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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 분리의 ‘망령亡靈’ (3)

2021.06.01 | 조회 390 | 공감 0

주객 분리의 ‘망령亡靈’

3. “헤엄치며 살길”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하이데거는 새롭지만 오래된, 다시 말해 ‘또 다른 시원’의 사유를 ‘숙고’(sinnen, sinnan; besinnen)라 부른다. 이러한 호명과 함께 하이데거는 그 말에 담긴 시원적 의미를 건져 올린다. 그럼으로써 표상이나 이론이 아닌 혹은 그 이전의 사물과 교류하던 본래적 양식을 제시한다.


우리는 본래 어떤 방식의 사유로써
자신과 세계를 만났던가?
그 시원적 바라봄을 아직 기억하는가?


‘sinnen’, ‘sinnan’의 어간을 형성하는 ‘Sinn’은 ‘의미’란 뜻이다. 그런데 ‘Sinn’은 본래 하나의 사태가 내는 열린 길이며 방향을 뜻한다고 한다. ‘sinnan’은 영어 ‘sensing’와 함께 길이란 뜻의 인도 게르만어 ‘sent’, ‘set’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로부터 하이데거는 의미를 하나의 사태가 자기 본질을 전개하고 동시에 머무는, 밝게 트인 장場으로 규정한다. 그는 의미를 영역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의미를 “어떤 것의 이해 가능성이 머무는” 또는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영역으로 밝힌다. 존재의 경우라면 그 의미는 존재가 존재로서, 즉 비은폐된 존재 자체로서 현성現成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의 사유를 주도한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곧 그 존재 진리의 토포스(위상; 장소)를 묻는 것이다.


이를 고려할 때 숙고는 본래 하나의 사태가 그 자신으로부터 길의 방향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숙고는 ‘길 내기’이고 ‘길을 따르는 것’이다. 


“사유에서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길이다.”

(Unter zur Sprache 『언어로의 도상에서』)


하이데거의 숙고 개념은 영어권에서 ‘명상’(meditation), ‘명상적 사유’(meditative thinking)로 번역된다. 명상이 도道,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으로 이해된다면 숙고나 명상은 둘 다 말 그대로 도, 즉 길을 따르는 것이다.


“숙고의 본질은 길에 들어서 머무는 것이며
그리로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 『강연과 논문』)


위 인용문이 시사하듯이 근대의 표상적 사유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또 다른 시원의 사유’, 즉 숙고로의 변화는 내맡김을 통해 일어난다. 


“숙고는 단순히 어떤 것을 의식하는 것 이상이다.

숙고는 물을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Vorträge und Aufsätze 『강연과 논문』)




비교를 위해 다시 상기하면 형이상학적 만남의 양식인 표상숙고와 달리 대상을 파악, 장악, 이용하려는 의지로부터 사물을 뒤쫓아 앞에 붙잡아 놓는 것이다. 하나는 사유거리로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리로 침범해 들어가는 것이다.


이때 내맡김은 단순히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아예 의지와 상관이 없다. 일종의 기다림이다. 내맡김의 기다림은 기대나 예상과는 대조적으로 어떤 대상을 뚜렷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명한 것을 마음에 둠이 없이 단순히 개방하는 자세이다. 심지어 하이데거는 우리는 내맡기면서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며 순전히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때 하지 말아야 할 함이란 주객분리의 형세 아래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들어서서 작용하려는 형이상학적 함이다.


“내맡김은 우리가 끊임없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함[有爲]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문제의 부분이다.

모든 함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이다.”

(Heidegger and Asian Thought
『하이데거와 아시아 사유』)


니체는 한때 그가 머물렀던 알프스 계곡의 마을 ‘실스마리아’를 제목으로 한 시에서 비非형이상학적으로 혹은 전前형이상학적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기다림을 말하고 있다 :  

“여기에 나는 기다리며 앉아 있었네. -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선악의 저편에서, 때로 빛을 즐기고 때로 그림자를 즐기며. 모든 것은 오직 놀이일 뿐, 순전히 호수이고 정오正午며 목표 없는 시간일 뿐.”

(니체, 「실스마리아」)


숙고는 내맡기고 기다리면서 상응할 뿐이다. 그런 의미로 무위無爲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맡김은 축 늘어진 수동성 같은 것이 아니다. 내맡김에서 함(doing)은 마음을 모음 혹은 마음 챙김에 있다. 물론 이 ‘~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개방성’의 유위有爲 또한 순전히 자발적인,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마음을 향하는, 관여하는, 앗아가는 것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서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나아가 숙고의 ‘정중동靜中動’ 혹은 그 ‘무위지위無爲之爲’는 최고의 유위가 된다.


다시 중국 송나라 때 학자 정명도의 시 「추일우성秋日偶成」에 나오는 한 구절을 상기한다.


“가만히 바라보면 만물은 스스로 얻은 것 같다

[萬物靜觀皆自得].”


고요히 바라봄인 정관은 능동적, 적극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그곳으로 마음을 모음이며 그 밖의 어떤 함도 아니다. 희랍의 ‘테오리아’와 동일한 시선이다. 그러나 그 무위에서 모든 것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있도록 한다.


일본의 한 시인은 “소나무로부터 소나무를 배우고 대나무로부터 대나무를 배운다.”라고 말한다. 사물을 대상화하여 주체의 것으로 주체와 동질화하려는 일체의 의지를 여의고 자신을 내맡기는 숙고에 소나무와 대나무의 참됨 혹은 참된 소나무, 참된 대나무가 들어선다. 숙고는 그와 같이 ~을 비로소 그 자체로 있도록 하기에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유위인 것이다.


만물이 스스로 밝게 드러나 그 자체로 고요히 머무는 발현에 신성神性이 빛난다. 바라보는[정관] 나 또한 참됨으로 있다. 바라보이는 것과 바라보는 것이 바라봄에서 일체를 이룬다. 그 하나 됨이 또한 참나이다.




좀 더 친숙한 예를 생각해 보자. 


“자막 없이 밤하늘 보고 번역 없는 바람 소릴 듣지

… 유난히 밝은 달 거대한 원형 속에 보이네 너의 미소”.


남매로 구성된 AKMU(악뮤)[악동뮤지션]가 부른 노래(‘달’)의 가사 일부이다. 설명을 돕는 자막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옮긴 번역도 사태에 즉한 기술은 아니다. 심지어 오해와 무지 혹은 섣부른 친절이나 지적 과시 등이 빚는 왜곡의 가능성도 아주 떨쳐낼 수 없다. 어떤 설명이나 이해의 덧댐 없이 민낯 그대로 ‘나 스스로 너 자체를’ 보고 듣겠다는 것이다.


일체의 선입견 없이 보고 들으려는 마음에 달이 웃는다. 달에 보인 저 미소는 단순히 지어낸 상상의 것이거나 착시가 빚은 가상일 뿐일까? 혹 그것은 자막과 번역을 통해 보고 들은 저 ‘현실적인’ 것들, 예컨대 지나가는 차, 그것들이 내는 소리, 가게, 집의 지붕, 무엇보다도 현재 내 앞의 컵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어느 게 더 ‘리얼’한가?


위 시구와 노랫말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시와 예술에는 아직 우리를 향해 말 건네는 것에 자신을 내맡기며 기다리는 시원적 경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점점 발자국 지워져 가는 그 숙고의 길을 아직 지키고 있다.


“예술은 현실적인 것이 이제까지 감춰져 있던 광휘를 그때그때 새롭게 인간에게 선사하는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말 건네는 것을 그 빛 안에서 보다 순수하게 보고 보다 명료하게 듣는다.”

(Vorträge und Aufsätze 『강연과 논문』)


하이데거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세잔(Paul Cézanne, 1839~1906)을 애호한 것 또한 세잔이 ‘아름다운’, ‘추한’, ‘끔찍한’ 등과 같은 앞선 평가 없이 오직 사물에 유념하는 즉사즉진의 시선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세잔의 “이해” 안에서 “현존과 현존하는 것의 겹침은 단일하게 되고 동시에 왜곡되었다가 신비로운 방식으로 동일성으로 변화한다.”


현존하는 것은 그것의 현존에서 그 자체로 드러나 ‘사물’이 된다. 산과 물은 각기 ‘산 아님’과 ‘물 아님’의 차이를 딛고 다시 산이고 물이다. 이때 사물로서의 사물을 세계와 신성의 금빛 광채가 감싼다.


숙고의 길은 언제나 걸음이 시작되는 위치나 길의 거리, 또 길 가운데서 트이는 조망에 따라 옮겨 다닌다. 숙고는 무르익어가며 우리가 상주常住하는 장소로 향하는 길로 우리를 데려간다. 오래전부터 머물던 곳으로. 즉사즉진의 시원으로. 이 때/곳은 숙고의 바라봄 속에 사물도 그 자체로 존재하고 나도 참나로 존재하기에 은총의 시공간이다. 그리하여 저 침묵으로써 말 건네는 것으로 향하는 숙고의 편력은 모험이 아니라 축복 속의 귀향이다.




숙고는 저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다. 이때 상응이란 우리를 부르고 눈짓하는 것의 충만함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의 깨어있음 속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이렇게 물을 가치가 있는 것에 귀 기울이는 자로서 쓰이는 순간 상응은 물음의 성격을 잊고 단순한 말함이 된다. 니체, 정명도의 시가 그렇다. 세잔의 그림은 그 말의 형상화이다. 그리고 악뮤도 그렇게 보고 싶다. 기왕 악뮤의 노래를 언급했으니 그들의 또 다른 노랫말로 글을 맺고 싶다.


“우리가 노래하듯이, 우리가 말하듯이, 우리가 헤엄치듯이 살길”(‘물 만난 물고기’) 곡을 쓰고 가사를 짓는 악뮤의 리더 이찬혁의 영감이 특히 빛나는 대목은 ‘헤엄치듯이 살길’이다. (이찬혁은 이 노래 발표와 함께 동명의 소설을 펴낸 바 있다.)


진솔한 노래와 말들이 순전한 너와 나 사이의 말간 믿음에서 나누는 것이듯, 헤엄치는 사람은 물과 사귀어야 한다. 의심 없이 물에 나를 맡기고 물과 나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놀아야 한다. 악뮤는 너와 나,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악몽에서 깨어나, 태양 가득한 대양大洋 속에 헤엄치며 살 수 있기를 노래한다.


“너는 바다가 되고 난 배가 되었네

너는 물감이 되고 난 붓이 되었네.”

(AKMU ‘물 만난 물고기’)


『장자』에게서도 헤엄치는 물고기와 사람의 예가 등장하고는 한다. 『장자』 <제19장 달생達生>에는 천지자연에 순응하여 자유로운 경지에 이른 지인至人을 물에 친숙하여 물을 잊은 ‘헤엄 잘 치는 사람’에 비유한다. 그 중 한 사람이 헤엄치는 도를 묻는 공자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물속에서 자라 물속에 편히 있는 것을 본성이라 하며,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이유를 모른 채 헤엄치는 것을 천명天命이라 하오.


물속에서는 주객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별하는 게 위태롭다. 주객분리의 존재론적 형세는 물속의 주객분리만큼이나, 아니 더욱 치명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지 못하고 사물이 사물로서 자유롭게 있지 못하는 비본래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 타락이다.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으면서 기다리며, 가만히 바라보며, 노래하고 말하며, 헤엄치며 사는 삶에 비하면 주객분리의 엄격함이란 … .


주관과 객관, 아我와 타他를 넘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속살 그대로, 속살 그대로의 너를 만나고 싶다. “아무 말 없는 대화”(‘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악뮤)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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