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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22)

2021.08.17 | 조회 447 | 공감 0

'진아'의 정체성正體性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총명하고 밝은 사람은 느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고, 오직 한 뜻으로 행하고 삼망을 고쳐서 삼진에 이르면, 삼신의 조화의 기틀이 크게 발휘하느니, (삼신의) 성에 통하여 공업을 완수하는 것이 이것이다[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


(「삼일신고」)-(5)


「삼일신고」가 제시하는 수행법은 삼신하느님에게서 받은 ‘삼진’으로 돌아와 진정한 의미의 ‘진아’로 거듭나는 길을 안내한다. 


밝고 지혜로운 사람[哲人]은 수행을 통해 스스로 노력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수행은 ‘삼법수련三法修練’이 중심이다. ‘삼법수련’은 정심하여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느낌을 그치고[止感],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몸에 쌓이는 삿된 기운을 맑고 투명한 기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호흡을 조절하고[調息], 정기를 보존하면서 이를 지키기 위해 신체적인 접촉을 금하는 것이다[禁觸].


이러한 수련과정을 거치면서 ‘철인’은 그릇된 마음[惡], 탁한 기운[濁], 천박한 몸[薄]을 바꾸어 삼신하느님께서 내려준 세 가지 진실한 특성, 즉 밝고 선한 마음[善], 맑고 청아한 기운[淸], 정력이 돈후한 몸[厚]으로 전환하여 소아小我에서 ‘진아’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진아’로 거듭난 사람은 삼신하느님이 내려준 본연의 성[性], 진실한 명[命], 온전한 정[精]으로 돌아와[返眞] 이를 잘 간직하고 보존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은 티끌만큼도 거짓됨이 없이 순진무구하고 선한 마음이니 상철이 통하고, 진정한 명은 전혀 오염되지 않은 맑고 깨끗한 생명의 기운이니 중철이 알고, 진정한 정은 천박함이 전혀 없는 덕망을 갖춘 중후한 정력이니 하철이 보존한다[眞性 善無惡 上哲通 眞命 淸無濁 中哲知 眞精 厚無薄 下哲 保]”(「삼일신고」)고 하기 때문이다.




‘상철은 진성에 통通하고’, ‘중철은 진명을 알고[知]’, ‘하철은 진정을 보존한다[保]’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보다 선명鮮明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양 고대의 철학자 플라톤(Platon)이 제시한 (正義 : righteousness)에 대한 분석을 간략하게 검토하여 비교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가장 올바르고 진리에 부합하는 도의’이므로 ‘삼진’과 같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인식하기 위한 일환으로 ‘누가 최고로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가’를 주도면밀하게 탐색한다. 그는 인간을 우선 형성된 구조에 대응하는 기능성의 관점에서 분석하는데, 인간의 형체는 크게 세 부분, 즉 머리 부분, 가슴 부분, 배(팔다리)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 세 부분은 각기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지만,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면 각기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작용한다.


머리 부분은 지혜智慧에 해당하는 이성적理性的인 사고가, 가슴 부분은 용기勇氣에 해당하는 기개적氣槪的인 기상氣像이, 배 부분은 절제節制에 해당하는 육체적인 욕망의 욕정欲情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지혜’는 진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사유능력이 중심이고, ‘용기’는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을 굳센 의지로 실현하는 기개의 씩씩한 기상氣像이 중심이고, ‘절제’는 육체적인 욕망이 정도를 넘지 않도록 조절하여 통제하는 제어능력이 중심이다.


이성적인 사고가 없는 기개는 맹목적이고, 기개가 없는 이성적인 사고는 공허하다. 욕정은 이성적인 사고와 기개적인 의지의 중심에 있다.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르게 작용하지만, 그럼에도 하나[一]로 통일되어 조화롭게 작동할 수 있다.  ‘정의로운 사람’은 여기에서 성립한다. 다시 말하면 머리로는 옳고 그름을 인식하는 이성적인 사고를 하고, 가슴으로는 이성의 올바른 판단을 단호한 의지로 실현하는 굳건한 기개를 발휘하고, ‘이성’과 ‘기개’의 중심에 있는 배 부분의 욕정으로는 오직 이성의 올바른 판단과 기개의 의지에 순응하여 절제된 욕망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곧 본연의 ‘정의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운 인간’에서 ‘정의’가 무엇인가를 추론하여 인식할 수 있다. 즉 ‘지혜’가 없는 ‘용기’는 사리事理를 분별하지 못하므로 맹목적이고, ‘용기’가 없는 ‘지혜’는 현실화되지 못하므로 공허하다. ‘절제’는 ‘지혜’와 ‘용기’의 그 중심에 있다. 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통일하여 ‘하나’가 되었을 때 ‘탁월한 정의’가 성립한다. 여기에서 ‘하나’로 통일된다는 뜻은 ‘용기’가 ‘지혜’를 절대적으로 따르고, ‘절제’는 ‘지혜’가 내놓은 올바른 판단과 ‘용기’의 의지에 의해 제약된 욕망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지혜’, ‘용기’, ‘절제’가 각기 따로 작동한다면, ‘하나’로 통일된 ‘탁월한 정의’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플라톤은 ‘지혜’, ‘용기’, ‘절제’가 질서 있고 조화롭게 하나로 통일된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올바르고 진실한 ‘정의’로 보았던 것이다.




머리 부분에서 작동하는 ‘지혜’는 ‘상철’에 해당한다. 지혜를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 이성理性과 신의 영역을 직관하는 영성靈性을 모두 포함하는 것은 마음[心]이다. 마음은 삼신하느님의 ‘진성’에 통할 수 있다. 따라서 본연의 밝은 마음은 만상萬象과 그 이치를 꿰뚫어 알고 있으므로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된다.


가슴 부분에서 작동하는 ‘용기’는 ‘중철’에 해당한다. ‘용기’로써 생존에 대한 의지와 의기義氣를 발현하는 것은 기[氣]이다. 기는 삼신하느님의 ‘진명’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연의 맑은 기는 만물이 구성되는 이치를 알아 미혹됨이 없이 마음이 가는 대로 의기意氣를 발현함에 거리낌이 없다.


배 부분에서 작동하는 ‘절제’는 ‘하철’에 해당한다. ‘절제’로써 마음과 기의 움직임에 따라 욕망하는 것은 몸[身]이다. 몸은 삼신하느님의 ‘진정’을 보존할 수 있다. 따라서 본연의 돈후한 몸은 결연한 의지에 순응하여 부족함이 없는 정력으로 온갖 중요한 기틀[萬機]을 질서 있게 실현하는 데에 아무런 막힘이 없다.


‘지혜-용기-절제’가 하나로 통일된 것이 ‘탁월한 정의’이듯이, ‘성-명-정’이 하나로 통일된 것은 바로 ‘진아’이다. 다시 말하면 ‘진성’에 통하고, ‘진명’을 알고, ‘진정’을 보존하는 ‘진아’는 곧 통일된 하나로 돌아옴이다. 한마디로 ‘삼진귀일三眞歸一’이 그것이다. 그래서 「삼일신고」는 “하나를 잡으면 셋이 머금고,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옴의 도의는 근본이 되는 강령으로 삼는다[執一含三 會三歸一之義로 爲本領]”(『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고 했고, 『단군세기』 <서문>은 “하나를 지키면 셋이 머금어 있고, 셋이 모이면 근원의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이것이다[乃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者 是也]”라고 했던 것이다.


‘성-명-정’이 하나로 통일된[三眞歸一] ‘진아’는 소위 우주적인 본체를 함의하는 ‘대아大我’이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하나로 돌아온 참된 것, 이것이 대아가 된다[歸一之眞 是爲大我也]”고 표현했다. 다시 말하면 ‘삼진귀일’이 된 ‘진아’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이는 ‘개별적인 자아[個我]’에 내재된 ‘진아’가 우주적인 본체인 ‘대아’와 질적으로 같은 것임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은 전적으로 삼신하느님이 깃들어 존재하고, ‘삼진’을 온전하게 받아 나온 인간은 ‘삼법수련’을 통해 ‘잠재적인 삼진’을 ‘현실적인 삼진’으로 일깨워 ‘진아’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 속에 부분이 내재하고 부분 속에 전체가 반영되어 있다는 논리와 부합한다.


‘삼법수련’을 통해 ‘삼진귀일’이 된 ‘진아’가 우주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힌두교, 도교, 불교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해 보자.




신비주의적인 밀교문헌인 『우파니샤드 Upanishad』는 ‘삼진귀일[三眞歸一]’을 “범아일여梵我一如”로 표현한다. “범아일여”는 브라흐만[梵 : Brahman]과 개별적인 ‘진아’인 아트만[我 : Atman]이 하나와 같다[一如]는 뜻이다.


‘브라흐만’은 우주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으로 불생불멸하는 영원한 실재를 뜻한다. 이는 자체로 아무런 형체가 없기 때문에 감각될 수도 말해질 수도 인식될 수도 없지만,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으로 오직 최고의 신비적인 영적직관으로만 체험될 수 있을 뿐이다.


‘아트만’은 끊임없는 변화에 종속되는 ‘경험적인 소아小我’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깃든 대아大我를 뜻한다. ‘대아’는 자체로 창조되고 변화되는 것이 아닌 영원한 실재이지만, 창조된 모든 것들의 내면에 깃든 지극히 순수한 영혼이요, 근원의 본질이요, 궁극의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개아個我는 무엇이든지 전적으로 아트만에 의해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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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삼진귀일’을 “만법귀일萬法歸一”로 말한다. ‘만법’이란 우주 내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모든 사물, 즉 형형색색 천차만별로 존재하는 일체의 법[諸法]을 뜻한다. 그래서 불교는 우주를 대법계大法界로 말하는데, 이는 일체의 것들이 존재하는 원인을 찾아 추적해가면 결국 근원의 ‘하나’에서 유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법귀일’은 ‘일체의 모든 것이 결국 그 하나로 돌아감’을 뜻한다. 이로부터 우주만물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뜻, 한마디로 “만법일여萬法一如”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럼 “근원의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一歸何處]”라는 물음, 즉 ‘하나’는 자체로 무엇인가의 물음이 대두하게 되는데, 이 화두에 대한 대답으로 불교는 바로 진여眞如, 공空 등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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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교는 ‘삼진귀일’을 “수일守一”로 말한다. ‘수일’은 ‘하나를 굳게 지킨다’는 뜻이다. 그 ‘하나’는 무엇을 말하는가? 중국 최초의 도교경전으로 알려진 『태평경太平經』에는 ‘하나[一]’가 궁극의 도道이고, 도의 원기元氣가 근원의 실재로 언급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는 ‘도’의 뿌리이며 ‘기氣’의 시초이다. 시초는 수數의 시작으로 ‘하나’이다. 따라서 ‘하나’는 천지가 갈라지지 않았을 때 온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의 시초이므로 원기元氣이다. 이 원기를 받아서 유형무형의 우주만물이 창조되고 변화되어간다. 따라서 도교는 ‘개아’가 우주와 합일하기 위해 그 ‘하나’를 굳게 지키는 것[守一]을 수행의 궁극 목적으로 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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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이자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은 ‘삼진귀일’을 “존삼포일存三包一”로 말한다. ‘존삼포일’은 ‘셋을 보존하고 하나에 머금는다’는 뜻이다. ‘셋’은 ‘정精 ․ 기氣 ․ 신神’이고, ‘하나’는 ‘도道’를 가리킨다


그는 유학자로서 ‘성性’의 양육을 최고의 과제로 삼았던 인물이다. 이로부터 그는 “성性을 기르는 요령은 셋을 지니고 하나에 머금는 것이다. 셋이란 정과 기와 신이고, 하나란 도이다. 정은 능히 기를 생하고, 기는 능히 신을 생하는 것인데, 정이란 현기로 만유를 부지런히 길러 변화하게 한다. 기는 원기이니 선천의 많은 기 중의 으뜸이고, 신은 기의 시작이니 낮에는 머리에서 나오고 밤에는 배에 깃든다[其要存在三包一 三者 精氣神也 一者 道也 精能生氣 氣能生神 精者 玄氣 孶化萬有 氣者 元氣 先天衆氣之魁 神者 始氣 晝出于首 夜栖于腹]”(김시습의 잡저雜著)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성’의 양육을 위한 일환으로 ‘도’를 머금은 ‘정 ․ 기 ․ 신’을 보존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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