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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세이] 파르메니데스 (1)

2020.10.23 | 조회 3498 | 공감 0

시원의 사상가 파르메니데스 

 -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 (1)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파르메니데스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낙시만더, 헤라클레이토스와 함께 시원적 사상가다. 시원적 사상가란 시원적인 것을 경험한 이다. 그리고 시원적인 것이란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상주常住하는 것으로서, 시원에 사유돼야 할 것이었고 사유된 것인 존재를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무無가 아니고 혹은 없지 아니하고 오히려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경이 속에 존재를 존재로서 숙고했다. 즉 존재를 다른 무엇이 아닌 그 자체로서 다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통해 형이상학의 역사 속에 이렇게 저렇게 규정된 외피를 뚫고 존재와 그에 대한 사유를 ‘민낯 그대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파르메니데스는 다음의 시구詩句에서 자신의 시원적인 존재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 


‘크레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 에온 엠메나이
(χρὴ τὸ λέγειν τε νοεῖν τ’ ἐὸν ἔμμεναι).’


이 시구는 흔히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해지고 사유될 필요가 있다’고 해석된다. 하이데거는 이 당연하게 여기는 해석에 갇힌, 존재에 대한 시원적 경험을 해방시키려 한다.


그를 위해 먼저 방법적으로 시구를 이루는 단어들을 따로 떼어낸다. 크레(필요하다) :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말함과 마찬가지로 또한 사유함) : 에온 엠메나이(존재자의 존재)이제 이 단어들을 차례대로, 다시 말해 동사, 목적어, 주어의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크레(씀)

크레는 시원적으로 ‘사용하다, 필요로 한다. 필요로 해서 쓰다(brauchen, gebrauchen)’란 뜻을 갖는다. 이때 ‘필요해서 쓰다’는 단순한 유용하고 착취하고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인 씀을 말한다.


그리고 하이데거에게 본래적 씀이란 “필요해서 쓰는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그 쓰이는 것을 본질로 있도록 하는”(Was heißt Denken?) 것이다. ‘필요해서 씀’은 “쓰이는 것을 본질에 들어서게 함이며 본질에서 지킴이다.”(Was heißt Denken?) 쓰이는 것을 비로소 그것의 고유함으로, 마땅함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망치를 떠올려보자. 망치는 철물 가게에 손님을 기다리며 전시돼 있자고, 혹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창고 한 구석에 방치돼 있자고 본래 있는 것은 아니다. 망치는 못을 박거나 무엇을 부수는 망치질에 ‘쓰일’ 때 비로소 그것의 본디 모습으로, 저의 본질로 비로소 있게 된다.


그러므로 쓰이는 것의 편에서 보면 [자기를] 씀이란 본질을 최고도록 실현할 수 있는 기회다. 씀은 쓰이는 것에겐 하나의 호의요 선물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시구의 머리에 나오는 ‘크레’를 그와 같은 의미의 본래적 씀으로 이해하고, ‘Es braucht’(그것은 필요로 한다, 필요로부터 사용한다)로 옮긴다.


그렇다면 필요해서 어떤 것[여기서는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말함과 마찬가지로 또한 사유함)]을 써서 본질로 데려가는 ‘그것(Es)’은 무엇인가? 앞서 밝힌 차례에 따라 그보다 먼저 ‘그것’에 의해 쓰이는 것, 즉 ‘레게인 테 노에인 테’의 사유부터 알아보자. 




2) 토 레게인 테 노에인 테(사유)

여기서 ‘레게인’(legein)은 통상적으로 ‘말하다’, ‘얘기하다’를 의미한다. 그에 상응하여 그것의 명사 로고스(logos)는 ‘말’, ‘말함’으로 번역된다. 이와 함께 ‘레게인’은 독일어 ‘레겐’(legen)과 같은 단어로서 ‘앞에 놓다’란 뜻을 갖는다.


‘레게인’의 두 의미 ‘말함’과 ‘앞에 놓다’는 언뜻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하고 얘기하는 것이 어떻게 수행되는지 보자. ‘말함’, ‘얘기함’이란 어떤 것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말하는 것으로 ‘(앞에) 제시하고’, ‘(앞으로) 꺼내고’, ‘(밖으로) 진술하는’ 것이다. ‘말함’은 곧 ‘앞에 내세움’, ‘내놓음’으로서 수행되는 것이다.  


이밖에도 ‘레게인’은 ‘모으다’, ‘주워 모으다’, ‘가려내다’, ‘읽다’ 등을 의미하는 ‘레센’(lesen)의 어원으로서 ‘불러 모으다’, ‘불러 모아 간수하다’의 뜻을 아울러 갖는다. 그런데 ‘읽다’로서 ‘lesen’은 어떻게 해서 'legein'에 유래를 두고 있을까?


‘읽는다’는 것은 ‘이삭 줍다’(Ähren lesen), ‘포도 수확’(Weinlesen)에서 ‘모음’(lesen)과 같은 의미로 문자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의미들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레게인’의 시원적 의미를 ‘앞에 세우다’(legen, vorliegen), ‘불러 모아 간수하며 앞에 놔두다’(das versammelnde Vorliegenlasen)로 옮긴다.


다음으로 ‘노에인’(noein)은 대개 ‘사유함’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단어의 본래적 뜻은 ‘받아들임’(Vernehmen)이다. 그러나 이때 ‘받아들임’ 단순히 수동적인 것만이 아니라 ‘앞에 붙잡아 둠’(Vor-nehmen)의 특성을 갖는다.


‘노에인’은 뒤로 물러나 대상을 받아들이되,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유의함에 두는”(in Acht nehmen)(Was heißt Denken?) 것이다. 여기서 유의함은 어떤 것을 그러한 것으로서, 좀 더 사태에 맞게 말하면 왜곡이나 훼손 혹은 망각됨이 없이 온전히 그렇게 있도록 지킴을 말한다. 사유하는 바가 비로소 그 자체로서 있도록 하는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노에인’이 모아들여 유의함에 두는, 즉 지키는 것이란 ‘레게인’에 의해 벌써 앞에 놓이고 불러 모여 간수된 것이다. 즉 ‘노에인’은 ‘레게인’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다.


반면 ‘레게인’에는 이미 그 자체 앞에 놓인 것을 지키는 ‘노에인’이 수행되고 있다. ‘노에인’은 ‘레게인’으로부터 전개되고 후자는 이미 전자로써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사유를 규정하는 ‘레게인’과 ‘노에인’은 그와 같이 서로에게서 번갈아 전개되는 방식으로 하나로 결속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단일함, 즉 ‘레게인’이자 또한 동시에 ‘노에인’이 “사유의 본질”(Was heißt Denken?)을 이룬다. 앞으로 나아가 사유거리를 내세우고 뒤로 물러서 그것을 받아들여 지키는 단일함에서 본연의 사유가 수행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섬의 통일성인 사유는 자기의 자유를 확대하려는 의지로부터 존재자를 수중에 장악하려 달려드는 표상적, 계산적 사유와 무관하다. 저 본질적 사유는 사유거리가 사유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고유함을 스스로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며 그 발현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내맡김에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 ‘무위’는 오히려 우리를 관여하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유거리 안으로 들어서서 그것을 그 자체로서 비로소 현성現成(性)하도록 한다.[우리가 이 글에서 곧잘 사용하는 ‘현성하다’는 말은 ‘본래(적으로) 머물다’와 함께 하이데거가 자주 쓰는 독일어 'wesen'이란 동사를 옮긴 것이다.]


사유의 본질 또한 쓰는 것의 씀과 마찬가지로 

‘본질로 있도록 함’, ‘고유하게 함’인 것이다.


이로써 ‘레게인 테 노에인 테’의 사유는 앞에 세움이자 받아들여 간수하는 지킴으로서 사유거리가 스스로 고유하게 현전하도록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아직 사유의 본질이 충분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다.


여기에 앞서 유예한 과제, 즉 ‘레게인 테 노에인 테’로서의 사유를 필요해 쓰는, 그래서 사유를 비로소 본질로 있도록 하는 것('Es')으로부터의 해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무엇이 자신의 필요로부터 사유를 쓰는가, 그래서 사유로 하여금 사유하게 하는가? 그것은 파르메니데스 싯구의 마지막에 놓인 ‘에온 엠메나이’이다.




3) 에온 엠메나이(존재자의 존재)

먼저 ‘에온’을 보자. ‘에온’은 나중에 ‘에’가 떨어져 ‘온’이 되는데, 독일어로는 분사를 명사화한 'Seiendes'로 번역된다. 그래서 ‘에온’, 즉 'Seniendes'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갖게 된다.


먼저 명사적 의미로 (존재하는) ‘존재자’를, 또한 동시에 동사적 의미로 ‘존재하는’ (존재자)’을 가리킨다. 동사적 의미의 ‘에온’은 ‘엠메나이’(‘존재하는’, ‘존재하다’), ‘에이나이’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Seiendes’[‘존재하는’이면서 또한 ‘존재자’]를 “모든 분사 가운데 분사”(Was heißt Denken?)라고 말한다.


예컨대 ‘꽃이 피는 것(Blühendes)’, 또 ‘흐르는 것(Fließendes)’은 말하지 않는 가운데 각각 한번은 명사적으로 ‘꽃이 피어 있는 어떤 것(Seiendes)’, ‘흐르고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또한 동시에 동사적 의미로 ‘꽃이 피어 있음(blühend-sein)’, ‘흐르고 있음(fließend-sein)’을 뜻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같은 분사들의 성격은 모든 분사 가운데 분사며 ‘유일무이한 분사’인 'Seiendes'의 양의성兩意性에서 연유한다. 분사 'Seiendes'란 하나의 말이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까닭은 애초에 그것이 가리키는 것 자체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Seiendes'의 양의성은 존재(‘존재하는’)와 존재자가 서로 다르면서도, 하나로 속해 있다는 데 기인한다. 다시 말해 ‘존재하는 존재자’에서 ‘존재자’는 ‘존재하는’[존재]에, ‘존재하는’은 ‘존재자’에 속한다.


이와 같이 존재자와 존재는 ‘서로 결속함으로써, 둘은 다르면서도 떨어짐이 없이 통일성을 이룬다.


이에 따라 파르메니데스의 시구의 문장 전체는 일단 이렇게 해독된다. ‘에온 엠메나이’, 즉 존재와 존재자의 단일함을 이루는 사태가  ‘노에인 테 레게인 테’, 즉 레게인과 노에인이 단일하게 얽혀져 있는 사유를 필요해서 쓴다.




그렇다면 ‘에온 엠메나이’는 왜, 또 어떻게 저 사유를 필요해서 사용하는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에온 엠메나이’의 사태에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서야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에온 엠메나이의 이중성은 존재의 비은폐로서 일어난다. 그는 에온과 엠메나이란 근본어들이 뜻하는 것을 “비은폐 안에서 열려 펼쳐지며 비은폐된 것에로 들어섬”, “비은폐의 머묾에 들어섬”(Was heißt Denken?), “빛 안에서 서 있음”, “열려 펼쳐지는 나타남”(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비은폐성으로 현존하는”(Holzwege) 등으로 밝힌다.


즉 이 단어들은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는, 스스로 환한 밝음에 들어서는 비은폐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서로 다른 존재와 존재자가 하나로 어울리는, ‘에온 엠메나이’의 이중성이란 밝게 트이며 빛나는 존재와 그 빛 안에 존재자로서 간수되는 존재자가 하나로 모여 있는 사태를 가리킨다.


비은폐라는 존재 규정은 그 자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함축한다. 먼저 존재의 비은폐는 언제나 은닉과 감춤으로부터 환히 드러나는 과정이며 사건이다. 존재는 은닉의 면사포, 부재不在의 어둠을 열어젖히고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또 그러는 한 존재는 언제든 어둠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다. 이는 발현과 은닉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와 부재[無]는 함께 속함을 말한다. 레테(망각, 은닉)와 알레테이아(비은폐)의 사이에는 “어떤 매개도 어떤 이행도 없다. 왜냐하면 둘은 그 자체 그들의 본질에 따라 직접적으로 서로 속하기 때문이다.”(Parmenides)


다른 하나는 존재가 자신을 열어 밝히는 비은폐로서 본래 머무는 한, 그리고 그 때문에 존재는 그 개현開顯의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존재는 스스로 밝게 트이는 개방된 여지(das Offene; die Lichtung; das Freie 등)를, 다시 말해 그와 같은 환히 밝힘[Anwesen]으로서 그 ‘현’(an; 거기에)’의 자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밝게 트인 개방된 장場은 이미 앞에서 제시됐다. 그곳은 사유, 본래적 사유이다. 사유는 ‘앞에 내세움과 간수하여 지킴’의 구조로부터, 다시 말해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서면서’ 존재가 그 자체로 머무는 진리를 위해 필요로 하는 자리를 내준다. 존재는 오직 사유의 열린 장에서 비은폐로서 현성한다.


이로써 하이데거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시구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존재는 비은폐라는 자신의 본질로부터

그 발현의 장이 되는 사유를 필요해서 쓴다.

이렇게 ‘이미’ 사유된 사실은

다시금 ‘아직’ 사유되어야 할 것을 지시한다.

그것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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