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 종교와 도道
  • 9천년 역사문화
  • 지구촌 개벽소식
  • 미래문명
  • 건강한 삶
  • 상생칼럼
  • 웹툰
  • English
  • 기타

[철학에세이] 기억하고 감사하며 (1)

2020.11.19 | 조회 366 | 공감 0

기억하고 감사하며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열린 장場으로서의 사유

1955년 하이데거는 고향인 메쓰키르히에서 동향인 작곡가 콘라딘 크로이쩌의 탄신 175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사유의 도피’와 ‘무사유無思惟’를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사정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이 ‘생각 없음’이란 계산함을 특성으로 하는 기획과 조사, 연구 등이 어느 때보다 광범하고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현실과 무관하다. 사유하기가 인간의 본질인 만큼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가 대지에 본래 있어야 할 바대로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서 우리가 ‘생각 없음’에서 돌아서 대면해야 할 사유, 우리를 이윽고 본질대로 살게 해줄 사유란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이에 대해 같은 물음을 제목으로 하고 있는 Was heißt Denken?에서 해명을 시도한다. Was heißt das Denken? 이는 통상 ‘사유는 무엇으로 불리는가?’ 혹은 ‘사유란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다시 말해 ‘사유란 무엇인가?’로 이해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 물음의 일반적 이해에 가려진 새로운, 그리고 그에 따르면 본래적인 물음을 이끌어낸다. ‘무엇이 사유를 불러내는가?’, 즉 ‘무엇이 우리를 사유하게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때 동사 ‘heißen’을 ‘~로 부르다’, ‘~로 불리다’란 대표적 의미에 앞서 ‘하도록 불러 세우다’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곧 ‘heißen’의 원래 의미는 ‘지시함(befehlen)’으로서 ‘~을 그것의 본질이나 마땅함에 맡기고 그렇게 이르고 간수하는 것’, ‘~을 불러 세워 본질로 있도록 이르는 것’이라고 밝힌다.


이제 이 같은 ‘heißen’의 본래적 의미를 고려할 때 ‘사유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 자체를 사유에 이르게 해서 그 안에 간수되도록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를 불러 사유함의 본질로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유하게 하는 것’에 대한 해명은 잠시 미루고 그렇게 불러 세워진, 인간의 본질로서의 사유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하이데거는 ‘사유’(Denken)란 말이 유래하는 고어古語 ‘Gedanc’를 실마리로 사유의 본질에 대한 해명을 시도한다. 그는 마음’, ‘심정’, ‘진심’ 등을 가리키는 ‘Gedanc’에 함축된 의미로부터, 사유를 “기억(Gedächtnis)”과 “감사(Dank)”로서 설명한다.


시원적인 옛말이 눈짓하는 것에 따르면 사유란 본래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란 주장이다. 여기서 기억은 단순히 무엇을 상기하고 보존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의 본질로서의 기억은 그것이 향해 있는 것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을 모아 그리로 머무는 것[關注]을 말한다.


기억은 사유거리로 “마음을 불러 모으는 것(Die Versammelung des Denkens)”(Was heiußt Denken?)으로서 규정되는 것이다. 기억은 그것이 머물며 붙잡는 사유거리를 우리 ‘가까이’ 현존現存하게 한다. 마음을 모음인 기억을 통해 사유거리들은 간수된다. 기억은 사유거리를 지키는 데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은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노래한다.


내가 정녕 마음에서 놓지 않고 간직하며 부르는 꽃은 꽃집의 꽃이나 공원에 핀 꽃보다 더 ‘현실적이다’. 우리가 기념하고 숭모하는 대상은 길거리에 스쳐 지나간 어떤 사람보다, 또는 내 앞 책상 위 컵이나 사물보다 ‘더 있다.’ 내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한, 다시 말해 내가 끊임없이 마음으로 모아 간수하고 지키는 한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내 가까이 현존한다.




이로써Gedanc’가 여전히 지시하는 본래적 사유란 마음을 모아 간수하여 지키는 기억의 사유이다. 이때 사유는 단지 능동적이거나 단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거리를 향해 마음을 씀’과 ‘물러서 그것을 받아들여 간수하는 지킴’이 ‘~이자 또한 ~인’의 방식으로 서로 결속해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섬이 서로 향하고 속하면서 사유는 열린 장, 개방성으로 트인다. 다시 말해 그런 역동적, 원환적 구조로부터 사유는 사유거리가 머무는 자리(das Offene)를 내줄 수 있다. 사유는 스스로 그 개현開顯의 장(das Offene; die Ortschaft)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개방된 자리에 ‘사유하게 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머물도록, 내게로 향한 꽃이 꽃으로서 있도록 오롯이 지키는 것이다.


또 하이데거는 사유의 시원적 의미인 “마음을 모음”(An-dacht)은 경건함이란 특별한 음조를 갖고 있으며 기도할 때의 마음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사유의 기억은 “이미 성聖스러운 것, 은혜로운 것으로 마음을 모음”(Was heiußt Denken?)과 본질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이는 다시금 사유란 사유거리로 끊임없이 마음을 모아 그것을 간수하여 지킴이란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와 함께 사유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이르는 것은 성스러움을 품고 있으리란 점을 넌지시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중용』에서 “천하의 대본”인 중中에 대한 바른 응대로서 제시되는 ‘신독愼獨’을 떠올린다. 신독과 하이데거의 사유를 비교하는 것은 둘의 관계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로의 눈으로부터 서로를 보는 해석학적 순환의 방편을 통해 문제되는 것에 보다 근접하고자 함이다.


『중용』에서 중은 은닉으로부터 스스로 그 자체를 숨김과 왜곡 없이 밝게 드러내는 발현發現으로서 설명된다.




“숨겨지고 미세한 곳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고 경계한다.)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중용』 1장)


이와 같이 중이 숨겨져 있고 미세하면서도 무엇보다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나타난다는 것은 중이 은닉에서 그 자체를 스스로 열어 밝히는 진리 사건이란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용』은 이에 대한 상응으로서 신독을 얘기하는 것이다.


신독은 기존의 전통적 이해에서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자기에게 충실하여 내면적으로 실천의 기반을 확립하는 것”(『儒敎大事典』)으로서 풀이된다. 구체적으로는 홀로 있음의 ‘독’이란 남이 알지 못하여 방만해지기 쉬운 위태로운 자리이니 더욱 조심해 도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숨겨지고 ... 나타나는 것’을 은미隱微로부터 발현하는 중으로 보는 우리의 관점에서는 신독은 또 다른 얘기를 한다. 이에 따르면 중의 발현을 참되게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은미로부터 밝게 드러나는 중을 올바로 보고 듣기 위해서는 비본래성이 끊겨야한다.


우리가 우선 대개 처해 있기 마련인 소란한 세상과 떠도는 잡담에서 물러나고, 그곳에 걸린 마음을 비우고 오히려 ‘홀로’ 되어야 한다.




이때 홀로 있음은 비본래적인 것들을 흔연히 털어내고 다만 자기 자신과 먼저 관계하는 것이다. 친숙하고 범상한 것들에서 뒤로 물러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 오직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중국 남송 시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주자朱子(1130~1200)는 “신독愼獨”(『중용』 1장)의 ‘獨’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아는 곳[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중용장구中庸章句』)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신독에서 ‘愼’은 ‘삼가다’, ‘근신하다’, ‘두려워하다’, ‘근심하다’, ‘따르다’, ‘진실로’, ‘참으로’ 등의 의미를 갖는다. 이 사전적 여러 의미들을 관통하는 근본 뜻은 ‘마음을 세밀히 씀’이다. 그리고 그 마음 씀이란 근본적으로 ‘자신을 넘어 ~으로, ~을 향해’라는 지향적, 탈자적脫自的 성격을 갖는다.


이제 신독은 다음과 같은 요구로서 드러난다. 친숙하고 범상한 것들에서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발현하며 이르는 것’, ‘자신만이 알고 있는 것’[中]으로 나아가 그것과 함께 온전히 홀로 있음’, ‘삼가며 마음을 다해 거기에 나아가 머묾’, ‘경외하며 물러서 그것이 비로소 참되게 들어서도록 받들고 지킴’ 등.


이때 신독은 하이데거에서 기억의 사유가 그렇듯, ‘뒤로 물러남이자 앞으로 나아감’의 틀 위에서 수행되고 있다. 신독에서 하이데거를 찾으려 했다면, 하이데거에서도 신독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발현에 대해서’란 부제를 단 Die Beiträge zur Philsophie(『철학에의 기여』)에서 이 책은 굳이 말하면 “홀로 있음을 떠맡을 강한 용기를 가지고 존재의 고결함을 사유하며 그것의 유일무이함을 말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고 밝힌다. 이때 ‘홀로 있음’은 주변인의 삶과는 전혀 무관하다.


신독도 그렇고 기억의 사유도 우리들 자신인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러저러한 태도들의 하나로서 인간의 능력과 재량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임의로 그것을 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유하게 하는 것’이 인간에게 자신을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지킴을 본질로 하는 사유나 신독은 ‘사유하게 하는 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그에 속한다. 다시 말해 ‘사유하게 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섬’의 동시성, 공속성이 틔우는 개방성으로부터, 그리고 지킴의 방식으로 그 자신을 사유하도록 이르는 것이다.


사유거리를 지키는 기억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 지킴의 의미를 올바로 파악하는 일이다. heißen만이 아니라 ‘schonen’, ‘hüten’, ‘wahren’, ‘gebrauchen’, ‘wohnen’ … 등 여러 표현을 통해 하이데거 사유의 주요 길목에서 부딪히게 되는 지킴의 사태란 근본적으로 ‘~을 본래대로 있도록 놔두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스스로 일어나고 벌어지게 태연하게 놓아두고 이를 승인하는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경작지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나는 것을 생장력에 맡기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지켜주는”(Die Technik und die Kehr) 일과 같은 것이다. 지켜지는 것은 지킴에 의해 비로소 온전함, 본래성에 이르고 자유롭게 된다.


그러므로 지킴을 본질로 하는 사유는 대상을 장악하여 자신의 고려 안에 두는, 계산하는 사유와는 이미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다른 사유”의 성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Gunter/Kettering, Emil(Hrsg.), Antwort, Martin Heidegger in Gespräch] 여기서 ‘계산적’이라 함은 수를 다룸이란 좁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자연적인 것이든, 인간이든, 역사적 사건이든 모든 현실적인 것들을 뒤쫓아 그것들을 대상으로 확보하는 방식의 응대는 근본특성에서 보면 계산함으로써 수행된다. 지킴의 사유란 이같은 욕구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모종의 셈법 아래 무엇을 표상하고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지는 것이 스스로 제 본질로 있도록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불러 세워 사유하게 하는 것을 맞이하여 그리로 나아가는 동시에 물러섬으로써 자리를 비워 그리로부터 ‘사유하게 하는 것’이 비로소 참됨으로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사유는 또한 감사함으로써 수행된다. 사유거리로 마음을 모아 그것을 간수하고 지키는 기억의 사유에는 어떻게 감사함이 지배하는 것일까?




하이데거는 어떤 것을 혹은 누구를 마음에서 놓지 않으면서, 곧 잊지 않으면서 예속의 의미가 아니라 귀 기울이며 마음을 쏟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치는 것을 감사의 근본의미, 곧 “근원적인 감사함”(Was heiußt Denken?)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기억의 사유란 불러 세워 사유하게 하는 것 자체로 마음을 모아서 그것을 간수하며 지키는 것이었다. 기억의 사유는 곧 본래적 의미에서의 감사함이다. 또 사유함이 우리의 본질, 즉 우리가 본래 있어야 할 바이기에 그 감사함은 우리가 비로소 참됨으로 정주하도록 해준 호의, 은혜에 대한 갚음이다.


우리에게 자신을 내주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고유하게, 즉 사유하는 자로서 살도록 해준 고마움에 맞는 극진한 답례, “최고의 감사함”(Was heißt Denken?)은 ‘사유하게 하는 것’을 오롯이 기억하고 감사하는, 곧 사유하는 일이다.


이로써 기억과 감사로서의 사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기억과 감사로써 일어나는 사유는 마음을 모아 간수하여 지키는 것이고, 지킴은 본래의 의미에서 보면 사유거리를 그것의 본성대로 있도록 놓아두는 일이다.


이는 ‘사유하게 하는 것’이 그의 요구대로 사유되도록 자리를 열어주는 개방성으로서 일어난다. 경건의 정조情調와 기다림의 성격을 갖는 이러한 사유는 이미 표상함이나 대상화와는 구분되는 ‘또 다른 사유’이다. 그것이 또한 참된 의미의 감사이다.


계속)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76개(1/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