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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고요함을 사랑하노라 (1)

2021.02.04 | 조회 226 | 공감 0

나는 그 고요함을 사랑하노라[我愛其靜]

- 1. 오직 하나의 별, 고향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나는 그때 이전에도 이후로도 그를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없다. 수년 전 배우 한석규가 이제는 사라진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한석규는 아마도 누구나 기꺼이 인정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의 출세작이라 할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그가 외친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극중에서 주인공인 그의 캐릭터는 부유한 사모님들로부터 한탕을 기대하는 제비족이다. 그 당시 강남이 재개발되면서 수용된 막대한 토지 보상금으로 졸부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잘 생기고 언변 좋고 춤 잘 추고, 야심 있는 젊은이에겐 졸부 사모님들은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 사람들은 제비라고 불렀다. 여기에 최민식, 채시라, 김원희가 주인공의 친구, 연인, 배우자로 출연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무무시한 캐스팅이다. 모든 일이 뜻대로 안되고 입안이 모래 같은 날이 있다. 한석규에겐 그 날이 그랬던 모양이다. 한석규는 그가 살던 달동네에서 술에 취한 채 서울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부르짖는다. “보이스 비 앰비셔스(Boys, be ambitious)!” 울분과 동시에 야망이 섞여 있는 절규였다. 저 정도의 간절함이라면 그것은 선악을 넘어서는 것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그의 포부는 수포로 돌아가고 비극적인 종말을 맞지만 배우 한석규는 ‘앰비션’(ambition)을 이뤘다. 그 작품 이후 ‘닥터 봉’, ‘넘버 3’, ‘쉬리’, ‘접속’, 그리고 ‘8월의 크리스마스’ 등 빅 히트를 한 영화들에 연달아 출연했다.


또 아마도 엄청난 돈을 받고 여러 광고와 드라마도 찍었다. 아직도 단단한 몸매를 유지하면서 서릿발 같은 열연을 보이고 있다. 돈, 명예, 건강을 다 가진 셈이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제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그는 길게 뜸도 들이지 않고 세상 당연한 말처럼 대답한다. “편안함이죠.”


모든 것을 얻었을 것 같은 그가 바라는 편안함은 분명 돈과 권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번뇌와 갈등, 스트레스 등의 끄달림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와 안식의 편안함일 터이다. 안팎에서 일체의 소란함이 꺼진 고요함을 말한 것이다.


흔들림도 걸림도 없는 고요한 평정은 아마도 종교적, 영성적 수행이 약속하는 니르바나, 득도得道, 선禪, 사토리(さとり; 깨달음, 득도得道) 등과 크게 달라야 할 것 같지 않다.




공자孔子(551 B.C.~479 B.C.) 또한 그 고요함을 사랑했다. 공자는 네 명의 제자들에게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묻는다. 그중 증석曾皙은 어른, 아이 함께 어울려 기수沂水 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는 노래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대답한다.


공자는 증석과 함께 하겠노라고 말한다. 훗날 중국 진나라 말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은 자신의 시(‘時運’ 3)에 증석이 소망한 유유자적한 삶을 떠올리며 ‘아애기정我愛其靜’이라 적는다. “나는 그 고요함을 사랑하노라.”


훗날 주자朱子는 공자와 안자의 즐거움[孔顔樂處]을 이상적 경지의 마음이라 하면서도 자칫 광狂에 빠질 것을 걱정한다. 아마도 주자는 흥과 기쁨에 취해 도덕적 절제를 가벼이 여기거나 잊을까 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공안락처’는 고요함, 한가함 속 들어차는 것이며 특별히 어떤 대상으로 인한 즐거움이 아니다. 그만큼 이미 윤리적 문제를 떠나 있다.


고요함은 단조로움이나 지루함과 혼동될 수 없다. 부드러운 즐거움이며 청량함이다. 장 종 위앤이 『황금꽃의 비밀』에서 저자와 작성 시기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한 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한 빈 터를 두고 노인에게 이 땅을 몇 번이나 팔고 또 샀는지 묻는다. 이에 대해 노인은 다소 엉뚱하게 ‘나는 송죽이 일으키는 청풍을 좋아한다.’라고 대꾸한다. 땅을 몇 번 팔고 샀는지는 계산함이다. 질문자는 수익收益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간적 이해와 의도 속에 공터를 대상화하고 있다. 반면 노인의 답은 환히 드러난 빈 땅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거기서 생기生起하는 고요함 속 부드러운 기쁨과 청량함을 말하고 있다.

독일의 시인 슈티프터(Adalbert Stifter, 1805~1868)는 ‘부드러운 법칙’을 제시한 바 있다. 이로써 말하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을 즐거움과 고요함의 안식은 그 ‘법칙’에 청종聽從하며 그 안에서 환하게 발현發現하는 본래적인 것을 맞이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슈티프터의 ‘부드러운 법칙’은 다음과 같다.
“부는 바람, 졸졸 흐르는 물, 익어가는 곡식, 물결치는 바다, 푸르른 대지, 빛나는 하늘, 깜박이는 별들, 나에게는 이러한 것이 위대한 것이다.”(『회상』) 

고요함 속에 “우리의 마음은 그 때 지금 여기의 삼라만상을 반영하는 순수한 신의 거울이 된다.”라고 말하는 장 종 위앤의 말은 그에 대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황금꽃의 비밀』)

장 종 위엔은 또 장자莊子를 이렇게 해석한다. “최상의 평정에 도달하면 하늘의 빛이 비친다[宇泰定者 發乎天光].”(『장자』 「경상초」)

“도는 텅 빈 곳에서만 모이니 이 텅 비움이 곧 마음을 닦음이다 … 허한 곳을 보라! 그 방안에서 빛이 나온다. 보라! 기쁨이 여기 있지 않은가[唯道集虛, 虛自心齋也. … 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장자』 「인간세」)

텅 빈 고요함에서 부는 바람, 졸졸 흐르는 물 등 단순한 것들이 그 자체로 밝게 드러나고 우리의 가지런한 마음은 그 발현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거울이 된다. 여기에 기쁨이 있다.



서양 철학자 하이데거가 구한 것도 자유와 안식, 기쁨의 원천인 고요함이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사유한, 좀 더 사태부합적으로 말하면 존재와 인간 본질의 연관을 일관되게 사유의 주제로 삼은 철학자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분명 그는 그 한 길을 오롯이 갔다. “하나의 별을 향해 오직 그것뿐!”

그런데 사상가로서 그가 삶 내내 꾸준했던 존재 사유를 통해 끝내 이르고자 한 ‘하나의 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건네고자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사실 그가 존재의 사상가란 규정만큼 확고하게 결정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이런 사정 속에서 그래도 자주 얘기되고 또 그만큼 공감을 사는 것은 그가, 특히 그의 후기 사유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고향 혹은 ‘또 다른 시원’의 건립에 대해 얘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하이데거가 존재 사유로써 형이상학과 그것의 완결이며, 그가 ‘고향상실의 시대’로 규정한 현대의 과학 기술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다는 역사적 맥락이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도를 통해 그가 이룩하고자 한 것 역시 형이상학이 지배한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지상地上에서의 거주가 가능한 고향의 회복이나 ‘또 다른 시원’의 개시開始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통해 우리를 그 과제 앞으로 불러내고 있다.

그의 고향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적어도 고향인 한, 우리가 떠났거나 잃은, 그리고 누구나 향수를 품고 다시 새롭게 되돌아가고자 하는 곳일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일상적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자유와 안식, 삶의 충만을 비로소 누리리라 신뢰하는 터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의 사상가’는 삶의 자유와 안식, 풍부한 존립에 대해 어떻게 얘기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그의 존재 사유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이데거는 존재를 사유하는 곳곳에서 눈에 띠지 않지만 끊임없이, 은근하게 ‘Ruhe’에 대해 말한다. 언급된 것에 비하면 이 문제가 주제적으로 논의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독일어 ‘루헤(Ruhe)’는 다음의 의미를 갖는다. ‘고요’, ‘정적靜寂’, ‘침묵’, ‘휴식’, ‘쉼’, ‘한가함’, ‘잠’, ‘평화’, ‘평온’ 등. 그래서 ‘Ruhe’는 움직임이나 동작이 아니고 정지며 시끄러움, 소음이 아니라 정적, 침묵이고 분망함이나 동요, 소란스러움이 아니라 한적함, 평온, 안식이다. 또 속박이 아니라 자유며 흐리고 탁함이 아니라 맑음, 청명함일 터다.

이런 ‘Ruhe’의 폭넓은 의미를 고려하면 가장 좋은 우리말 번역은 한자어 ‘정靜’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정’은 한 음절의 단어이고 또 보다 흔히 쓰이는 동음이의어와의 혼란 때문에 그 의미가 직관적이지 않다. 이런 사정으로 충분하지 않지만 ‘고요함’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도道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언설과 문자는 사태를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다. ‘고요함’이 지시하는 ‘달’은 ‘Ruhe’와 ‘정靜’이 향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여기서 ‘고요함’으로 옮기는 ‘Ruhe’에서 진정한 자유와 안식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제 ‘Ruhe’가 지배하는 곳이 고향이며 ‘또 다른 시원’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 다가올 논의를 준비하면서 니체의 시 구절을 가슴에 담아둔다. 니체는 고요함 속 생기하는 존재 발현에 자신을 내맡기며 얻는 자유와 안식의 순간을 노래한다.

“여기에 나는 기다리며 앉아 있었네. -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선악의 저편에서, 때로 빛을 즐기고 때로 그림자를 즐기며. 모든 것은 오직 놀이일 뿐, 순전히 호수이고 정오正午며 목표 없는 시간일 뿐.”(「실스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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