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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인간, 철학자들의 웃픈 삶 - 쿠사누스(1)

2022.04.11 | 조회 793 | 공감 0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상생문화연구소 황경선 연구위원


1️⃣처음으로 우주의 무한을 떠올린 철학자

- 니콜라우스 폰 쿠에스Nicolaus von Kues[쿠사누스]


1. 모든 어린이들이 알아둘 만한  지혜

세계 2차 대전이 한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던 1943년의 일이다. 영국의 폭격기들이 독일 땅을 폐허로 만들고 있는 동안, 런던에서는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한 유태계 망명자가 영국의 공군 총사령부측과의 면담을 시도하고 있었다.


레이몬드 크리반스키란 그의 이름은 사령부내 장성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대학의 강사란 그의 직업이 장군들로 하여금 그의 접견 요청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리반스키는 장교들을, 특히 부사령관인 아더 해리스(일명 폭격기 해리스)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들에게 적어도 모젤에 있는 한 건물만큼은 폭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돼야 한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그 건물이란 베른카스텔-쿠에스에 있는 ‘쿠사누스 요양원’이란 곳이다.


이 요양원은 서양의 유서 깊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이 건물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벌써 그것을 말해준다. 중세 말의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이다.




그때까지 장군들은 이 죽은 사상가에 관하여 전혀 들어 본 바가 없었다. 그리고 철학 강사가 이 철학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을 때도 장군들이 애매하게나마 알아들었던 것은 ‘지금 이 사람에겐 한 종교적인 형이상학자가 문제가 되고 있구나.’하는 정도였다.


불행히도 그 요양원은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모젤 다리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적의 도시 드레스덴을 잿더미로 만들기도 했던 아더 해리스는 그같은 이유로 그 건물을 폭격에서 구제할 방법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해리스의 참모 중 몇 사람이 크리반스키가 들려준 쿠사누스 사상의 분위기에 매료됐다.


이들은 요양원을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모젤 다리를 폭파시킨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자, 아예 다리 자체를 공습 계획에서 몰래 제외시켜 버렸다. 그 덕분에 요양원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젤 다리는 나중에 독일군에 의해 폭파됐고 크리반스키는 쿠사누스 전문가로서 옥스퍼드와 몬트리올 대학교에서 교수로서 활동했다.]




한편 그 즈음 또 한 사람이 전장의 참호 속에 몸을 숨긴 채 이 중세 카톨릭 철학자의 사상의 자취를 쫒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페터 크레머라는 병사이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격 속에서 그에겐 당시 다른 많은 군인들을 괴롭히기도 했던 한가지 물음이 밀려왔다. 그는 전쟁을 지옥, 악, 절대적으로 사악한 것으로 겪었다. 그런데 이 악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가? 신에게서인가? 신으로부터 비롯됐다면 왜 세계에는 악이 존재해야 하는가? 왜 신은 이 세계를 단지 선만이 존재하도록 그렇게 섭리하지 않았는가?


크레머 병사는 여기에 대한 철학적인 해답을 니콜라우스 쿠사누스에게서 발견했다: 신은 악을 만들지 않았다. 따라서 악은 ‘무가치’하다. 그렇지만 신은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 신은 이 가능성을 세계 안에 들여놔야 했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경우 인간은 결단의 자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페터 크레머는 공식적인 쿠사누스 추종자가 됐다. 현재 (1981년 –편집자) 78세인 그는 쿠사누스 요양원에서 매년 약 1만 5천명의 관광객들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다. 요양원의 가장 귀중한 시설이라면 쿠사누스의 저작들과 측량기구들이 소장돼 있는 도서실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행여 요양원의 정숙한 분위기에 미루어 니콜라우스의 성품을 지레 짐작한다면, 왜곡된 인상을 갖고 돌아가는 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상가는 내성內省에 잠긴 수도사나 탈속적인 철학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젊고 야심에 찬 사업가들이라면 그에게서 성공하고 축재蓄財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아주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영악했으며 동시에 경건했다. 그의 뛰어난 머리는 그를 당시 가장 중요한 학문분과이던 철학적 신학이란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기도 했지만, 또한 출세가도를 달리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의 성공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정도였다. 시민의 아들로, 곧 평민으로 태어난 그는 바티칸에서 추기경에 임명됨으로써 귀족의 대열에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말년에는 로마의 수석 보좌신부의 자리를 차지하여 교황 다음가는 지위에 오르기도 했던 것이다.


🔸니콜라우스는 전쟁과 정신적 혼돈으로 가득 찬, 중세의 황혼기인 1401년에 세상에 태어난다. 마르틴 루터 그리고 “선은 느리나 악은 빠르다.”란 말을 남긴, 유명한 국가와 권력의 이론가 마키아벨리가 같은 세기에 태어난다. 푸거 상사商社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싹을 틔우고, 마인츠에서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다.


🔸니콜라우스가 살았을 무렵, 유럽은 터키(오스만투르크 – 편집자)의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유럽을 포위해 들어오던 터키는 급기야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고 그리스까지 밀고 내려온다. 황제와 교회는 속수무책으로 위기에 직면한다. 5백 년 전 오토대제가 세운 독일 제국은 날로 높아가는 유럽 각 민족들의 민족의식과 자존심으로 붕괴 직전에 놓인 상태이다. 쿠사누스가 아홉 살이었을 때, 독일기사단은 트란넨부르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게서 결정적인 패배를 맞는다.


🔸교회 역시 심각하게 분열돼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주교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서로 말다툼과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 보헤미아의 민족주의자이자 개혁파 사제이던 얀 후스가 1415년 콘스탄츠 공회의에서 이교도로 단죄돼 화형을 당한다. 백 년 후 마르틴 루터에 의해 완성되는 교회 분열은 이미 그 조짐을 드러내고 있다. 니콜라우스가 태어날 당시에는 3명의 교황이,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는 2명의 교황이 권력다툼을 벌인다.


하지만 니콜라우스는 유럽의 혼돈에 휘말려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처지를 걱정해야 했다. 전해 내려오는 한 일화는 그의 아버지를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잘 내는 성미 급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가다 모젤강 한 가운데 이를 때쯤 싸움을 벌이게 됐다. 그런데 화가 치민 아버지가 그만 아들을 강물에 내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열두 살이었던 아들은 강가로 헤엄쳐 나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이 맨 먼저 보여준 반응은 그 역시 아버지 못지않은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겁을 먹어서라기보다는 울분을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 버린다. 가출한 그는 3일 동안을 숲을 헤매다 사냥꾼들의 손에 붙잡히게 됐다고 한다. 사냥꾼들은 그가 가출한 뒤로 그의 어머니가 마냥 울고만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면서 그길로 그를 집으로 데려 가려 한다.


그러나 니콜라우스는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자기 청을 들어달라고 조른다. 그는 사냥꾼들에게 자기와 아버지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모든 어린이들이 알아둘 만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이 진심으로 열심히 얘기할 수 있다면 말만으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얘기가 끝나갈 때쯤에는 사냥꾼들은 어느새 그의 편으로 돌아선다. 나아가 그들은 그가 네덜란드에 있는 데벤터의 한 수도원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까지 한다. 니콜라우스는 이 학교에서 3년을 보낸다.


1416년 15살이던 니콜라우는 하이델베르크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 무렵 그는 어떤 것을 공부해야 할지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대학의 교수들은 그의 콧대 높은 기대를 채워주지도 못한다. 교수들은 학식과 논리에서 그를 미처 따라오지 못한다. 그는 교수들에게 앞으로 자기와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이란 점을 공공연하게 내비친다.




그때 이미 30년의 역사를 가진 하이델베르크 대학은 진보적인 학교로 꼽히는 대학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이 학교의 교수들은 이른바 ‘보편자 논쟁’에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학자들 사이의 이 논쟁은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까지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논쟁은 기독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대립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논쟁은 우리가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보편자를 둘러 싼 논쟁이 갖는 의미심장함은 당장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이 논쟁에는 이미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탐구했던 학문적 물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유類와 종種(보편자=일반자)은 낱낱의 것들보다 더 중요한 혹은 더 우월한 실재성을 갖는가 하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실재론자들’이라고 부르는 보수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들은 예를 들어 ‘인간’이란 보편개념은 개별적인 인간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곧 ‘인간’은 이 지상에 최초의 인간 존재가 살기 ‘이전에’ 이미 신의 이념으로서 신 안에 영원히 실재했다는 것이다.


실재론자들은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낸다. 모든 낱낱의 인간들은 그들 안에 보편자-인간-가 표현되고 있는 만큼에 한해서만 ‘실재적’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 사람을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인격으로 만드는 것, 곧 개성이라고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대수롭지 않지 않은 것이다.


그밖의 다른 모든 보편개념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이다. ‘선善’ 자체는 어떤 한 사람이 병든 이웃을 돕는, 구체적 선한 행위보다 더 우월하다. 또한 ‘여성성(Das Weibliche)’은 한 여배우가 지닌 개별적인 여성적인 특징보다 더 풍부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니콜라우스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이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견해들과 마주치게 된다. 교수들은 철저하게 유명론唯名論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이들은 보편자란 현실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도, ‘선’도, ‘여성’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낱낱의 것들만이 현실적(실재적)이다. 따라서 예를 들면 다수의 개별 인간들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인간 무리를 두고 ‘인간’이란 집합명사를 만들어 냈다. 다시 말해 ‘인간’이란 우리들의 지성이 고안해 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이 지상에 인간들이 살기 ‘이전에’가 아니라 살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한다. 따라서 보편개념들은 더 우월한 실재성을 말할 것도 없고, 도무지 그 어떤 실재성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니콜라우스가 이내 이 ‘유명론’엔 무서운 파괴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이론은 당시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공격하는 것이고,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뿌리째 뒤흔드는 것이다. 교회는 실재론자들에게는 신의 한 ‘이념’에 속하지만, 엄격한 유명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실재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현실적인 것은 오직 “가톨릭교회”란 제도 안에 속해 있는 다수의 개별 신도들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교황과 교회에 정면으로 거슬리는 견해이다.


하지만 유명론자들이 특히 관심을 가진 것은 낱낱의 인간들, 그들의 개성, 그들의 개별적인 특성들이다. 그 점에서 유명론은 심리학의 산파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무렵에 ‘양심’이니 ‘책임’이니 하는 개념들이 새롭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되고, 사람들은 점차 교회나 황제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마르틴 루터가 이러한 새로운 인간 유형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달리 있을 수 없다!”


근대의 거의 모든 사상가들은 자신들을 유명론자의 후예들이라고 여긴다. 유명론의 입장에 서서 ‘노동자’란 없고 다만 노동하는, 살아있는 낱낱의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설파한 마르크스가 특히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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