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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둥글다(2) -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2021.11.19 | 조회 91 | 공감 0

존재는 둥글다 (2)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Ⅱ.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은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너♪”

2014년에 발매된 ‘썸’(some)이란 노래의 가사 일부이다. 서로 호감을 갖고 있고, 또 때로 특별한 구속 없는 만남도 이뤄지고 있지만 사랑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남녀 사이를 ‘썸’이라 부르며 그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남녀 가수의 듀엣곡인 이 노래는 발표 당시 8개 음원 사이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대박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히트인 것은 노래가 나오고 나서 ‘썸’은, 원래 그런 뜻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은 분명하지 않지만 막 사랑이 움트는 사이를 가리키는 말로 엄청난 유행어가 되었다. 생각하면 그런 단계를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말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런 사이라는 게 딱 꼬집어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 노랫말은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온몸이 파릇파릇 반응하면서 때론 달콤하고 때론 쌉싸름한, ‘사랑이 (아직) 아니다.’는 말은 부족하고 ‘(이미) 사랑이다.’는 말은 과한 남녀관계를 말로써 나타내고 있다. 정작 노래를 부른 남자 가수는 처음 그 부분을 듣고 “말장난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고 했지만, 불확정적인 썸의 ‘사랑’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본이라 할 존재가 그렇다. 존재는 ‘있는 듯 있지 않은 있는 것 같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유야무야有耶無耶하다.’ 현명한 사람들이 굳이 유무 중 하나를 택해 말하지 않음도 따지고 보면 그에 연유할 것이다.


“순수 존재는 순수 무와 같다.”(헤겔)


“현묘한 이치는 없고 없고 있고 있고 있고 없는 중中에 있다 [妙妙玄玄玄妙理 无无有有有无中].”(일부一夫 김항金恒)


“브라만은 존재로도 무로도 말해질 수 없다.”(바가바드기타)


“지극한 큰 하나[大一其極]는 … 무와 유가 뒤섞여 있다[無有而混].”(발귀리發貴理) 등.


그러면 존재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하이데거는 194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 취임 강연인 Was ist Metaphysik?(『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의 4판을 출간하면서 ‘Nachwort[後記]’를 추가한다. 그는 그곳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든 존재자와 단적으로 다름은 존재자-아님(das Nicht-Seidende)이다. 그러나 이 무는 존재로서 현성한다. 만일 우리가 무를 단순한 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성급한 판단이다.


우리는 그렇게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무의 난해하고 다양한 의미를 포기하지 말며,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Weiträumigkeit)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무란 존재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존재가 스스로를 펼치는 영역화의 사태란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리고 그 점을 이해하는 것이 그의 존재 물음에 올바로 들어서기 위한 준비가 될 것이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 사유에서 우주의 궁극적 목적이나 존재의 최종 근거를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에게 존재는 근거가 아니며 신神은 더욱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어떤 무엇으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님’(das Nicht-Seidende)으로서 무와 같다. 이때의 무는 전통 형이상학이 이해하듯, 존재자 전체의 부정이나 아무런 내용도 없는 게 아니다.


불교 및 인도 철학자인 Zhihua Yao는 지금까지 동서 사유에서 논의된 무 개념을 다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Typology of Nothing: Heidegger, Daoism and Buddhism」)

1) 일반적으로 부재不在로 알려진 결여적 무

2) 부정적인 무 혹은 총체적 무

3) 본래적 무, 즉 존재와 존재론적으로 등가等價인 무.


1)의 무는 예컨대 그림자, 차가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결핍의 그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결여이고 후자는 따뜻함의 부재不在이다. 노자의 ‘무위無爲’나 ‘무명無名’에서의 무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2)의 무는 칸트가 개념이 없는 빈 대상이라고 가리키는 것으로서 “논리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자기 모순적인 개념의 대상은 무이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은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것(부정적 무)이기 때문이다.”(Kritik der reinen Vernunft) 예컨대 ‘불임不妊인 여자의 아들’, ‘둥근 사각형’과 같이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 3)의 무는 텅 비어있지만 동시에 존재 분만分娩의 가능성으로써 충만돼 있다. 존재로서의 무이다. 예컨대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의 근원인] 천문天門은 무유无有며 만물은 이로부터 나온다[天門者无有也, 萬物出乎无有].”(『장자』 「경상초庚桑楚」)


또한 불교의 공空 개념이 이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공은 ‘고유한 본성의 결여[無自性]’를 가리킨다. 중관학파, 유가학파 등 여러 종파들 사이에서 공에 대한 해석은 차이를 보이나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즉 절대적 실재가 공 개념을 통해 드러난다는 이해가 지배적이다. 이른바 이 묘유진공妙有眞空의 공 또한 본래적 무이다.


하이데거에서 무는 위 유형론에 따르면 세 번째의 무, 즉 본래의 무 또는 존재로서의 무에 해당한다. 그는 유와 무가 공속성共屬性을 이룬다고 해명한다. 이는 확고한 배중률排中律의 형식논리로써는 하이데거의 유무 문제에 올바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명제와 그것의 부정 둘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참이라는 배중율에 따르면 유 아니면 무일 뿐이지, 유무 양립을 말하는 3)의 이해란 부조리하거나 기껏 ‘신비한’ 소리이다. 이는 공속성으로 있는 유무의 사태는 개념이나 논리로써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명백한 것들의 여백에 있음을 지시한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제시하는 무에 대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술한다.

“무는 하나의 대상도 하나의 존재자도 아니다. … 무는 존재자에 대한 반대 개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존재자의 존재에 무의 무화無化가 일어난다.”


“사유가 존재를 사유하기 때문에 사유는 무를 사유한다.”


“존재자의 타자로서의 무는 존재의 면사포(Schleier des Seins)이다.”


“존재와 무는 서로 나란히 병렬적으로 생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친족 관계 속에서 일방은 타방으로 향하고 있다. … 무가 존재자로서 존재하지 않는 그만큼 존재도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이상 Wegmarken『이정표』)


따로 설명이 요구되는 말들이지만, 하이데거는 존재와 무를 함께 속하는 것으로 또는 등가적等價的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비교적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무에서 모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것[존재]의 영역성을
경험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무에서 경험하는 것은 바로 존재 자체이다.”


여기에 이르러 앞의 인용문에 담긴 의미는 다음과 같이 좀 더 구체화된다.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하며, 나아가 이 공속성은 둘 사이의 ‘사이’를 이루는 존재 자체의 영역으로부터 성립한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유와 무의 동일성과 그것의 영역적 성격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이미 말한 대로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은 은폐와 어둠, 즉 비진리로부터 비은폐와 밝음의 진리로 자신을 펼치는 일어남, 사건으로 이해돼야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본질’(Wesen)은 ‘현성하다’(wesen)라는 동사적 사태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서구 형이상학의 존재 망각은 그렇게 생기하는 현성함으로서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한 데 있다. 그 대신 형이상학은 개념적으로, 명사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예컨대 이데아, 실체, 정신과 같은 존재자성性(존재자로서의 존재자)을 존재로 여긴다.


“형이상학은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물음에 답하면서 이것[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앞서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 그렇지만 형이상학은 존재 자체를 언어로 이르게 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형이상학이 존재를 진리에서 사유하지 않고 진리를 비은폐로서 그리고 비은폐를 본질에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의 발언들은 “그 형이상학의 시작에서 완료에 이르기까지 기이한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자의 철저한 혼동 속에 움직이고 있다.”

(이상 Was ist Metaphysic?『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존재 자체가 발현의 사건으로 밝혀짐에 따라, 존재와 상반되는 무는 존재 진리의 숨김과 감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이데거에서 유와 무는 곧 감춤과 밝힘, 은닉과 발현의 문제가 된다. 때문에 무와 존재는 따로 떨어진 것일 수 없다.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비은폐로 환히 트임인 한, 그것은 언제든 다시 은닉과 부재로 달아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은닉은 발현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이며 발현은 은닉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은닉으로서의 무는 존재를 존재로서 열어 보여주는 가능성으로서 “근원적으로 [존재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Wegmarken) 무는 존재를 감추면서 동시에 내보이는 “존재의 면사포”이다. 반면 존재의 편에서 보면 존재는 은닉의 면사포, 부재의 어둠을 뚫고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존재는 무로부터의 탈은폐脫隱蔽로서 무에 속한다.


그리하여 은현동시隱現同時, 은닉과 비은폐는 동시적이며 함께 속하는 것이다. 곧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와 무는 마치 산과 골짜기처럼 서로를 포함한다.

“존재자의 개방성은 필연적으로 그 자체 은닉의 극복이다. 마치 계곡이 산에 속하듯이 비은폐에는 은닉이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이다.” (Vom Wesen der Wahrheit『진리의 본질에 대하여』)


“존재와 무는 함께 속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매개도, 어떤 이행도 없다. 왜냐하면 둘은 그 자체 그들의 본질에 따라 직접적으로 서로 속하기 때문이다.”(Parmenides)


존재로서의 존재는 유도 무도 아니면서 동시에 둘 다이다. 존재는 ‘썸’이다.


이로써 존재와 무의 사이를 이루면서 둘을 동시에 붙잡고 있는 것은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존재 진리, 그 비은폐성의 열린 영역으로서 밝혀진다. 즉 둘의 중심이나 사이 영역은 은닉으로부터 발현하며 다시 은닉으로 달아나는 존재 자체의 진리 방식과 지평이다.


무에서 경험하는 영역성은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가 영역화하는 것이다. 그 영역은 존재의 진리가 머물고, 그럼으로써 존재와 무의 공속성이 일어나는 ‘동안의 폭’이자 ‘폭의 동안’으로서 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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