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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영 자서전『나의 근대사 회고』

2020.11.17 | 조회 412 | 공감 0

최태영의  《나의 근대사회고》


상생문화연구소 김현일 연구위원



최태영(崔泰永.1900-2005) 선생의 회고록이 작년(2019) 말 도서출판 눈빛에서 ‘최태영전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 전집은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 《나의 근대사 회고》는 자신의 어린 시절로부터 서울에서 받은 신교육, 그리고 일본에서의 대학생활과 귀국 후 법학 교수 생활을 회고한 것이다. 2권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는 자신의 한국사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3권 《한국 법철학 연구》도 제목과는 달리 한국의 상고사와 한국의 고유 사상에 대한 글을 주로 담고 있다. 


그 가운데 1권 《나의 근대사 회고》는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20세기 한국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한 인물을 접하게 된다.


최태영은 일제시대에 법학을 공부한 제1세대의 학자로서 해방 후 한국의 여러 법과대학 설립에도 관여하는 등 교육자와 법학자로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법학자이기는 하였지만 우리 한국상고사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서 연구를 하였다. 주류 사학계와는 다른 한국상고사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의 전기를 통해 우리는 20세기를 온전히 살다간 한 지식인의 삶을 목도할 수 있으며, 또 죽을 때까지 식민사학에 대항하여 한국고대사를 되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한 민족사학자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최태영의 삶

최태영은 대한제국기인 1900년에 태어나서 21세기에 들어선 2005년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황해도 은율군 장련의 천석꾼 집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을 일으킨 것은 조부인 최계준이었다. 최계준은 조선과 중국 일대를 다니며 벼·종이·인삼·포목 등의 장사로 부를 쌓았다. 그는 그렇게 번 돈으로 작은 목선 여러 척을 사서 장련과 안악, 진남포 등을 연결하는 해상운수 사업도 하였다.


이 운수사업을 정리하고 장련에다 큰 과수원도 마련하였다고 한다. 최태영의 말을 빌리면 자기 집안은 만석꾼인 오진사네 다음으로 장련읍의 둘째 부자였다고 한다. 논과 밭도 많았던 것은 물론이다.


조부는 서양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는데 그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자식들은 당연히 신식 학교에 보냈다. 최태영의 부친 최상륜은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세브란스 의전을 다녔다. 그러나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의전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서당과 야학을 열었다. 최상륜은 또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는데 상해 임시정부의 재정담당자로서 모금운동을 하다가 평양감옥에서 일년 반이나 옥살이를 하였다.


최태영은 장련에 세워진 광진학교에 여섯 살에 입학하였다. 앞에서 말한 장련의 만석꾼 오진사 오인형이 김구 선생을 모셔다가 세운 작은 사립학교였다. 책에 실려 있는 1906년에 찍은 사진에는 광진학교 교사 네 명과 20여명의 학생들이 나와 있다.



[1906년 여름 광진학교 학생과 교사들 - 최태영 사진]


최태영처럼 초등학생 정도 나이의 소년들 뿐 아니라 담뱃대를 문 청년과 장가들어 갓을 쓴 소년의 모습도 보인다. 또 소녀들도 있다. 그 사진에는 신교육이 시작된 대한제국기의 한 지방 사립학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학생 수는 처음에는 30여명이었으나 곧 100 명 정도로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강제병합이 되고 나서 일제는 조선교육령이라는 것을 반포하여 광진학교 같은 많은 사립학교들을 설비미달을 구실로 폐교시켜 버렸다.


광진학교 폐교 후 일본식 공립학교로 갈 수도 있었으나 최태영은 문화군 초리면 장구뫼에 있는 다른 사립학교를 택했다. 일제교육령에도 살아남은 학교였는데 장련에서 60리 떨어진 곳이라 하숙을 하였다. 11세 때 가서 일년 반 동안 그곳에서 공부하였는데 학교 이름은 ‘서명의숙西明義塾’이었다고 한다.


이곳도 김구 선생이 잠시 교편을 잡았던 곳이다. 학교는 구월산 자락에 있었는데 구월산에 환인·환웅·단군을 모시는 삼성사(三聖祠)가 있었지만 최태영이 방문하였을 때에는 건물은 헐리고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


종산학교 즉 서명의숙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초등학교였던 셈인데, 태영은 13세에 서울에 있는 경신학교에 들어가 중등교육을 받았다. 경신학교는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곳인데 지금은 혜화동에 있지만 당시에는 연지동에 교사가 있었다. 현재 기독교 여전도회관 자리였다고 한다.


당시 경신학교는 세브란스 의전도 운영할 정도로 잘 나가는 학교였다. 교사校舍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3층 건물이었다. 샤워시설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기숙사도 있었다.


교육내용은 오늘날의 중등학교 과정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단지 한글로 된 교과서가 없어 일본어로 된 헌책을 사용하였다. 최태영은 1917년 경신학교 12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였다. 105명이 들어왔으나 33명만 졸업하였다. 낙제를 하면 가차 없이 유급이나 퇴학을 시켰다. 그 가운데 7,8 명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경신학교 연지동]


1918년 메이지(明治) 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당시 메이지 대학은 오늘날과는 달리 작은 대학이었다. 법과와 행정과, 상과, 정치과만 있었는데 교수진이 나쁘지 않았다. 최태영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고학을 할 필요 없이 공부만 하였다. 법학은 말할 것도 없고 한문, 철학, 영어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법과 중에서 영법과英法科를 택했기 때문에 영어 강의도 있었다. 영어를 열심히 하여 영어교사 자격증도 얻었다. 연습 삼아 테니슨의 《이녹아덴》을 비롯한 여러 문학작품도 번역하였다고 하니 그의 영어실력은 상당하였던 것 같다. 


당시 일본대학은 예과 2년, 본과 3년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입학시험을 통하지 않고 들어와 1~3년 정도 공부하는 전문부도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전문부에 등록하였으나 태영은 본과까지 5년을 마쳤다.



[메이지 대학- 1928년]


1924년 한국에 돌아와 보성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당시에는 인재가 부족해서 대학만 나와도 대학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최태영은 모교인 경신학교의 영어 교사와 부교장도 겸임하였다. 1937년에는 경신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운영하던 학교를 많이 문 닫았는데 경신학교는 한국인에게 넘겼다. 최태영은 안악의 대지주인 김홍량, 김용진과 손을 잡고 경신학교를 인수하였다.


당시 그는 광산을 운영하고 있어 돈이 많았다. 함께 학교를 인수한 김씨들은 그의 처가 사람들이었다. 최태영은 황해도의 신교육을 주도하던 만석꾼 집안의 딸 김겸량과 1920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부인을 도쿄로 데려와 여학교에 입학시켜 같이 도쿄에서 지냈다.


경신학교는 77만원에 인수하였다고 하는데 학교부지를 총독부에 팔고 정릉에 3만평을 사들여 새로운 교사를 지었다. 정릉의 경신학교는 해방 후 장로교 측에 넘겼다. 이후 학교를 경영하는 일에는 손을 떼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였다.


보성전문학교에서는 강사로 1년 재직한 다음해 1925년 조선인 최초로 정교수가 되었다. 5년제 정규대학을 나온 학사여야 정교수가 될 수 있었다는데 당시에는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이 드물었던 것이다. 그는 보전에서 상법과 민법 등 다양한 법학강의를 하였으나 상법에 특히 치중하였다고 한다. 어음과 수표 같은 선진적 금융기법에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고대 서양의 법사상에도 관심이 많아 《서양법철학의 역사》라는 책도 나중에 내게 된다. 



[보성전문학교]

그는 보전 입학시험 역사지리 과목의 출제를 맡게 되었다. 당시 역사과가 없어 그 일을 맡게 되었던 것인데 그가 국사연구에 뛰어든 계기의 하나였다.

그는 1945년 보전 교수를 그만두게 되는데 다른 교수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보전을 떠났지만 곧 서울대학교 법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보전에서 21년간이나 재직했지만 보전의 후신인 고려대학과는 인연이 별로 없고 오히려 서울대와 인연이 깊었다.

서울대로 가기 전 부산대학을 세우는 일을 하다가 이춘호 총장의 부탁으로 서울대학교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가 맡은 법과대학은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 법학부를 합쳐서 만들었는데 곧 2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서울대학은 건물이 부족하여 동숭동에 있던 경성제대 건물을 놓고 문리과대학과 법과대학이 싸움을 할 정도였다. 최태영은 법학과 교수연구실을 문리대로부터 몇 개 탈취한 것을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서울법대에 와서도 국사 과목을 자원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오늘날 같으면 생각하기 힘든 일인데 그가 이전부터 한국사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법철학을 연구하다보니 한국의 법사상도 관심을 갖게 되었을 터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고대사 연구를 했을 것이다.

그는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해외한국학자료조사위원으로 위촉받아 일본의 여러 신사들을 돌며 유적지와 자료를 조사하였다. 또 한국학연구원이라는 모임도 만들어 송지영, 유승국, 윤내현, 손보기, 김성호 등과 함께 역사강연과 토론을 이어갔다.

10여년간의 연구의 결과로 나온 책이 《한국상고사입문》이었다. 이 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그의 친구인 이병도 박사와 공저로 낸 책인데 여기서 이병도 박사는 일생에 걸쳐 주장해온 설을 바꾸어 단군은 실재하였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권 《나의 근대사 회고》의 마지막 장은 ‘책과 더불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한국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여기에서 필자의 주목을 끈 부분을 인용한다.

“학계에서 《규원사화》는 믿으면서 《환단고기》는 아류라고 중요시하지 않는다. 나는 아류라고 보지 않는다. 《환단고기》에는 고려 때의 정치가이며 학자인 이암이 저술한, 단군 역사와 환국을 기록한 《단군세기》 같은 책이 포함되어 있다.

《환단고기》란 제목으로 묶인 5개의 역사서들은 국가적으로 보관되어 오던 비서秘書임에 확실하다. 민간에 널리 유통되지 않았다 해도 역대 왕조에는 이런 사료들이 귀중하게 보관돼 오는 게 전통이었다.

세종, 성종, 예종실록에서 《삼성기》 《삼성(비)밀기》 《조대기》 《고조선비사》 등이 비장되어 있었음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대체로 일본사람들이 태워서 없애 버린 여러 가지 문헌이자 《환단고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환단고기》가 허황하다고 보는 견해이나 일본 역사가들이 《환단고기》에서 일본 고대사와의 접점을 찾아 연구하는 것을 보고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환단고기》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454-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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