 수적으로 ‘하나’이고, 그 본체 또한 각기 ‘하나’이다. 만일 ‘인간’이라는 하나의 본체가 세 부류, 즉 현실적으로 ‘황색인’, ‘백색인’, ‘흑색인’으로 나뉘어 드러난다.


그럼에도 나누어진 세 부류의 인간은 모두 한결같은 ‘인간’이다. 그것은 하나의 본체가 세 부류의 인간들에게 각각 동일하게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라는 본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세 부류로 나뉘어 드러난 인간 안에는 ‘인간’이라는 본체가 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황색인’, ‘백색인’, ‘흑색인’은 ‘인간’인지, ‘개’인지, ‘돼지’인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된다.


역으로 인간이라는 ‘본체’가 오직 관념적觀念的으로만 실존하고, ‘황색인’이나 ‘백색인’이나 ‘흑색인’으로 나뉘어 드러나는 사태事態(작용)가 현실적으로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또한 그러한 면모의 ‘인간’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결국 ‘인간’이 실존한다는 의미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삼용’의 논리는 하나의 본체 안에 세 가지의 작용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고, 이것이 작용하여 현실적인 세 가지로 드러날 때에는 본체가 각기 내재하여 감싸고 있다고 보아야 마땅하다.


‘일체삼용’의 논리는 인류 최초의 경전으로 불리는 「천부경」에서 연원淵源한다.

「천부경」은 맨 첫머리에서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임[一]을 정의하고, 이어서 “(근원의) 하나가 삼극으로 나뉜다 하더라도 그 본체는 다함이 없다(一析三極 無盡本)”고 한다.


여기에서 ‘하나’가 ‘세 가지 지극함’으로 나뉜다[一析三極]는 것은 하나의 본체가 세 기능으로 작용하여 드러남을 나타낸다. 즉 ‘하나의 본체’가 각기 ‘하늘[天], 땅[地], 인간[人]으로 분화되어 작용하지만, 그 본체는 동체同體이고,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대로 존속한다[無盡本]는 것이다.


「천부경」에서 “하늘도 하나, 땅도 하나, 사람도 하나[天一 地一 人一]”라는 뜻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천부경」의 ‘일석삼극’은 곧 ‘집일함삼’이나 ‘일삼기용’과 같은 논리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천부경」에서 “하나의 본체가 오묘하게 뻗어나가 온갖 것들이 오고가지만, 그 쓰임[用]은 부동의 본체로 바뀐다(一玅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고 할 때, ‘용변부동본’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회삼귀일’이나 ‘삼일기체’와 같은 논리로 파악될 수 있다.




「삼일신고」에서 밝히고 있는 ‘일체삼용’의 논리는 후대의 문화역사관의 사유방식을 고착화하는 데에 근저根柢가 되었다. 이에 대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측면, 인성론적인 측면, 종교론적인 측면에서 간략하게 압축하여 제시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천부경」은 우주만물의 중심축이 되는 ‘삼일론三一論’이 핵심이다. ‘삼일론’은 근원적인 ‘하나’의 본체가 ‘세 손길’로 작용하여 ‘하늘’, ‘땅’, ‘인간’으로 드러난다는 것인데, ‘천일天一’, ‘지일地一’, ‘인일人一’이 그것이다.


『주역』 「계사 하」는 우주만물이 변화해가는 길[道]을 밝히고 있는데, ‘하나’의 본체가 ‘하늘의 도[天道’, ‘땅의 도[地道]’, ‘인간의 도[人道]’로 분석되는 ‘삼재지도三才之道’가 그것이다.


『정역』에서는 존재론적인 원리인 삼극의 이치[三極之理]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생명창조의 바탕이자 완성을 통칭하는 무극無極, 음양에 의한 창조변화의 근원이 되는 태극太極, 우주만물을 질서 있게 주재하는 황극皇極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삼일론’, ‘삼재지도’, ‘삼극지리’는 모두 ‘일체삼용’의 논리에서 비롯된 형이상학적인 원리들이다.


인성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중용中庸』은 인간이 갖추어야할 천하의 달덕[天下之達德]을 말한다. 그것은 진리를 깨우치는 지知, 타인과의 관계에서 너그러움을 실천하는 인仁, 모든 관계와 방향에서 부끄러움을 알아 절도에 맞는 용勇이다.


서양철학의 거장 플라톤(Platon)은 가장 정의正義로운 인간의 덕목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데아를 인식하기 위해 깊은 사고능력으로서의 이성의 덕(지혜智惠), 이성에 따라 신체적인 욕구를 조절하는 의지의 덕(용기勇氣), 신체로부터 욕구하는 욕망의 덕(절제節制)으로 분석된다.


그리고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에 나오는 신神의 창조적 덕성으로 대덕大德, 대혜大慧, 대력大力을 말하든가, 신으로부터 내려 받은 ‘삼진三眞’으로 진성眞性, 진명眞命, 진정眞精을 말하든가, ‘삼혼三魂’으로 영혼靈魂, 각혼覺魂, 생혼生魂을 말하든가, 이들 모두는 ‘일체삼용’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종교론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동북아 한민족의 고유한 신앙문화에서 볼 수 있는 삼신일체의 도[三神一體之道]를 거론할 수 있다. 이는 본체로서의 ‘일신一神’이 세 손길, 즉 조화造化의 도, 교화敎化의 도, 치화治化의 도로 작용함을 뜻한다.


서양의 중세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말하는데, 이는 창조주인 아버지 하나님인 성부聖父, 구세주인 아들 하나님인 성자聖子,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는 영적인 하나님인 성신聖神]으로 분석된다.


인도의 힌두교는 삼신일체三身一體를 주장한다. 스스로 존재하면서 세계의 창조를 담당한 브라흐마(Brahma), 세계의 질서유지와 보존을 담당하기 위해 화신하는 비슈누(Vishnu), 종말의 시대에 우주의 파괴와 재창조를 담당하는 쉬와(Shiva)가 그것이다.


불교에는 삼신불三身佛이 있는데, 깨달음의 경지, 진리 그 자체를 그대로 드러낸 법신불法身佛,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보신불報身佛, 중생과 같은 몸으로 세상에 출현하여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응신불應身佛]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삼신일체三神一體’, ‘삼위일체三位一體’, ‘삼신일체三身一體’, ‘삼불일체三佛一體’ 등도 모두 ‘일체삼용’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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