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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출신 마지막 고려왕비 노국대장공주(1)

2021.11.16 | 조회 102 | 공감 0

원나라 출신 마지막 고려왕비 노국대장공주(1)

- 천년의 사랑인가 정략적 통혼인가 


상생문화연구소 상뙤자브 어트겅자르갈 연구원


공민왕 왕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 보드시르(寶塔失里)는 원 황실의 제왕(諸王)이었던 위왕(魏王) 벌드투무르의 딸이다. 그녀의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1365년 고려에서 출산 중 사망했다. 1349년 10월, 연경(燕京)에서 8년째 숙위 생활 중이던 강릉대군(江陵大君) 왕기(王祺, 충숙왕의 차남)와 혼인하였고, 1351년 강릉대군이 31대 고려왕으로 즉위하면서(1351-1374) 그의 정비(正妃)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13세기 후반 이래 14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인 고려 국왕들은 원제국 황실과 통혼하였다. 이런 양측 간의 통혼이 양국의 정치적 관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공민왕비 노국대장공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두 사람이 혼인한 것은 어디까지나 공민왕의 정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아 왔다.


노국대장공주의 가계는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 황제의 치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빌라이의 장자는 친김(眞金)이었고, 친김에게는 차남으로 다르마발(答刺麻八刺)이 있었는데, 이 다르마발의 장남이 아모가(阿木哥)였으며 아모가의 넷째 아들이 벌드투무르(孛羅帖木兒)로서 노국대장공주의 부친이었기 때문이다.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의 5대손이라 할 수 있으며, 그녀의 가계가 당시 원제국 내에서 지녔던 위상이 결코 낮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쿠빌라이의 직계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계는 다른 가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밀렸다.




공주의 할아버지인 아모가의 부친인 다르마발은 1264년 쿠빌라이의 손자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장애가 있고 유약하여 그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쿠빌라이가 그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황실 궁녀 중 적임자를 구한 결과 노국공주의 증조모에 해당하는 곽씨(郭氏)가 선택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 곽씨는 여진족 출신으로 추측되는데 출신으로 인해 다르마발과 곽씨의 아들 아모가는 항상 천대와 업신여김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처지를 금전적으로 보상하려는 것처럼 황제들이 하사금을 내린 이야기가 전해온다. 1306년 성종 테무르(투무르)가 황질(皇姪) 아모가에게 보초 3천정을, 1311년에는 즉위 직후의 인종이 보초 2만정을, 1312년에는 인종이 정해현 식읍 65,000호를 하사한 바 있으며, 이후 아모가는 1314년의 7천정 하사를 시작으로 1315년 이후 매년 황제에게 1만정씩의 하사금을 받기도 했다.



아모가는 고려26대왕 충선왕과도 인연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충선왕이 어린 시절부터 무종·인종과 함께 자라 그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므로, 무종·인종의 이복형인 아모가와도 친분을 지녔을 가능성이 상정되기 때문이다.


충선왕은 1308년 무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지고, 1309년 무종·인종의 어머니인 다지태후(答己太后)를 따라 오대산(五臺山)에 갔다. 그는 이후 인종을 적극 보좌하는 등, 정치적 역정을 다르마발 가(家)와 함께 하였다. 이러한 이력을 가진 충선왕으로서는 다르마발 가의 일원인 아모가와도 친밀하게 지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바이다.


그런데 아모가의 인생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다. 1317년 그의 인생에 큰 위기가 닥쳐왔으니, 돌연 고려 탐라(耽羅)로 유배된 것이 그것이다. (이 유배의 원인은 현재 미상이다) 아모가가 유배돼 고려에 도착하자 고려는 그에게 객관(客館)을 제공하고 위로했으며, 추후 그가 소환되자 충숙왕의 왕비인 덕비(德妃)가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기는커녕 대청도로 재배치되었다.


이는 그가 1318년 6월 발생한 조자옥(趙子玉)의 역모 논의에 연루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자옥 등은 병기와 의갑(衣甲), 기고(旗鼓)를 준비한 후 고려에 가서 아모가를 대도(大都)로 모시고 적절한 때에 그를 옹립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결국 조자옥 등이 산동성의 이진현(利津縣)에서 붙잡히고 모두 주살되기에 이르렀다.





얼마 뒤 원에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와 아모가를 대접한 사실을 문책하고, 그 다음 아모가의 왕부인(王附印)을 거두었다. 이후 아모가를 대청도로 옮긴 것도 그를 계속 탐라에 있게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한 때문으로 짐작된다.


아모가를 옹립하려고 한 조자옥(趙子玉)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가 조씨였던 점 자체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고려에서 유배생활을 할 당시, 아모가가 조인규의 후손인 조씨(趙氏) 일가의 구성원들과 친밀하게 지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1323년 아모가가 원으로 소환되어 돌아갈 당시의 일화로서, 다름 아닌 조연수(趙延壽)가 그를 호위했음이 눈에 띈다. 그런데 황제의 명령이 유배지에서 사신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음에도 아모가와 조연수 등이 평양(平壤)에까지 이른 것이 문제가 됐고, 사신이 황제의 명령을 어긴 죄로 조연수 등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아모가가 적극 엄호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아모가는 고려로 유배되고, 적거지를 옮기는 등의 곡절을 겪은 끝에 원 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모가의 고난의 끝은 결코 아니었다. 원나라로 돌아간 후 얼마 안 돼 사망한 것으로 전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위왕의 소환은 1323년 8월 영종(英宗)이 시해되고 10월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하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1324년 1월 태정제가 돌연 ‘제왕으로 멀리 옮겨져 있던 자들에게 부(部)로의 귀환’을 명령했고, 아모가도 대동(大同)으로 돌아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유배에서 풀려난 아모가는 5개월 뒤인 1324년 6월 원나라에서 사망했고, 그것이 자연사가 아닌 숙청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감지된다.


무종·인종의 이복형이었던 아모가에게, 인종의 조카이자 무종의 아들이었던 영종이 시해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아모가와 아무런 연고가 없던 태정제의 즉위는 아모가·무종·인종의 부친이었던 다르마발계의 퇴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던 탓이다. 태정제가 영종 시해 후 유일하게 남은 다르마발계의 인물로서의 아모가를 견제하려 했다면, 아모가는 이전에 비해 더욱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일 수도 있었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아모가와 인연이 깊었던 고려 조씨 일가의 대표 조인규(趙仁規)의 딸 충선왕비 조비(趙妃)와, 태정제의 여동생이었던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1315)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다시 말해 원 황실 진왕 가와 고려 조씨 가문 중 후자와 친밀했던 아모가는, 태정제의 즉위로 실로 큰 위기에 처했던 셈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 역시 태정제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추정되는 바가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아모가의 위상은 상당히 복합적이다. 출계, 재력, 인종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면 그 위상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혐의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6~7년 동안 유배를 당한 것으로 볼 때 어떤 범법을 행했거나 정치적 견제를 받은 점 또한 분명하다.


여러모로 볼 때 아모가의 위상은 생애 내내 전반적으로 불안정했으며 그 말로도 좋지 못했음이 확인되는 셈이다. 그랬던 그가 영도한 가문이 공민왕에게 어떤 정치적 입지를 제공할 만한 가계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되며, 그 아들이자 노국공주의 부친까지 살펴봄으로써 그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도록 한다.



공주의 아버지인 벌드투무르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적으며, 아모가와 관련된 기사들에 비해 거의 없는 수준이다. 그가 부친 아모가의 왕위(魏王)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관련된 언급이 사서에 적다는 점은 그의 제국내 정치적 역할이 적었거나 황실내 위상이 부친보다 더욱 낮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아울러 벌드투무르의 행적은 이전 원 출신 고려왕 비빈들의 부친들이 보였던 행적에 비해 대단히 미약하다. 쿠빌라이, 진왕, 영왕을 비롯해 자신의 부친 아모가 및 심지어 급이 대단히 낮은 4자(字) 왕호(王號)를 지녔던 진서무정왕(鎭西武靖王)에 비춰 볼 때 어디 내놓기 어려울 정도의 경미한 행적이다.


비록 벌드투무르의 인(印)이 진서무정왕의 그것에 비해 높긴 했으나, 그 인 자체는 부왕 아모가로부터 이어 받은 것이었으며, 정치적 역할에서의 열세를 상쇄할 만한 것이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행적 중에는 특기할 부분도 없지 않다. 홍건적 토벌에 출전한 것으로도 전하고 있다. 다만 술을 좋아하고, 맡은 임무는 소홀히 했던 모양인지 어느 날 술을 먹고 놀다 잠 들었는데 깨어 보니 적(賊)의 무리에게 잡혀 있었다.


죽음의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고 적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그를 구하러 온 몽골인인 탑불태가 “어찌 그리 살고 싶단 말이냐?”라고 위왕을 걷어차고 비판했다는 내용이 전하고 있다. 탑불태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위왕 벌드투무르는 끝까지 살려 달라고 빈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비루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에는 그 역시 부친 아모가와 마찬가지로 말년이 무사(無事)하지 못했던 듯한데, 1370년 주살당했다는 기록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에게 어떤 이유로 주살 당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제국의 해체와 지도층의 북쪽으로의 귀환 과정에서 벌드투무르도 이동 중 홍건적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보는 견해, 또는 노국대장공주가 원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것이라는 견해 등이 제기돼 있다. 그러나 전자는 사료적 근거를 결여한 추정이며, 후자의 가정이 성립하기에는 처형 시점이 너무 늦다.


즉 아모가의 경우 황제(무종·인종)의 친형으로서 그 위상 자체는 낮지 않았으되 신분적 흠결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종국에는 정치투쟁에 휩싸여 제거된 경우라면, 벌드투무르의 경우 그 위상이 현저히 낮은 인물이었음이 분명한 경우라 할 것이다.


즉 벌드투무르는 공민왕이 즉위를 위해 장인으로 모실만한 대상으로는 부적합한 경우였다고 생각되며, 더 나아가 공민왕의 혼인을 그의 정략적 고려의 산물로 보기에는 노국공주 가계가 부와 조부의 행적에서도 드러나듯이 지나치게 허약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과연 왜, 또는 어떻게 해서 혼인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을까?


아모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안과 고려(충선·충숙왕) 사이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아모가의 딸 금동공주(金童公主,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가 1324년(충숙왕11년) 8월, 즉 아모가의 사망 두 달 후, 충선왕의 아들인 충숙왕과 원제국에서 혼인을 올려 충선왕과 아모가는 이를 계기로 사돈관계까지 맺게 됐기 때문이다.


혼인 1년 전인 1323년 10월 충숙왕의 고려인 왕비인 덕비(명덕태후)가 아모가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혼인은 그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전부터 아모가와 친했던 충선왕이 이 혼인의 주선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금동공주는 1325년 5월 충숙왕과 함께 고려에 왔고, 8월에는 왕과 함께 한양(漢陽)의 용산(龍山)에 설치한 천막에 묵었다. 그 때 금동공주가 낳은 아들이 용산원자(龍山元子)다. 불과 2달 후인 10월 금동공주는 용산행궁(行宮)에서 18세로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용산원자는 살아나았고 1342년 17세를 일기로 원나라에서 사망하였다.


충숙왕의 아들이었던 만큼, 이 용산원자(1325-1342)는 충혜왕과 공민왕(1330-1370)의 친형이자 노국공주(?-1365)에게는 고종사촌 오빠에 해당한다. 공민왕은 1341년 5월 원으로 건너갔는데, 그때 몽골에 체류 중이던 그의 이복형 용산원자를 만났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를 통해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던 노국공주를 알게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이미 1341년 무렵부터 서로 알게 지내는 사이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으며, 둘 다 쿠빌라이의 4대손, 5대손으로서 동질감도 느꼈을 수 있어 보인다. 일찍이 공민왕의 조부 충선왕이 노국공주의 조부인 아모가와 절친했고, 공민왕의 부친 충숙왕이 노국공주의 고모인 금동공주와 혼인까지 한 상황에서 공민왕과 노국공주도 대를 이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두 사람의 1349년 혼인에는 공민왕의 정략적 목적보다는 오랜 기간 알고 지내면서 축적된 애정이 그 요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교제하고 결혼까지 한 것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공민왕 역시 고려의 왕위를 향해 정치적 야심을 품었던 인물이고, 노국공주와의 혼인이 그에게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노국대장공주의 조부 아모가는 비록 출계, 재력, 인종과의 관계 등에서는 그 위상이 상당했으되 고려에 6∼7년 여간 유배된 데 이어 원제국으로 소환된 후에는 바로 사망하는 등 말년에 그 정치적 입지가 크게 위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부친인 벌드투무르 역시 별다른 정치적 역할이 확인되지 않아, 노국대장공주가 성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 가계의 위상이 대단히 낮았을 가능성이 포착된다. 따라서 공주의 가계는 공민왕이 즉위를 위해 처가로 인연을 맺고자 하기에는 부적합한 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두 사람의 혼인을 정략적 목적의 결과로만 보는 종래의 견해에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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