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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지나(支那)에서의 한류(韓流) 3

2021.04.06 | 조회 1225 | 공감 0

고대 지나(支那)에서의 역사적 ‘한류(韓流)’
-송(宋), 금(金)나라 시기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의 음악과 춤


전원철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고구려와 백제가 망하자 고대 지나에서 쇠퇴한 고구려, 백제악

신라와 당나라의 음모로 동아시아에서는 국제대전이 일어났다. 그 결과 666년 백제는 망하고 그 땅에는 당나라의 부여도독부가 들어섰다. 이어 668년에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그 영토는 당나라의 안동도호부 아래 강점당했다.


그러나 고구려 패망 6년만에 보장왕의 한 아들 고안승(高安勝)은 백제의 옛 땅에서 보덕국(報德國, 674~684년)을 지어 부여도독부를 몰아내고 10년간 옛 백제 영토를 기반으로 존속하였다. 옛 고구려 영토에서는 <자치통감> 권202 당기 의봉 원년(677년) 2월 정사조가 “공부상서 고장(보장왕)으로써 요동주도독을 삼고 조선왕을 봉하였다.” 고 한 바와 같이 고구려 패망 후 9년 후 보장왕이 다시 고구려 왕으로 인정되기도 하였다.


백제 땅의 제2고구려 보덕국이 신라에 병합된 지 14년 뒤이자, 고구려 패망 29년 만에 옛고구려 땅에서는 말골(靺鞨) 군왕(郡王) 대조영이 진국(震國)-발해(渤海, 698~926년)를 세웠다. 이리하여 한반도와 오늘날 만주지역에서는 발해와 신라가 남북으로 공존하는 ‘남북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날 삼국시대 역사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중 많은 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이른 바 “통일신라(統一新羅)”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보자면 통일신라시대는 애초부터 전혀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역사이다. 당과 신라군에 의해 나라를 점령당한 고구려-백제 백성들이 당나라의 안동도호부와 부여도독부의 점령통치에 항거하는 보덕국과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있었을지언정 삼국통일은 처음부터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책부원귀> 권977 외신부 항부 개원 3년(715년) 2월 조는 보장왕의 손자로 추정되는 고려(고구려)왕 막리지 고문간이 요서군왕으로 인정되었음을 알린다. 또 782년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李正己)와 그 아들 이납(李納)이 세운 독립왕국이었던 지나 대륙 산동과 상해를 중심으로 한 제나라(濟, 775~819년)를 포함해보자. 그러면 한 때 우리민족은 남북동서 등에서 4개의 왕조를 세우고 살았다.

 


▲고안승(高安勝)과 대문(大文)의 보덕국


이처럼 고구려가 패망한 시기에도 고구려 음악과 춤은 지나에서 계속하여 공연되었다. <구당서> “음악 2”는 698년 발해가 들어선 때인 “무태후(武太后, 재위 690~705년) 재위 시까지는 당나라는 고려악(高麗樂) 중 적어도 25곡(二十五曲)을 숭상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뒤 “지금에는 오직 한 곡만 연주되고 있었는데, 의복(衣服)도 쇠퇴하여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고 한다. 


당나라를 폐하고 무주(武周)를 세운 여황제 무태후는 고려악 25곡을 간수하게 하였다.


고려기(高麗伎), 고려(高麗) 가곡(歌曲)과 무곡(舞曲) 등은 나라가 사라지고 32년이 지난 무후 시대까지는 명맥을 유지했으나, 그 후 쇠퇴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본토인 발해에서는 발해악(渤海樂) 또는 발해의 또 하나의 국명인 ‘고려(高麗)의 악(樂)’으로 계속되었음이 틀림없다.


백제악(百濟樂)의 경우도 마치 한 가지였다.  <구당서> “음악 2”는 “백제악은 [당나라 제4대 황제]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 시대에 공인(工人)이 죽고 흩어졌다. 기왕(岐王) 범(范)이 태상경(太常卿)으로 있을 때 다시 백제악을 두자고 주(奏)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음악과 음기(音伎)가 많이 빠진 것이었다. 춤(舞)은 두 사람이 추었는데, 보라 빛 큰 소매를 가진 두루마기(紫大袖裙襦)에 장보관(章甫冠)을 쓰고, 가죽신(皮履)을 신었다.


악(樂) 중에 남은 것은 (거문고, 가야금 류인) 쟁(箏), (피리류인) 적(笛), 복사껍질피리(桃皮篳篥), (하프류인) 공후(箜篌), 노래(歌)였다. 이 두 나라 것은 동이의 음악(東夷之樂)이다.” 고 한다.

 


명나라 구영이 그린 공후(箜篌) 연주 그림 / 공자가 쓰던 장보관 (章甫冠)


신라는 북국(북국) 발해와 함께 건재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자주 말하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와는 달리, 또 삼국의 음악이 비교적 비등하게 연주되었던 일본에서와는 달리, 지나에서 신라기(新羅伎) 또는 신라악(新羅樂)은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았다.


삼국시대에서나 또는 그 후 발해와 신라 사이의 남북국 시대에서나 ‘신라기’라는 이름만 보일 뿐 지나 땅 및 일본사서에 별로 기록이 없다. 이로 보아 지나대륙과 일본 등 외국과의 문화적 국제교류를 활발히 한 것은 신라보다는 오히려 고구려, 백제, 발해라고 볼 수 있다. 


나라가 사라짐에 따라 그 자취도 점차 사라지긴 했지만, 고구려 음악인들이 전개한 지나대륙에서의 해외음악활동은 음악사적 관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예술사 전문가에 따르면, 첫째, 새로운 음악문화를 만들기 위하여 고구려인들이 자국의 향악(鄕樂)을 뿌리로 삼고 외래음악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둘째 외래음악의 자주적 수용능력은 결국 지나에서 국위선양의 밑거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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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나라와 금(金)나라에서 궁중에서 대대로 연주된 발해악(渤海樂)

당나라를 때를 지나 송나라 때에는 고려기(高麗伎), 고려가곡(高麗歌曲)과 무곡(舞曲)등을 이은 것으로 추정되는 발해악(渤海樂)이 다시 송나라 궁정에서 연주되었다.


송나라 때에 ‘사이악(四夷樂)’ 이 있어, ‘고려기악(高麗伎樂)’이 그 하나로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 고유한 뜻의 ‘고려기악(高麗伎樂)’이 궁정에서 연주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미루어 생각하건 데 고구려악은 이제 발해악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된 것으로 보인다.


송나라는 수, 당과 같이 큰 영토를 가지지도 못하고 외국과의 교류도 비교적 적었기는 하지만, <송사宋史> 권35 및 권131의 기록에 따르면, 송나라 궁중에서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인 발해악(渤海樂)과 발해금(渤海琴)을 연주했다. ‘발해금(渤海琴)’은 고구려의 거문고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고구려 음악은 발해악이라는 이름 아래 계승된 것이리라.


다른 한편 고려 궁중음악에는 좌(左), 우(右) 이부가 있어, 좌(左)는 이른 바 “중국지음(中國之音)”인 ‘당악(唐樂)’으로 연주하고, 우(右)는 향악(鄉樂)으로 연주하였다. 

 


“발해금(渤海琴)”으로 표현된 거문고의 선을 고르는 모습을 그린 조선 시대 그림
(신영복-탄현)


주목할 점은 송나라에서는 발해가 망한 926년에서 무려 260년이 지난 시점인 남송 효종 순희(淳熙) 12년(1186)에 이르기까지 발해악을 연주하였다는 사실이다. 『송사宋史』는 그해 3월 신묘(辛卯)일에 “발해악(渤海樂) 교습을 금했다” 고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무렵 오랜 세월이 지난 탓으로 발해 악기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져 “호로금(胡盧琴), 발해금(渤海琴)이 침체억울(沉滯抑鬱)”하여 다시 재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발해가 사라진지 260년이 지난 시점이니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하다. 그러나 이처럼 오래도록 연주되었다는 점은 그 음악이 그만큼 지나인들에게 끌리는 면이 있었기 때문임은 분명하다.


그 “발해악(渤海樂)”의 면모는 남송(1127~1279년)의 엽융례(葉隆禮)가 1260년경에 쓴 <거란국지(契丹國志)> 권24(卷二十四)에 조금 적혀 있다:

“유화관(柳河館),물(河)은 관(館) 옆을 흐르는데 … 발해인(渤海人)들이 산다. … 발해 풍속(渤海俗)에 매년 모여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먼저 노래를 잘하고 춤을 잘 추는 이(善歌舞者)가 몇 무리를 지어 앞으로 나가면 선비와 계집이 서로 뒤따르며 서로 노래하고 화답하며, 빙글빙글 도는데(唱和, 回旋宛轉) 이를 답추(踏鎚)라고 한다.” 

 


발해의 답추(踏鎚)로 보는 강강술래 장면
(1891년 진도)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오늘날 장구(杖鼓)를 모르는 한국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일성록> 정조 10년 병오 1월 22일조>는 “장구(杖鼓)는 말갈(靺鞨)의 북이고, 필률(篳篥)은 오랑캐의 갈잎 피리이고, 해금(奚琴)은 해족(奚族)과 거란(契丹)의 거문고이다” 고 한다.


장구(杖鼓)는 원래 우리가 잘못된 국사교육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과는 전혀 다른 그 무슨 해괴한 오랑캐 “말갈족”이라고 알 던 그 말갈족이 바로 우리 “고구려의 말갈칠부(靺鞨七部)”라고 하는 <금사>의 기록에서와 같이, 사실은 우리 고구려의 변방지대의 행정단위인 ‘말고을(馬忽, 馬郡)’에서 쓰던 “말갈(靺鞨) 북”이었던 것이다! 결국 장구는 고구려의 악기였던 것이다.


이를 보면, 오늘에도 그렇듯이, 장구(杖鼓)는 고구려와 발해 음악의 필수 악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강술래 중 기와밟기를 하는 모습 / 말갈북 장구


그러나 거란(契丹)이 926년 발해를 없애 버린 이래 발해악과 발해악기가 사라져 가던 그 남송 시기에 이 남방 지나국과 서로 대치하며 지나대륙을 남북으로 나누어 나란히 지나를 다스리고 있던 우리민족의 나라가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잊어버린 우리의 참된 역사 금(金, 1115~1234년) 나라이다. 이 나라의 영토는 우리 땅 북방에서 오늘날 만주(滿洲)라고 부르는 옛조선과 고구려, 발해 땅은 물론, 지나대륙 동북방의 전체를 차지한 거대한 나라이다. 이 금나라에서 발해악(渤海樂)은 왕실의 궁중음악으로서 매우 성행하고 있었다.


◀금 태조(太祖) 왕민(王旻)


왜일까? 왜냐하면 금(金)나라 태조(太祖)의 조종(朝宗)은 원래 발해 성 대씨(姓大氏) 왕가 가문의 후손이고, 그 선조 금행(金幸)의 고향은 우리나라 황해도 평산에서 산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8대손인 발해식 이름 왕민(王旻) 조션(女眞)식 이름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함경남도 함흥과 함북 길주 지방에서 금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왕민(王旻) 자신이 한 유명한 말이다. 그가 요(遼)나라 군대(遼兵)를 국경에서 패배시키고 야율사습(耶律謝十)을 잡은 뒤, 발해인 양복(梁福)과 알답라(斡答刺)를 시켜 발해인(渤海人)들이 자신의 진영에 들어오게 하기 위해 타이르게(招諭) 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가문인] 여진(女直)과 (예전의 우리나라 왕가인) 발해(渤海) [왕가]는 본래(本) 같은 한 집안(同一家)이다」!”


곧 금나라 왕가는 발해왕가와 같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남송의 서몽신(徐夢莘)이 쓴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은 “조션(女眞)은 고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예(後裔)”라고 했다. 결국 금(金)나라는 발해의 계승국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이야기이다.



북한에서 시작하여 지나의 북동부 태반을 점령하여

북송을 쫓아내고 남송과 대치한 위대한 금나라 강역


그러나 오늘날 우리 역사계는 발해를 서자 취급하고, 금나라 역사는 아예 우리나라 역사에서 제외하여 이른 바 “중국사(中國史)”라고 본다. 참으로 분통하고 웃기는 일이다. 중공의 ‘동북역사공정’을 탓하기 전에 자기 역사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지나에 팔아먹은 오늘날의 우리 조선 엽전 역사가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식민사학 척결을 주장하는 재야 사학자들도 별 반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심지어 ‘민족주체’를 입에 달고 도는 이른 바 “주체력사일꾼”이라는 북한의 학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땅 북한에서 일어나 120년 가까이 지나대륙의 반을 통치한 역사를 “중국사”라고 보는 이 웃기는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발해가 멸망한 926년 직후에 들어서 여진국(女眞國) 때부터 120년간 존속한 금나라(1115~1234년) 때까지 약 190년간 북한 땅은 이른바 “중국땅”인 것이다! 말도 안 된다!


여하튼 참고로 금(金)나라 태조(太祖) 왕민(王旻)의 8대조부 대금행(大金幸)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외증조부이고, 따라서 금태조는 왕건의 종5대손이다. 이 때문에 금태조(太祖) 숙부가 고려 예종에게 9성을 돌려 달라고 사신을 보냈을 때 “대방(大邦)은 우리 조종의 나라이고, 부모지국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금나라 황가의 출자때문에 금나라에서 고구려악기를 이은 발해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해악은 특히 금나라 황실 종묘(宗廟)의 의례를 총괄하는 정부부서인 태상시(太常寺)의 장관인 태상(太常), 곧 태상사경(太常寺卿)이 관리하여 금나라의 궁정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금나라 궁정에서는 1) 지나의 고대 궁중음악인 아악(雅樂)보다는 2) 발해악(渤海樂)과 3)본국악, 곧 조션(女眞)의 옛 음악(本國舊音)과 4) 연회와 거리에서 재미를 위해 행하는 백희(白戱)와 잡희(雜戱)로 이루어진 산악(散樂)도 공연하여 모두 4가지 분야의 음악과 연기를 공연하였다. 



15세기 조션(女眞)사람 수렵도


또 예능인의 수면에서도 태상(太常)에 속하여 한 때 총 256명이나 된 인원 중 약 92명 이상의 인원이 “발해교방(渤海教坊)”에 속해 음악과 연기를 공연하였다. 이 발해교방은 한인교방(漢人教坊)과 함께 정기적으로는 설날(元日)과 성탄칭하(聖誕稱賀)를 비롯하여, 외국사신을 대접(曲宴外國使)할 때에 반드시 백희와 잡희로 이루어진 산악(散樂)을 공연하였다.


또 “발해교방(渤海教坊)”은 한인교방(漢人教坊)과 함께 임금의 행사나 행차가 있을 때마다 징, 노래, 북, 피리를 연주하는 요가고취(鐃歌鼓吹)를 하고, 황제를 모시고 나가는 때 연주하는 음악인 천자행행로박도인지악(天子行幸鹵簿導引之樂)도 연주했다. 명창(明昌, 1190~1196) 연간에 발해교방(渤海教坊)은 아악(雅樂)도 함께 배워(兼習) 연주했다. 


관련 기록을 보자. 우선 <금사(金史)> ‘악상(樂上)’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금(金) 나라 초(初, 1115)에 송(宋)으로부터 얻어, 비로소 쇠와 돌로 된 악기(金石之樂)가 있게 되었으나, 그 아름다움을 다할 수 없었다.


대정(大定, 1161~1189)과 명창(明昌, 1190~1196)년 즈음 날마다 닦고, 달마다 모여, 찬연하게 갖춰졌다. 태상(太常)이 관리하는 것은 (종묘인) 교묘(郊廟), (나라의 제사인) 사향(祀享), (나라의 큰 잔치인) 대연(大宴), 또 백관이 모여 임금을 알현하는 때 공연한 대조회궁현이무(大朝會宮縣二舞)이었다.


교방(教坊)이 관장하는 것은 요가고취(鐃歌鼓吹, 징, 노래, 북, 피리)와 천자행행로박도인지악(天子行幸鹵簿導引之樂)이다. 산악(散樂)과 발해악(渤海樂), 그리고 본국 옛 음악(本國舊音)이 있는데, 세종(世宗)은 일찍이 그 의도(意度)를 베껴서 아곡(雅曲)을 만들어, 사관(史)이 그 하나를 취록하였고, 여염집거리에 있는 것은 싣지 않았다” 한다.

 

 

하바롭스크도박물관 소장으로 원래 우수리에 있던 에시쿠이(디구나이)왕자의 비문


또 말하기를, “아악(雅樂)은: … 대정(大定) 29년(1189),현종(顯宗)에게 붙여(升祔),다스리는 자(有司)를 두어 공연하였다. … 태화(泰和) 4년(1204) 상서성(尚書省)이 주하기를 궁현악공(宮縣樂工)은 모두 256명을 쓰는데, 예전에 설치한 바는 100명이므로 때때로 이를 쓰면 곧 그 일부를 교방(教坊)에 붙여서 배우게 함이 어떤지요 하였다.


또 명창(明昌, 1190~1196) 연간에 발해교방(渤海教坊)으로 하여금 함께 배우도록(兼習) 하여, 또 92명을 두었다. 또 궁현악(宮縣之樂)이 대례(大禮)를 할 때 비로소 쓸 수 있었는데, 만일 그 수가 모자라면, 앞서 한인교방(漢人教坊)을 보내고 대흥부(大興府) 악인(樂人)이 이를 배우면, 그 또한 쓸 수 있었다.” 한다.


그 외 백희를 공연하는 “산악(散樂)은 설날(元日)과 성탄칭하(聖誕稱賀) 때 그리고 곡연외국사(曲宴外國使)할 때에 교방(教坊)이 연주한다. 그 악기와 곡명은 전하지 않는다. … 태화초(泰和初, 1201) 유사(有司)가 다시 주하기를 태상공인(太常工人)의 수가 적으니, 발해교방(渤海教坊), 한인교방(漢人教坊) 및 대흥부악인(大興府樂人)이 함께 배워 같이 쓸 수 있게 하시오’ 했다.”


이처럼 <송사>의 기록이나, <금사>의 기록은 발해의 조종 종묘의식을 다루던 태상시에서 연주되었던 발해악이 926년 발해 멸망 뒤 금나라로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곧 고구려 음악의 계승과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전통은 발해의 악공, 악사, 교방여기의 후예들에 의해서 송나라의 궁정에서도 지속되었고, 특히 금나라의 궁중에서는 칭기스 칸의 몽골한테서 나라가 망하는 1234년까지 전통을 이어왔다.

 


1214년 금 선종이 보낸 사신과 말 등에 탄 금나라 기국공주를 맞는 칭기스 칸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라시드 웃딘의 <역사모음>


그러나 이제 금나라 궁정의 이 발해악과 금국악의 자취와 형태는 지금은 알 수가 없다. 향후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이윽고 칭기스 칸의 셋째아들 오고타이 칸 6년인 1234년 금 애종(哀宗) 왕수서(王守緖)와 말제 금 소종(昭宗) 왕승린(承麟)의 금나라를 정복한다. 이리하여 발해악과 이를 이은 금국악은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이후 송나라(북송: 960~1127 남송 1127~1279년)도 멸망시키고 지나대륙에 들어선 원나라에서는 금대까지의 음악과 춤뿐만 아니라, 또 다른 고대적 한류인 고려양(高麗樣)이 널리 퍼지게 된다.

 


김홍도가 그린 조선시대의 연회에 보인 춤과 학춤, 연꽃대, 사자춤, 배타고 놀기


이러한 현상은 조선과 명나라 초기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면면한 전통이 오늘날 Korean waves의 바탕이 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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