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 종교와 도道
  • 9천년 역사문화
  • 지구촌 개벽소식
  • 미래문명
  • 건강한 삶
  • 상생칼럼
  • 웹툰
  • English
  • 기타

[철학에세이] 하이데거의 사랑 (2) - ‘존재하게 함’의 사랑

2020.09.11 | 조회 312 | 공감 0

하이데거는 사랑을 말했을까 2)

‘존재하게 함’의 사랑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앞에서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을 본질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또 언제나 서로 안에서, 서로를 통해 완성된다고 밝혔다. 우리는 그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에게서 사랑을 구한다.


Hans Kock은 1996년 하이데거 학회에서 발간한 연보[Erinnerung an Martin Heidegger(『하이데거에 대한 회상』)]에서 사랑과 관련하여 하이데거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하이데거를 통해 사랑을 듣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당시 하이데거는 생텍쥐페리를 인용하면서, 사랑이라는 말을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존재케 하라.’는 의미의 ‘존재하게 함(Sein-lassen)’이란 자신의 용어를 통해 해석했다고 한다.(참조 「현대기술문명 하이데거 프로」)


이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우리가 규정한 바처럼 사랑을 사랑하는 대상으로 하여금 그것의 고유함, 참됨, 즉 그 자체에로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사유에서 ‘존재하게 함’이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존재하게 함’은 그의 방식으로 사랑을 말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설명은 곧 이어질 것이다.




반면 Johannes B. Lotz는 Vom Sein zum Heiligen(『존재에서 성스러움으로』)에서 하이데거가 존재자가 존재하도록 수락하고 내주는 등 존재의 호의나 은총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서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이데거의 존재로부터는 신이 나오지 않고 그러는 한 사랑할 수 있는 인격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형이상학적 방식, 즉 근거를 캐묻는 표상적 사유방식으로는 하이데거의 존재에서 신이 나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근거가 아니며 더욱이 신이 아니다.


서구 형이상학에서는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면서 그 자신의 원인은 자기 밖에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스스로가 자기 존재의 원인인 최고의 존재자[causa sui]가 신의 자리를 차지한다.


하이데거는 이 형이상학의 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신에게는

우리는 기도할 수도 없고 자신을 바칠 수도 없다.

causa sui 앞에서 두려움으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춤출 수도 없다.”

[Identität und Differenz(『동일성과 차이』)]


하이데거는 아마도 그런 배경 아래서 신에 관한 한 정직한 철학이라면 무신론의 입장을 취한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철학적 연구는 무신론이며 무신론으로 남는다.

오직 철학이 적절하게 무신론일 때 신 앞에 정직하다.

[Prolegomena zur Geschichte der Zeitbegriffs

(『시간 개념의 역사에 대한 서설』)]




하이데거는 심지어 ‘기독교 철학’이란 ‘둥근 사각형’이란 말처럼 모순된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형이상학 입문』)]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당시의 현실을 ‘이미’ 가버린 신들과 ‘아직’ 오지 않는 신들이라는 이중의 부재不在에 놓인 궁핍한 시대로 파악하면서, 존재에서 신을 눈짓하는 성스러움의 흔적을 본다.


“존재의 진리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신성이 지닌 본질의 빛 속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가리켜야 하는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

[Über den Humanismus(『인문주의 서한』)]


‘신적인 것’은 하늘, 땅, 인간과 함께 세계로서의 세계를 이루는 것으로 사유된다. 그 네 가지 것의 단일한 어울림에서 사방(Ge-viert)으로서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 밖에 하이데거는 사후 공개를 약속하고 진행된, 독일의 저명한 슈피겔 지誌와의 인터뷰에서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밝힌다. 


무엇보다도 니체를 통해 형이상학의, 그리하여 기독교의 신 죽음이 선고된 이후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의 참됨으로 돌아서면서 새롭게 신이 출현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가 변화될 때,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간소한 설명을 통해 신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존재에서 신이 나오지 않기에 사랑이 없다는 주장은 하이데거에게 아주 공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만큼은 드러나고 있다고 하겠다. 




이제 하이데거의 사유, 특히 ‘존재하게 함’의 사태 자체로부터, 구체적으로는 존재와 한 특출한 존재자인 인간의 관계에서 그의 사랑을 확인해보자. 둘의 관계는 사랑일까? 먼저 인간의 편에서 보자.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는 발현이다. 발현이 존재의 의미이고 본질이며 진리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이미 함의돼 있다.


하나는 발현이란 언제나 은닉이나 어둠으로부터 밝게 솟아나는 것이란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발현은 환히 트이는 사태이기에 그 밝음을 담을 혹은 그 밝음이 머물 장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장은 인간의 사유 혹은 사유하는 인간이다. 


왜 인간의 사유가 존재의 밝게 트임이 머무는 개방성이 될 수 있는가?

사유는 본래 사유거리로 끊임없이 마음을 모아 그것을 간수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유거리는 우리 가까이 머물게[현존; Anwesen] 된다.


여기서 ‘마음으로 모아 앞으로 나아감’은 동시에 ‘뒤로 물러섬’이 ‘~이자 또한 동시에 ~인’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유거리[여기서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 불러 모음은 그것이 이윽고 그 안에서 현존하도록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 맞아들임은 뒤로 물러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는,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앞으로 향하는 역동적, 원환적인 사유 구조로부터 개방된 자리가 열린다. 그럼으로써 사유는 존재가 요구하는, 즉 발현으로서의 존재가 현성現成하는 장이 된다.


이로써 사유가 존재를 향해 자신을 바치는 것은 존재로 하여금 그 자체로 있도록 지키고 살리는, 즉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며 인간에 대한 존재의 부름은 강압적인 게 아니다. 하이데거에서 인간의 본질은 존재에 대한 상응에 있다. 인간은 존재에 대한 상응이며 다만 그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존재를 향해 그 진리의 개방성으로서 자신을 바치는 사랑은 또한 자기 자신의 본질을 얻게 되는 일이다.


인간의 사유를 자기 진리의 장으로서 쓰는 존재의 소환은 인간의 편에서는 이윽고 저의 본질로 있도록 하는 호의나 은총, 즉 사랑이다. 




존재와 인간은 이렇게 서로 내맡기고 바치면서 서로 속하고 그 하나의 연대 안에서 서로 고유함에 이른다.


존재는 인간의 사랑을 통해 발현으로서 참되게 머물고, 인간은 존재의 사랑 안에서 그 발현의 ‘그릇’이 되어 존재를 지키고 살리는 ‘존재의 이웃’, ‘존재의 목자’로서의 제 본질을 구현하게 된다.


이 사랑 안에서 그것과 함께,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 역시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사랑으로 얽혀 저의 본질로 있으니, 사랑은 ‘관련의 관련’, ‘관련 자체’이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통일하는 하나[一者], 존칭하여 부르면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혼돈만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하이데거의 사랑을 기독교의 사랑에 가까운 것으로 보기도 한다. 기독교의 사랑 역시 신과 인간이 사랑 안에서 개성을 잃거나, 예컨대 더 큰 사랑을 위해 자신을 버리거나 함이 없이, 제 본질을 지키며 하나의 연대를 이루는 것이다.


또 그 점에서 하이데거의 사유는 도道나 무無, 공空의 진여眞如에 자신을 합일하는, 말하자면 절대자에 ‘먹혀’ 절대자로 동화되는 것을 지향하는 인도 사유나 선불교, 도가 사상과 비교되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자 하나인 근원적 실재 안에 가라앉는 합일[니르바나, 해탈, 삿토리 등]은 자신의 비움과 버림[無自性]과 함께 이뤄진다. 그러는 한 여기서는 나와 타자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어느 것도 어느 것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하이데거는 하나며 모든 것인 통일성 안에서, 오히려 그것을 통해 각자는 각자의 고유함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하이데거에서 연대나 합일이 ‘선물’과 같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저 동아시아 사유가 말하는 그것은, 물론 단박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엄격한 수행과 금기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로써 하이데거의 사랑, 말하자면 존재론적 차원의 사랑은 상대를 비로소 그의 참됨으로 있도록 지켜 주는 것임이 확고히 드러난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들은 그 사랑을 통해 저의 본질에 이른다. 사랑의 확고한 연대 안에서 하나로 어울리되 자기를 상실하는 법이 없이, 오히려 그것을 통해 비로소 각자의 고유함, 참됨을 얻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에서도 사랑은 모든 것이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침묵으로써 사랑을 얘기했다. 충분히.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1개(1/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