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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우크라이나Ukraine 침공

2022.04.07 | 조회 773 | 공감 0

신新 얄타 체제 등장 예고

푸틴, 우크라이나Ukraine 침공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격 침공 첫날 220여 명 사상

💥키예프 루스에서 탄생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가 한반도 정세에 끼치는 영향 



키이우 소피아 광장에 있는 우크라이나 독립 영웅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동상.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그들에게 하루빨리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그날이 오길 기원한다 (사진- 픽사베이)


러, 우크라이나를 동·남·북부에서 동시 공격

2월 24일(이하 현지 시각)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북부, 남부 등 3면에서 전차와 미사일을 앞세워 동시다발로 우크라이나 곳곳을 공격했다. 수도 키이우Київ(러시아어로 키예프Киев)를 비롯해 인근 보리스필 국제공항, 제2의 도시 하르키우Харків, 남부 항구도시인 오데사Одеса 등 전역이 폭격당했다. 작년부터 우크라이나의 동남북 3면을 둘러싸고 있던 러시아의 19만 대군이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대통령의 ‘특별 군사작전’ 선포와 동시에 침략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푸틴은 이날 대국민 연설에서 “(군사작전의 목적은) 지난 8년간 키예프 정권의 처형과 대량 학살에 고통받아 온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할 계획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KGB 출신다운 푸틴의 거짓말이었다.



▲우크라이나 폭격 상황


이날 우크라이나 북쪽 벨라루스Belarus에 주둔하던 러시아군의 탱크들도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러시아가 ‘합동훈련’을 핑계로 벨라루스에 병력을 집결시킨 것이 결국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한 준비였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우크라이나 남부에선 러시아가 지난 2014년 합병한 크림Крим반도를 통해 진입한 러시아 공수부대 등이 우크라이나 남부 도시 헤르손Херсон에 입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침략의 경과, 그리고 서방의 대응

러시아의 침공에 서방은 강력하게 대응했다. 러시아의 침공 사흘째이던 2월 26일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1,000정과 지대공미사일 500기를 제공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쟁 지역에 자국산 무기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엄격히 지켜 왔는데 이번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독일처럼 분쟁 지역에는 군사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해 온 스웨덴도 오랜 관행을 깨고 우크라이나에 대전차 무기 500정과 헬멧 5,000개, 야전 식량 13만 5,000명분 등을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유럽연합(EU)도 지난 27일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기 위해 4억 5,000만 유로(약 6,060억 원)를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또 러시아 항공기의 EU 역내 상공 운항을 금지했다.


경제 제재도 잇따르고 있다. 서방은 지난 2월 26일 러시아 스위프트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 퇴출이라는 초강력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양날의 칼이다. 스위프트는 200여 국가·영토에서 11,000개 이상의 금융기관들이 안전하게 결제 주문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하는 미국 달러 중심의 세계 최대 금융 전산망이다. 국가와 기업, 개인들도 해외 송금과 국제 결제를 하려면 스위프트를 이용하기 때문에 ‘국제 금융의 혈류’로 불린다.


러시아가 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 6,430억 달러 규모의 외환 보유액 접근이 제한을 받게 된다. 푸틴과 그의 측근에 대한 제재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3월 1일부터 3일까지 러시아의 억만장자 재벌과 크렘린궁 인사들에 대한 제재를 발표했다. CNBC 방송은 이날 “최근 몇 주 동안 러시아 상위 20대 부자들의 자산이 800억 달러(약 97조 2,000억 원)가량 사라졌다.”고 전했다. 서방 정보기관들은 푸틴이 전 세계에 차명 계좌로 숨겨 놓은 재산이 1,000억 달러(약 120조 원)에서 2,000억 달러(약 24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한편 속전속결로 마무리될 것 같았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 소총과 화염병 등으로 무장한 우크라이나 국민과 서방에서 무기를 지원받은 정규군이 함께 전선에 나서면서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 곳곳에서는 격렬한 교전이 이뤄졌고, 러시아군의 진격도 둔화됐다. 



러시아 - 우크라이나 갈등의 역사

러시아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가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한 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9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세워진 ‘키예프 루스Kievan Rus(키예프 공국)’라는 나라를 같은 뿌리로 하여 탄생했다. 


푸틴은 지난해 7월 이 같은 역사를 담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통일성에 대하여’란 논문까지 발표했을 정도였다. 우크라이나어는 언어학적으로 러시아어의 남쪽 사투리에 불과하다는 인식, 인종적으로도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게 논문의 요지다. 따라서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해서 대大러시아의 부활을 노리는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친서방으로 기우는 것은 조국 러시아의 분할과 다름없는 일인 셈이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키예프 루스에서 나왔지만 러시아와는 구성 민족도 달랐고, 독자적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한국외국어대학교 올레나 쉐겔Olena Shchegel 교수는 “키예프 루스는 범슬라브민족 국가였지만 지금 우크라이나를 구성한 부족과 러시아를 구성한 부족이 달랐고, 당시부터 키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달랐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다른 것처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도 다르다.”고 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악연 

키에프 루스라는 한 뿌리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는 9세기경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 출현한 첫 국가 ‘키예프 루스Kievan Rus’를 모체로 삼는다. 러시아 역시 키예프 지역을‘러시아의 뿌리’라고 여긴다.‘러시아Russia’라는 이름 역시 루스Rus에서 유래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의 키이우(러시아어로는 키예프)가 수도라 자신들이 종가宗家라고 여긴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지난해 국가명을 ‘루스 우크라이나’(Rus-Ukraine)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키예프 루스는 슬라브족 중에서도 동슬라브족이 세운 국가다. 루스는‘항해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오랜 세월 이웃의 다른 민족들과 싸우며 동슬라브족은단결하게 됐고, 9세기 초 키예프 루스의 영토는 동슬라브족의 거의 절반을 통합할 정도로 커졌다. 키예프 루스는단일국가가 아니라 여러 공국公國이 연합한 형태였다. 통합이 강화되는 데 있어 이후 여러 대공大公(공국의 군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첫 번째 인물이 스뱌토슬라프Sviatoslav였다. 그는 주변의 많은 지역을 정복한 군주로 유명해서‘광개토대왕’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는 962년 실권을 잡으며 정치 전면에 등장한다. 스뱌토슬라프는 궁보다 전쟁터에 있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전쟁의 왕’이었다. 10년간 수많은전투와 전쟁을 치르며 키예프 루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동쪽으로 볼가강과 카스피해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블라디미르 대공 동상


전사한 스뱌토슬라프의 막내아들이 바로 블라디미르Vladimir 대공이다. 그는 통치자로서 키예프 루스를 정치·문화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치세 때 벌어진 중요한 일을하나 꼽자면 비잔틴 제국에서 그리스정교를 받아들인것이다. 이 시기 그리스정교의 영향으로 교회슬라브어인 키릴Cyrill문자가 개발됐고, 향후 건축과 예술이 한층 발전하는가 하면 법률이진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키예프 루스는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Yaroslav대에 황금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야로슬라프의 손자이자 비잔틴 제국 황제의 외손자였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Vladimir Monomakh의 치세를 끝으로 키예프 루스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2세기 초 키예프 루스는 몇몇 독립된 공국으로 분열됐고, 각 공국의 공후公侯가 자신의 공국을 다시 아들들이나 형제들에게 나눠 주면서 여기저기소공국이 생겨났다. 이후 키예프 루스는 1240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키예프 루스 영토


흐멜니츠키의 봉기

키예프 루스가 몽골 침략으로 멸망한 뒤 우크라이나지역은 폴란드Poland의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에 군사 자치체인 ‘코사크Cossack’가 등장하면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나타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영웅으로 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Khmelnytsky(1596~1657)는 그 주역이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코사크 부대는 폴란드에 맞서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코사크 지도자였던 흐멜니츠키는 한때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턱밑까지 진군하며 승리한다.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그는 개선장군이 되어 1649년 키예프로 귀환한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민족국가를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잠시뿐이었다. 약속과 달리 폴란드는 역공에나섰다. 흐멜니츠키는‘모스크바 공국Grand Duchy of Moscow’(지금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악연惡緣의 역사

879~1240년

 키예프 루스의 건립과 멸망

1569년

 폴란드가 현 우크라이나 지역 지배

1654년

 페레야슬라프 협정,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보호 요청

1667년

 드네프로강 좌우로 플란드와 러시아에 분점分占됨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우크라이나가 독립 선포, 러시아 진압에 무산

1922년

 소비에트 연방 편입

1991년

 소련 해체 후 독립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점령

 

페레야슬라프 협정

그런데 도움 요청의 과정에서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이 맺은 ‘페레야슬라프 협정Pereyaslav Council’(1654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원본이 분실됐기 때문이다.소련과 러시아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Czar(러시아어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가 복속됐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단기적 군사 동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며, 원문도 남아 있지 않은 협정 내용을 러시아가‘당시 통일됐다.’며 날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협정 이후 차르의 칭호를‘전全 러시아의 차르’에서‘모든 대러시아(러시아)및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의 차르’로 바꾼다.


그러나 러시아는 협정 2년 만에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우크라이나를 분점分占했다. 흐멜니츠키는 차르의 협정 위반을 비난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수도 키이우를 따라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좌안左岸은 폴란드가, 우안右岸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이후 독립선언을 이어 갔지만 실질적인 독립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가능했다.




홀로도모르(기아로 말미암은 치사致死) 사태

최근 시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을 만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90년 전 우크라이나인수백만 명이 대기근 속에 죽어간‘홀로도모르Голодомор(Holodomor)‘가 바로 그것이다. 우크라이나어로‘기아에 의한 죽음’또는‘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는 1932년과 1933년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량 아사餓死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고 홀로도모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집단화의 부작용으로 생산력이훼손돼 가던 터에 흉작까지 덮쳤다고 하더라도 수확된곡물이 제대로 분배됐다면 대량 아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개별 농가와 집단농장을 뒤져 징발한 곡물을 외국에수출했다. 종자까지 모두 빼앗긴 농민들이 이듬해 파종하지 못해 홀로도모르의 두 번째 해인 1933년의 기근은 더 심해졌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 있는 홀로도모르 추모 소녀상(위키백과)

1932년 8월 7일 발효된 “ 다섯 줄기의 곡물법(the Law of Five Stalks of Grain)”은 밀 다섯 줄기에 나오는 한 줌 정도의 곡식을 빼돌려도 징역 10년 또는 사형에 처한다는 악법이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강압과 수탈 정책은 결국 홀로도모르라는 비극적 사태를 불러왔다.


소련 당국은 ‘국내 여권’을 도입해 굶주림을 못 견딘우크라이나인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까지 막았다. 이중, 삼중의 억압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악명 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이 뒤따랐다. 스탈린은 기근의 책임을 우크라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떠넘겨 약 10만 명이 숙청됐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학자들다수는 이 사건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제노사이드Genocide(집단학살)로 인정한다. 이시기에 우크라인들이작게는 300만 명에서많게는 1,0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키예프 루스가 국교로 삼았던 그리스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지만, 그들만의 고유 종교도 있다. 정교와 가톨릭을 접목한 ‘통합교회’(우니아트)가 그것이다. 소련 지배 시절 탄압받던 통합교회인들이 지금 우크라이나에는 여전히 400만 명가량 된다. 역사학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자연으로부터 축복받은 땅, 하지만 역사로부터 저주받은 땅’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를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번 러시아의 침공은 일본이 다시 한국을 침략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불편한 러시아

1990년 미소美蘇 불가침 협정은 통일된 독일의 나토 가입을 옛 소련이 허락하는 대신, 미국과 서방은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이 민주화된다 해도 나토의 동유럽 확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서방은 이후 “주권국가의 자주적 결정”이라는 이유로 이들 동유럽 국가의 나토 가입을 받아들였고, 지금 동유럽의 옛 소련 위성국가 중 나토 회원국이 아닌 나라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핵심이던 세르비아Serbia와 1991년 소련 해체에 따라 독립국이 된 우크라이나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과 서방은 2008년에는 나토 정상 회의를 통해 장기적으로 우크라이나와 조지아Georgia를 나토에 가입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과거 소련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넘어 ‘슬라브족은 함께’라는 대슬라브주의 역사 인식을 가진 푸틴 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일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이래 줄곧 나토 가입 문제를 놓고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2010년 집권한 친러시아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Victor Yanukovych 대통령은 이전 정부의 친서방 정책 기조를 뒤집고 나토 가입 반대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국민은 대대적인 시위에 나섰고 결국 야누코비치 정부를 몰아내고 친서방 정권을 탄생시켰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나토 가입 움직임은 이때부터 기정사실화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권이 들어서자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했고, 돈바스 지역의 도네츠크Донецьк와 루간스크Луганськ는 인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380만 명 주민 중 상당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러 성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거듭됐고 이로 인해 1만 4,000여 명이 사망했다. 


이번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에 내건 요구 조건도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 불가를 문서로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방 국가들의 분주한 외교 행보 중에 푸틴은 기습적으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 푸틴이 내건 요구 조건은 대외적인 침공의 명분일 뿐 그의 속내는 구소련 국가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고 싶은 것이고 그 중심에 우크라이나가 있는 것이다. 이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Volodymyr Zelenskyy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결사 항전 메시지를 대내외에 천명했고, 지난 3월 1일에는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서를 제출했다. 러시아의 침공이 우크라이나의 친서방화를 가속화시킨 셈이다. 


나토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의 약자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뜻하며, 1949년 미국 워싱턴에서 조인된 북대서양조약을 기초로 미국, 캐나다와유럽 10개국 등 12개국이 참가해 발족시킨 집단 안전 보장 기구다. 2022년 현재 30개국이 회원국으로가입되어 있으며, 본부는 벨기에의 브뤼셀Brussel에 있다. NATO는 창설 당시 냉전 체제하에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구권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 방위 기구(회원국 일방에 대한 공격을 전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로 창설되었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북한 핵 문제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우크라이나는 미국, 러시아에 이은 세계 3위 규모의 핵보유국이었다. 구舊소련이 미국과 서유럽을 겨냥해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배치했기 때문인데, 당시 보유했던 핵탄두만 1,700여 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17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1994년 러시아, 미국, 영국과 ‘부다페스트 각서’를 체결하고 비핵화에 나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안전보장과 경제원조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정작 지난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당시 미국과 영국은 속수무책, 각서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2년 또다시 러시아의 본토 침공을 받았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하면서 안전보장 약속을 받았지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짙은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이런 상황은 비핵화 요구를 받고 있는 북한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북한은 이런 걸 보면서 핵을 포기하게 되면 결국은 자국의 정권 안보나 체제 안보가 보장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기보다는 핵 무력을 증강시키는 쪽으로 나갈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21세기 지구촌은 어떤 이유에서든 핵무기가 사용될 경우 국지전으로 끝나지 않고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해 인류 전멸의 위험으로 치달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오늘날 세계는 냉전 시대와 같이 국제적 분쟁을 야기할 이념 대결은 존재하지 않지만,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과 함께 그 같은 갈등을 해소할 국제기구가 존재치 않아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경우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우려가 커지고 있다.


유렵연합EU

1957년 3월 로마조약체결로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EEC)로부터 시작되었다. 1965년 EEC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와 유럽경제공동체, 유럽원자력공동체 합병조약(Merger Treaty)을 체결하여 3개의 공동체를 통칭한‘유럽공동체(EC)’를 형성하였고, 1993년 11월에 발효된 마스트리흐트조약에 따라 유럽연합(EU)으로 개칭하였다.


1999년에는 EU의 법정 화폐인 유로Euro를 공식 통화로사용하는 국가나 지역을 의미하는 ‘유로존Eurozone’(19개 회원국)이 설립되어 2002년 발효되었다. 2019년 기준,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의 명목 GDP 규모는 약 16조로, 전세계 총 GDP의 약 6분의 1을 점유하고 있다. 2021년 1월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선언인 브렉시트가 발효되어 현재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EU 회원국 중 나토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핀란드, 스웨덴, 키프로스, 몰타 4개국이고 나토 회원국이면서 EU에 속하지 않는 나라는 미국, 영국, 캐나다,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등 6개국이다. (참고: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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