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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출신 마지막 고려왕비 노국대장공주(2)

2021.11.18 | 조회 76 | 공감 0

원나라 출신 마지막 고려왕비 노국대장공주(2)

- 천년의 사랑인가 정략적 통혼인가 


상생문화연구소 상뙤자브 어트겅자르갈 연구원


공민왕 즉위의 배경

노국공주의 가문이 취약하여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면, 두 번 씩이나 뒤로 밀린 공민왕의 1356년 즉위를 가능케 한 결정적 계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계기는 고려의 내부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고려의 대외정세로부터 온 것이었을까? 아울러 그러한 변수가 과연 어느 정도 규모의 파급력과 파장효과를 지녔던 것이었기에 원제국에서도 공민왕의 즉위를 승인했던 것일까?


충정왕(공민왕의 전대 왕)이 재위하였던 3년여간 고려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고려 정국은 권력투쟁으로 시끄러웠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1349년 1년간 3번이나 인사단행이 이루어졌던 것이 확인된다. 미성년 국왕의 집권이 당시 고려 관료들에게는 불안정한 사태로 다가와 끊임없는 권력 다툼으로 이어지고, 그와 같은 현상이 여러 번의 인사단행으로 표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배전, 강윤충, 윤시우 등 덕녕공주(충혜왕의 왕비, 원나라 출신)와 희비(충정왕의 모후, 충혜왕의 두 번째 왕비)의 최측근들이 뇌물을 받고 국정을 오염시키고, 관리 임명을 마음대로 하거나 남의 관직을 빼앗는 등 국가 인사의 공정성을 훼손하고, 죄를 지어도 꾀를 써 처벌을 면함으로써 법질서를 문란케 하는 등 고려의 내정을 혼돈으로 몰아놓고 있었다.




사신(史臣)의 표현처럼 덕녕공주와 희비가 왕의 어머니라는 명목으로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간신과 외척은 밖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통에, 정작 고려국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린 군주의 모후를 비롯한 권력지향적 왕실 인사와 관료들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결과, 고려는 공민왕이 말한 것처럼 ‘조정에는 요행으로 자리에 오른 자가 많고, 창고에는 저축해둔 곡식이 없는’ 비상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던 셈이었다. 이런 혼란은 사실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내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어린 국왕 대신 성인 국왕을 세우는 것이 현실적 방안으로 고려 내부에서 떠올랐을 수 있다. 이미 심왕옹립운동 등을 통해, 현왕을 더 나은 왕 후보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고려관료들이 ‘익숙’해져 있었음이 확인된다. 실제로 충목왕이 사망한 후 일군의 고려관료들이 공민왕을 옹립하려 하기도 했다. 왕후(王煦), 이제현(李齊賢)을 비롯한 고려의 중신들, 조일신(調日新) 등 공민왕을 연저(燕邸)에서 모셨던 수종신료(隨從臣僚)들, 그리고 이곡(李穀)·윤택(尹澤) 등의 유학자 집단 등이 그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과 달리 원제국은 충정왕을 차기 고려왕으로 책봉하고 말았다. 그리고 공민왕을 지지한 이들의 고난이 시작됐다. 1349년 7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맡았던 왕후가 사망하고, 김경직, 이승로, 윤택 등은 좌천되었다. 다음 달인 8월 정치도감이 폐지되고, 곧이어 이곡도 사망하였다. 고려의 개혁은 정지됐고 혼돈의 전망만 남은 상황이었다.


또 다시 유소년을 고려의 왕으로 책봉할 경우, 이런 혼란이 뒤따를 것임을 원제국 정부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황제가 충목왕에 이어 또 다시 충정왕을 책봉한 것은, 결국 원제국 정부가 고려내부의 안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거나, 충목왕대의 상황을 (혼란이 아닌 안정으로) 오판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충목왕이 사망할 무렵에는 그가 즉위한 초기와는 달리 고려정부의 내부정비 동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 원제국의 충정왕 즉위 승인 3개월만인 1349년 8월 정치도감이 폐지되었다. 어린 충정왕에 큰 영향력을 지녔던 모후는 몽골 공주였던 충목왕의 모후와는 달리 고려 여인이었다. 그런 점에서 충혜왕의 폐정을 수습하고자 몽골 공주의 아들이기도 했던 충목왕을 세웠던 당시와는 다른 고려가 필요했는데, 관성에 따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충정왕을 책봉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충정왕의 2,3년여 재위기간 동안 더욱 극심해진 고려 내부의 혼란이었다. 그 혼돈이 원제국 정부의 주의를 끌 정도였던 것으로 전제한다면, 원제국이 그를 해소할 방책을 모색한 결과 공민왕의 즉위를 승인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충정왕대 고려의 내부상황이 극도로 혼란해졌고, 원제국으로서도 고려내정의 혼란 해소를 위해 성인왕을 즉위시켜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 것이 공민왕의 즉위에 하나의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고려의 외부 환경이 급변하던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뒤 이어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한다.



당시 고려의 외부환경은 어떠했을까? 고려의 안위를 위협하거나, 더 나아가 원제국을 불편하게 하고 있던 동아시아 차원의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았는가?


공민왕 재위기간 동안 고려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 사건으로는 홍건적의 침공이 눈에 띄지만, 홍건적은 1350년대 말 등장해 1360년대 초 고려를 집중 공략한 사건으로 공민왕 즉위와는 시기적으로 무관한 정황이다. 따라서 공민왕 즉위시점에 맞물려 전개된 또 다른 변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변수로는 당연히 ‘왜구’ 문제가 상정된다. 종래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 역사상 왜구가 최초로 등장한 시기는 1223년(고종10)이며, 그 이후 1265년(원종6년)까지 40여년간 11건의 침략이 발생했다. 왜구의 선박은 평균 2척 정도, 인원은 수십 명 정도에 불과하였고, 그 행동 범위도 쓰시마(對馬島)에 가까운 경상도 연안 일대에 집중됐으며, 약탈이 끝나면 곧바로 물러갔다. 14세기 중엽까지는 왜구의 침략이 거의 없었으며, 고려도 1265년부터 1349년까지 약 85년간은 왜구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1350년(충정왕2) 2월경, 최대 규모의 왜적 침구가 시작되기에 이른다. 1350년 왜구는 고성(固成), 죽림(竹林), 거제(巨濟), 합포(合浦), 동래부(東萊府) 등 경상남도 해안지역을 공격하였고, 순천부(順天府), 남원(南原), 구례(求禮), 영광(靈光), 장흥(長興), 안양향(安壤鄕), 등 전라남도의 해안지역도 공격하였다. 즉 왜구 침공 첫해였던 1350년에는 그들의 공격이 한반도 남해안에 집중됐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다음 해인 1351년의 경우 왜구의 공격지점들이 달라졌음이 주목된다. 자연도(紫燕島, 오늘의 영종도), 삼목도(三木島, 인천 중구), 남양부(南陽府) 쌍부현(雙阜縣, 화성시 장안면) 등 경기도 해안지역이 공격을 받은 것이다. 침략의 규모도(130척) 전 해에 비해 컸지만, 세 지역 모두 고려 수도 개경과 가까운 지역이었다. 즉 왜구는 1350년에는 한반도 남해안에만 출몰하다가 1351년(8월 10일)에는 드디어 수도권 해안에도 등장했던 것이며, 그 규모 또한 더 커진 만큼, 고려사회는 크게 동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왕의 연구에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14세기 중엽 왜구의 규모는 그 배경 및 출신 등을 감안할 때 14세기 전반 동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일본세력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일본 남북조 간의 갈등에서 배태된 세력으로, 병참물자와 식량을 확보하고자 동북아시아를 휩쓸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료에서 묘사된 왜구들의 잔혹성, 폭력성, 집단성은 14세기 초 제국을 향하던 일본인들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일종의 군사집단에 필적했던 이들의 도발에 원제국 또한 깊은 관심을 갖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 한국사 사전3


물론 《원사》는 원제국이 왜구의 피해를 보기 시작한 시점을 1350년대 말인 1358년으로 꼽고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1350년대 초에는 원제국정부가 왜구의 위협을 그리 심각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원제국이 1358년 이전에는 왜구의 침구를 받은 것이 전무하다고 단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왜구의 중국 침략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더러 확인되기 때문이다.


절서(浙西)의 숙정염방사(肅政廉訪使)에 제수된 월로불화(月魯不花)의 입전에는, 장사성(張士誠)이 절서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왕(王)을 자칭(自稱)하던 상황이 묘사돼 있다. 월로불화가 도적(장사성)과 한곳에서 머무를 수 없다면서 경원(慶元)으로 향했는데, 도중 철산(鐵山)에서 수많은 왜적의 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월로불화는 이에 왜구군대와 뜻밖의 전투를 벌이게 된다. 전투 와중에 월로불화의 아들인 추밀원판관(樞密院判官) 노안(老安)과 조카 백가노(百家奴)를 비롯한 80여 명이 죽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월로불화가 왜구와 이 전투를 치른 시기는 미상이나, ‘장사성(張士誠)이 왕(王)을 자칭(自稱)했다’는 내용을 감안하면 그 시기를 대략 1353년경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1353년 《원사》 본기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구가 원제국을 침구한 최초 시점을 《원사》 본기에 기록된 1358년보다 더 이른 1350년대 전반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중국 연안이 1350년대 내내 왜구의 사정권에서 비껴나 있었을 가능성은 적었던 셈이다.


아울러 1351년 8월 10일, 왜구가 역대 최대 규모로 고려 경기도 해안을 침구하던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 원제국의 서주(徐州) 지역도 “적군(賊群)”의 공격을 당했음이 주목된다. 서주지역은 오늘날의 위해시(威海市, Weihai)로, 중국 산둥 성(山東省) 산둥 반도 북부 해안에 있는 군사 도시로서 명(明)나라 초기 왜구를 막기 위한 방위소까지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고려의 자연도·삼목도와의 거리는 해상으로 300여km 정도에 불과하다. 서로 가까운 거리의 양국내 특정지역이 공교롭게도 같은 날 공격을 받았던 셈이다.


물론 지리적 근접성만을 근거로 서주 일대를 강타한 적군이 당시 한반도 서해 유역에서 활동하던 왜구였을 것이라 추정하는 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서주를 공격한 세력이 일본발 왜구가 아닌 중국의 또 다른 지역에서 흥기한 토착세력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세력으로부터의 침구侵寇 자체는 원제국정부로서도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장 전 해(1350년) 고려가 오랜만에 왜구로부터 받은 침략을 모르지 않았을 원제국정부로서는 서주지역의 피침(被侵)이 일종의 ‘경종’이었다. 따라서 왜구가 제국 해변을 직접 공격한 것은 비록 몇 년 뒤였다 하더라도, 원제국정부가 해상세력의 동향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미 1350년대 초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1351년의 피침은 원제국정부로 하여금 왜구 등 여러 해상세력의 ‘한반도 위협’이 ‘제국의 안보’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이기도 했을 것이다. 1352년 8월 일본국에서 “고려적(高麗賊)이 바다를 건너와 약탈하고, 자기가 섬에 거주하는 민이라 한다”고 원제국에 음해성 정보를 알려오고, 고려국왕 백안첩목아(伯顏帖木兒, 공민왕)가 그 무리를 소탕한 공을 포상하고자 원제국이 공민왕에게 금계요(金繫腰) 하나, 초(鈔) 2천정을 하사한 것은 원이 왜구의 위협성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1351년 적군의 서주 공격은 동시기 한반도의 사정을 제국정부에 환기함과 동시에, 원제국정부로 하여금 한반도 정세의 관리를 강화할 필요를 절감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필요에 따라, 결국 왜구의 방비나 진압에 고려가 더 많은 역할을 해 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원제국이 고려에 경계 강화를 종용할 필요성이 이전에 비해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고려의 내부 정정(政情)은 어린 충정왕을 좌지우지하는 권신들의 준동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워 왜구에 대한 효과적 제어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왜구방비에서 고려정부의 무능력함과 기강 문란이 노출되었다.


1351년 8월 10일 왜구의 자연도, 삼목도 침구 당시 충정왕이 이권(李權)으로 하여금 서강(西江)에 진을 치고 방비하게 했는데, 며칠 후 이권이 돌아와 충정왕에게 ‘자신은 녹봉을 먹지 않으니 명도 받들지 않겠다’며 출정을 거부했던 것이다. 역대 최대 규모의 왜구가 개경 인근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정작 출정 명령을 받은 관료가 항명을 한 사태는 당시 고려정부의 무력함과 기강문란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것이었으며, 원제국정부로서는 실로 난감하거나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충정왕은 왜구 국면이 불거지기 전 단순히 충혜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책봉된 자였을 뿐, 원제국정부가 새로이 필요로 하던 역할(고려군 지휘, 왜구 방비)을 대행할 적임자가 아님이 날로 명확해져 갔던 셈이다.


실제로 원제국 정부는 적군의 고려 자연도, 삼목도 침구 및 ‘왜구’의 서주 공격이 있었던 1351년 8월 다음 달인 9월 고려국왕 교체를 결정하고, 그 다음 달인 10월에는 고려에 알리는 등 실로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후보로는 공민왕을 택했으니, 유년 고려왕 대신 성인 왕의 즉위가 요망되는 상황에서 그간 몇 년간 고려왕 후보로 꾸준히 거론돼 온 인물이자 연령 차원에서도 원제국의 필요를 충족했던 공민왕이 낙점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에 도착한 공민왕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 중 하나가 왜구방비에 관련된 것이었던 점 또한 원제국 정부가 왜구 방비를 대행할 적임자로서 공민왕을 선택한 것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1352년(공민왕1년) 3월 재추(宰樞)로부터 이서(吏胥)까지 거의 모든 관료들에게 무기를 나눠 주었고, 훈련정도와 장비상태를 검열하였다. 4월에는 원제국도 활 300개, 화살 30,000개, 검(劒) 300자루를 보내오는 등 공민왕의 왜구 방비를 적극 지원하였다. 대량의 무기지원은 2달 뒤인 6월에도 이뤄졌는데, 고려 측의 요청에 따른 지원이었다.


당시 원제국정부가 고려의 왜구 방비를 지원하는 데 적극적이었던 것은 결국 왜구의 한반도 침입 및 대륙 침구 가능성을 인지한 결과로 생각되며,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즉위도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치안이 곧 동아시아 치안의 문제로 급부상했던 셈인데, 결과적으로 원제국의 고려왕 교체 목적이 고려를 활용한 제국의 방변(防邊) 강화에 있었음이 정황상 확인되는 것이다.


즉 공민왕의 즉위에는 원제국 해안까지도 위협하고 있던 왜구들이 한반도를 우선적으로 공략하는 상황에서 어린 충정왕으로는 고려를 활용한 제국의 방변(防邊) 전략이 지탱될 수 없다는 원제국의 판단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7-8여간 누적된 고려의 혼란에 더해 왜구 등으로 인한 한반도 방비 강화 필요성이 복합되어 원제국이 공민왕을 즉위시킨 것이라 여겨진다.


이상에서 노국공주를 공민왕의 배우자, 또는 공민왕의 즉위를 가능케 한 변수로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정치인 또는 정치세력 대표로서의 노국공주를 살펴볼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노국공주 본인 및 그 가계의 낮은 위상을 고려할 때 그녀를 즉위를 노리던 공민왕의 정략의 대상이었다고만 보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공민왕의 즉위에는 원 공주의 남편이라는 추상적 권위보다는 원제국 해안까지도 위협하고 있던 왜구들이 한반도를 우선적으로 공략하는 상황에서 어린 충정왕으로는 고려를 활용한 제국의 방변(防邊) 전략이 지탱될 수 없다는 제국측 판단이 더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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