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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하이데거의 사랑 (1) - 사랑이 없으면

2020.09.03 | 조회 741 | 공감 0

하이데거는 사랑을 말했을까

1) 사랑이 없으면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필자는 가톨릭 소속의 ‘살레시오 수도회’가 설립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 수도회는 성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가 창설한 단체로서 가난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을 교육하며 신앙 여정을 동반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살레시오’란 명칭은 ‘자애로운 성인’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수도회는 우리나라 외에도 전 세계 130여 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




1, 2학년 때의 교과 과정에는 ‘종교’ 시간이 들어 있었다. 종교 수업, 특히 1학년 때의 종교 수업 시간에는 유난히 노래를 많이 배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를 지도한 선생님은 원선오(Vincenzo Donati) 신부님인데 이탈리아인이었다.


글머리에 소개한 구절은 원 신부님이 직접 작곡한 ‘사랑이 없으면’이란 노래에 들어있는 가사이다. 이 노래를 포함하여 그분이 작곡한 다수 노래가 ‘가톨릭성가집’에 실려 있다. ‘사랑이 없으면’에는 당연히 다른 가사들도 들어 있으련만 유난히 이 부분만 생각난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부르고는 한다.


이 외 또 기억에 남는 노래 가사로는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 어둠에 잠겼사오니 우리와 함께 주여 드시어 이 밤을 쉬어 가시옵소서.”가 있다. 필경 성경에 나오는 어떤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지만, 필자는 그 노래를 부를 때면 해가 저무는 고즈넉한 시골의 모습을 연상하고는 했다. 그 때는 서산에 노을이 고왔다.


신기하게도 이 외국인 신부님은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이름을 금방 외웠다. 몇 백 명 학생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는 데는 한 달도 안 걸렸던 것 같다. 게다가 당시 교복에 단 명찰의 이름은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이 ‘작은’ 기적은 명민하고 음악적 재능이 탁월하셨던 신부님이 학생들과 빨리 소통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한 결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그분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신부님은 나에게 신부가 될 것을 권유했다.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나중에는 다른 한국인 신부님도 같은 바람을 내게 얘기했다. ‘어떤 점에서 나에게 신부를 기대하는 것인지?’


18, 19세 피 뜨거운 사춘기 남학생에게 독신으로 살라 하다니. 그때는 신부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기보다 그 생각이 앞섰다. 싫다는 이유도 말할 수 없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던 것 같다.


졸업 후 30년이 넘도록 소식을 모르다가 몇 년 전 우연히 TV에서 이분의 근황을 접했다.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울지마, 톤즈’로 유명한 고故 이태석 신부님의 일을 맡아 하고 계신 것으로 언뜻 소개된 것 같다.


알고 보니 원 신부님은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인 1982년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더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 한국을 떠나 케냐로 가셨고 그 후 1994년 더 열악한 남수단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신부님은 절대적 빈곤과 혼란으로 시달리는, 세계 최빈국인 그곳에서 미래를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교육이라 여기고 100개 마을학교 건립 운동을 전개하셨다. 그래서 고 이태석 신부님과의 관계를 좀 더 분명히 하면, 원 신부님이 미리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수단에서 처음 봉사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야고보 수사(왼쪽), 원선오 신부(가운데), 고 이태석 신부(오른쪽), (출처 :살레시오 수도회)


이 신부님 또한 원 신부님과 같이 살레시오 수도회 소속이었다. 그 사이 ‘봉사는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동화同化되는 것’이란 진실된 자세와 따뜻한 마음으로 오직 선교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던 원 신부님은 ‘살아 있는 성자聖者’로 불릴 만큼 존경과 지지를 받고 계셨다.


사적私的인 얘기가 길었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아마도 살면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큰 목소리로 ‘사랑’을 부르게 했던 그 분을 기억하고 싶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갈 때다.



하이데거는 사랑을 말했을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가? 심지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도 한다. 이는 단순히 사랑 혹은 하느님이 그만큼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한 수사修辭일까? 아니 정말로 사랑은 인간으로서의 내가 가진 전부이고 하느님은 곧 사랑이라면 왜 그런 것인가?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글이 하이데거와 관련해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또 묻는다. 하이데거는 사랑을 말했을까? 우리가 특별히 하이데거의 대답이 궁금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인간의 본질에 천착했고 그리고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됨, 인간 본질과 무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기대와 달리 혹은 기대대로 그는 사랑을 학문적 담론의 대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그의 저술들에서 사랑이 주제적으로 다뤄진 적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선뜻 수긍하고 넘어가기에는 하이데거는 ‘사랑’없이 사랑을 자주, 어쩌면 어떤 사상가보다도 빈번하게 말했다.


Sorge(염려), besorgen(배려하다),

fürsorgen(심려하다),

bergen; verbergen(간수하다, 감싸다),

verwahren; hüten; schonen(지키다, 돌보다),

Gehör(청종), andenken; besinnen(회상하다, 숙고하다),

danken(감사하다), reichen(내주다),

zugeben; zulassen(인정하다, 수락하다),

vereignen(자기 것으로 삼다; 고유화하다),

übereignen(내맡기다), zueignen(바치다), wohnen(살다) 등. 


비교적 우리 논의와의 상관이 두드러져 보이는, 일부 단어들만을 열거해보았다. 이 개념들은 하이데거가 사상의 핵심을 밝히는 문맥에서 등장하는 것들이다. 그 만큼 하이데거의 “근본어”라 할 이 개념들은 사랑이거나 사랑의 방식을 함의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랑이 해라면 그것들은 해에 속하는 혹은 해 자체인 햇살일 터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이와 같이 ‘지키고’ ‘돌보고’ ‘감사하고’ 등 사랑의 행위들을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데 주저 없이 적용하면서도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말했다?!’ 이런 다소 모호한 상황에서 논의의 진전을 보기위해서는 사랑이 무엇인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받는 자가

그 자신이 되도록 베풀고 지키는 데 있다.

자식, 제자, 피조물, 나라, 연인, 정원의 꽃 … 등 모든 사랑의 대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되어야 할 바대로 있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또 하이데거는 구원, 다시 말하면 살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단지 위험에서 건져내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본래 어떤 것을

그 고유한 본질로 자유롭게 놔둠을 의미한다.”

(Vorträge und Aufsatze)

그래서 구원, 살림은 사랑의 행위이고

사랑은 ‘~을 본질로 있도록 지킴’이다.


이런 규정에 따르면 한민족 상고 시대 나라를 열었던 홍익인간의 이념 또한 구원이며 살림, 즉 사랑이다.


홍익인간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때 이로움은 단지 인간을 위기에서 구하거나 그의 권익과 복지를 늘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실질적 이로움을 포함하여, 아니 그것을 능가하여 인간을 근본적으로 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을 비로소 그 자신으로, 즉 저의 참됨으로 있도록 돌보고 간수하고 지켜주는, 즉 살리는 일이다.


환웅이 ‘웅녀’에게 그랬듯, ‘사람꼴’[人形]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웅족의 ‘사람’은 환웅의 홍익인간으로 마침내 사람다워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홍익인간은 살림이며 사랑이다.


또 유익함, 이로움[利], 쓸모 있음을 선善, 즉 소망스런 것이라고 한다. 홍익은 널리 이롭게 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이 인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과 그 밖의 모든 것[人物]을 망라한다. 접하는 모든 것을 살리는[接化群生] 것이다. 이 경우 홍익인간은 가장 큰 사랑이며 최고의 선이다.




사랑이 지닌 또 다른 성격은 사랑은 그 자체로 있으면서 또한 동시에 타자와의 관계 속에 존립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즉자대자적卽自對自的인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통해 그 사랑 안에서 완성된다.


사랑은 두 개별자에 제 3의 것으로서 덧붙여지는 모종의 관계가 아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랑의 관계가 부가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으로 하나의 연대를 이루며 그 안에서 서로는 자신의 고유함, 참됨에 이른다. 그래서 “사랑은 이원성의 의미이자 목적”(I AM THAT)이란 말의 뜻도 거기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에서 유감스럽지만 일방적인 짝사랑, 맹목적 헌신의 순정 혹은 치정, 어쩌면 내리사랑까지 응답 없는 사랑은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아니다.


상대를 위해 나를 포기하는, 상대에 대한 더 큰 사랑 속에 내가 지워져 가는 것이 사랑일까? 그런 관계는 내가 나 되는 것도 억압하지만 상대방이 그 스스로가 되는 것도 막는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의 연대 안에 서로의 개별성이 간수되고 지켜지는 것, 나아가 오직 하나를 이루는 동화同化 안에서 비로소 서로가 마침내 그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짓고 그것들이 고유하게 있도록 주재하는 인격적, 비인격적 신성의 본질은 사랑이다. 그 최고의 신성을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다.


우리를 이윽고 참되게 있도록 구원하는, 즉 사랑하는 하느님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니 사랑이신 하느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한편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주어진 제 본성을 실현하는 사람과 사물이 없으면 하느님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랑의 하느님도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게 될 것이다.


플라톤과 더불어 형이상학으로서의 서구 철학을 틀 지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그런 의미의 사랑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따르면 형상과 질료(즉, 물질이나 육신)로 구성된 개별자들은 순수 형상에 대한 열망으로 살아간다. 순수 형상은 질료의 제약을 받지 않기에 모자라거나 미치지 못하거나 변하거나 왜곡되지 않는 참된 것이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다.


그러나 순수 형상을 욕망하는 개별자의 사랑은 끝내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들이 숙명적으로 안고 있는 육신과 물질의 질료가 그를 병들게 하고 썩게 하고 온전한 형상 실현을 방해한다. 그것이 질료를 지닌 모든 개별자들의 쓰라린 유한성이다.


반면 신적인 순수 형상은 질료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불에 타지도 썩지도 않는다. 이는 곧 순수 형상은 정신이란 얘기다.


정신이 하는 일은 사유이다. 순수 형상은 오직 스스로를 사유할 뿐이다. 그를 향한 사랑으로 개별자들이 살고 죽는 것은 그들의 몫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는 적어도 서로의 연대를 통해 서로를 완성하는 사랑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글이 문제 삼고 있는, 또 한 사람의 서구 철학자 하이데거에게는 사랑이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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