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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三一神誥가 인도하는 진아眞我(24)

2022.04.12 | 조회 7177 | 공감 0

“성통공완性通功完”은 진아眞我가 되는 길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문계석


“총명하고 밝은 사람은 느낌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게 하고, 접촉을 금하고, 오직 한 뜻으로 행하고 삼망을 고쳐서 삼진에 이르면, 삼신의 조화의 기틀이 크게 발휘하느니, (삼신의) 성에 통하여 공업을 완수하는 것이 이것이다[哲 止感 調息 禁觸 一意化行 改妄卽眞 發大神機 性通功完 是]”


(「삼일신고」)-(7)


인류 최초의 경전인 「천부경」은 근원에 대한 우주론적 진리를 상수象數로 천명하고 있다. 그 대의는 원리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이 하나에서 시작[一始]’하고, ‘하나가 세 극으로 분석되며[析三極]’, 결국 ‘하나로 매듭지어진다[一終]’는 논리로 축약되고 있다.




이에 대해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하나가 시작해서 하나로 끝남은 그 진실을 회복하는 것이요, 하나가 셋이라고 함은 짝이 되어 선에 합치하는 것이요, 작은 낱알이 모이고 쌓임은 하나로 돌아감의 좋음(아름다움)이다[然 一始一終 回復其眞也 卽一卽三 對合於善也 微粒積粒 一歸之美也]”고 해석한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로 시작하여 ‘하나’로 매듭지어짐으로써 순환하게 된다. 이는 한마디로 시종일관始終一貫이요 종시일관終始一貫이다. 그런데 시작의 ‘하나’가 결실의 ‘하나’로 매듭지어짐은 진실의 회복이다. 진실의 회복은 분합分合의 과정을 거친 통일統一이다.


즉 ‘하나’가 ‘셋’이라고 함은 세 손길로 갈라져 펼쳐짐이기 때문에 분열을 뜻한다. 그럼에도 세 손길은 옳다는 의미의 ‘선善’에 부합한다. 그리고 ‘선’에 부합한 것들이 쌓여서 ‘하나’로 돌아감은 통일이다. 통일은 분열된 것이 현실적으로 구현되어 ‘하나’로 매듭지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에, 곧 고양高揚된 좋음의 결실이요 진실임을 함축한다. 그래서 ‘하나’는 진리요, 과정으로서의 선이요, 결과로서의 좋음(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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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궁극목적은 근원으로 돌아가 본연의 모습(몸과 마음)을 구현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수행서修行書는 「삼일신고」이다. 「삼일신고」는 “하나를 잡으면 셋을 함의하고 셋이 모여 하나로 귀환하는 도의를 가장 본질적인 강령으로 삼는다[執一含三 會三歸一之義爲本領]”(『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고 적시摘示한다.


이는 수행론의 뿌리가 우주론宇宙論에 있고, 곧 「삼일신고」의 논리가 「천부경」에 있음을 함축한다. 즉 ‘하나’는 우주론적인 진리에서 보면 모든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심성론적인 진리에서 보면 모든 ‘마음[心]의 근원’을 상징한다.


마음의 근원은 ‘하나’이다. ‘하나’는 진실이요, 선이요, 옳음으로 분석되는데, 이는 곧 ‘삼신하느님의 마음’을 함축한다. 달리 말하면 ‘삼신하느님의 마음’은 ‘하나’가 세 손길로 나뉘어 현실적으로 작용함을 뜻한다. 그 마음이 ‘셋’으로 나뉘어 온전하게 작용하여 유기적인 통일성으로 구현具顯된 것은 바로 진실을 회복한 ‘하나’이다. 이는 곧 ‘삼신하느님의 마음’과 동일한 것임을 함축한다. 이 과정은 현실적으로 어떻게 제시될 수 있는가?


앞서 언표言表했듯이, 사람은 누구나 삼신하느님에게서 근본적인 세 가지[三]를 온전하게 받아서 생겨난다. 그 세 가지는 바로 성性ㆍ명命ㆍ정精이다. 이는 전적으로 거짓됨이 없고 순수 그대로라는 의미에서 ‘세 가지 진실한 것[삼진三眞]’이라고 명명한다.


만일 ‘세 가지’가 터럭만큼이라도 물들거나 오염되어서 순수 그대로를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망가진다면, 그것은 ‘삼진’이라 하지 않고, 거짓되고 망령되다는 의미에서 ‘삼망三妄’이라고 한다[眞之爲不染也 其染者爲妄也]’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그런데 오염되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진실[眞]은 ‘하나’다. ‘하나’는 곧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다. ‘일신강충一神降衷’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 속마음은 ‘성ㆍ명ㆍ정’의 세 손길로 확장되어 개별적인 생명의 이치로 밝혀지는데, 이는 과업[業]으로 펼쳐진다.


‘성ㆍ명ㆍ정’으로 나뉘어 펼쳐지는 과업은 제각기 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어져서 지속적으로 작용한다. 지속적인 작용으로 온전하게 구현된 것은 바로 ‘셋’이 모아진 ‘하나’이다. ‘하나’로 구현된 것은 진실한 것으로 바로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은 이렇게 정의한다.

“진실함이란 속마음[衷]이요, 그 속마음은 밝혀 행하는 것[業]이고, 그 행함은 지속[續]이고, 지속은 하나[一]이다[眞卽衷也 衷卽業也 業卽續也 續卽一也]”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은 어디에 안착하여 있으며, 어떻게 발현하여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삼일신고」의 ‘일신장一神章’“성性에서 그 씨앗을 구하라[自性求子], (그러면 그것은) 내려와서 너의 뇌에 있다[降在爾腦]”고 설파한다.


‘씨앗[子]’은 분명히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을 담고 있는 종자種子를 함축한다. 그 종자는 티끌만큼도 거짓됨이 없고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진성’의 이치에 따라 작동한다. 즉 ‘참 마음[眞心]’은 ‘진성眞性’의 이치로 작동하고, ‘망령된 마음’은 ‘망령된 성’의 이치로 작동하여 발현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만일 악한 마음[惡心]을 담고 있는 종자라면, 그것은 악한 성품의 이치로 작동하여 발현될 것이고, 선한 마음[善心]을 담고 있는 종자라면, 그것은 선한 성품의 이치로 작동하여 발현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마음[心]’과 ‘성[性]’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대待對적인 관계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성[人性]’은 ‘진성’인가 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는 “하늘의 명을 받아서 나온 것은 성이다[天命之謂性]”라고 했다. 여기에서 ‘천성’은 본체本體로서의 ‘도심道心’, 즉 ‘천심天心’의 발현이다.


그러나 ‘인성’은 오욕칠정五慾七情으로 물들어 있는 ‘인심人心’의 발현이다. 즉 ‘도심’은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지만, ‘인심’은 항상 변덕스럽고 위태危殆하다. 이로부터 ‘진성’과 ‘인심’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분리되어 있는가 하는 철학적 논쟁이 일어나게 된다.


동양의 성리학性理學에서 중심 논제가 되었던 ‘심즉성心卽性’이니, ‘성즉리性卽理’이니, ‘심즉리心卽理’이니 하는 다양한 논조나, 조선朝鮮의 유학에서 격렬하게 논의되었던 ‘사단칠정논四端七情論’은 이런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다.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진성’은 근원적으로 ‘인성’과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들어와 인간의 ‘성’으로 작동하여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서 본다면, ‘진성’은 ‘천성’이요 ‘불성’이요 곧 ‘인성’이고, 마찬가지로 ‘진심眞心’은 ‘천심天心’이요 ‘불심佛心’이요 곧 ‘인심人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성은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담긴) 진실한 이치의 근원적인 기관이고, 마음은 진실한 삼신하느님이 거주하는 그윽한 방이고, 느낌은 진실이 응대하는 오묘한 문이다.


성에서 이치를 구하면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관이 크게 발동하고, 삼신하느님의 존재를 마음에서 구하면 진실한 몸이 크게 나타나고, 변화와 (진실에) 응함이 서로 느끼면 진실한 과업(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을 밝혀 행함)이 크게 이루어진다


[性爲眞理之元關 心爲眞神之玄房 感爲眞應之玅門, 究理自性 眞機大發 存神求心 眞身大現 化應相感 眞業大成]”)


그런데 ‘진성’은 상단전上丹田을 가리키는 뇌腦에 안착해 있다. 뇌는 생명활동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포괄적인 기관이다. 만일 뇌가 죽거나 완전히 망가져서 활동을 멈추기라도 한다면, 인간의 생명은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이 대두할 수 있다.


뇌는 의식意識과 무의식無意識이 일어나는 마음의 보고이기도 하다. 만일 뇌사(腦死, brain death) 상태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이는 인간이 죽음으로 치닫게 됨을 뜻한다. 왜냐하면 뇌사는 뇌간腦幹을 포함한 전반적인 뇌 기능이 완전히 정지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어떠한 의식이나 무의식도 없을 뿐더러, 자발적인 생명활동도 일어날 수 없음을 뜻한다. 또한 뇌사는 곧 마음의 활동에 따른 ‘성’의 이치, 즉 ‘성’이라는 기관이 작동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결정적으로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인간에게 거주하지 못하고 떠남을 함축한다.




「삼일신고」의 마지막 구절은 ‘성통공완性通功完’이다. ‘성통공완’은 글자 그대로 말하면 ‘성이 통하여[性通] 공업을 완결 짓는다[功完]’는 뜻이다. 이는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내재하여 활동하는, 죽어있는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개별적인 것들에게만 적용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내재해야만 ‘성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통’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성통광명性通光明’, 즉 태양빛처럼 밝고 밝은 광명에 통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삼신하느님의 본성’에 통함을 함축한다. 그런데 ‘삼신하느님의 본성’은 절대적으로 ‘선善’한 마음이다. 그래서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은 ‘하나’가 셋이 되는 과정에서 전적으로 ‘선善’함으로 작용한다.


반면에 ‘공완功完’셋이 하나가 됨, 즉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현실적으로 구현된 ‘하나’를 함축한다. 즉 ‘공완’은 ‘삼신하느님의 진실한 속마음’을 구현하여 자기완성으로서의 진실한 ‘하나’가 됨을 뜻한다.


‘성통공완’은 ‘집일함삼執一含三’과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논리로 요약된다. ‘집일함삼’‘일신강충一神降衷’이 ‘성ㆍ명ㆍ정’의 세 손길로 작동하는 원리이고, ‘회삼귀일’‘성ㆍ명ㆍ정’이 ‘하나’로 모이면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이 현실적으로 구현됨을 뜻하는 원리이다.


‘성통공완’의 구체적인 내용인간이 삼신하느님으로부터 품부 받은 ‘삼진’을 온전하게 회복하여 본연의 ‘선善ㆍ청淸ㆍ후厚’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간이 삼신하느님의 ‘선’을 온 누리에 실현하는 자, 즉 ‘삼신하느님의 속마음’을 밝혀 행하는 과업을 완수하는 자를 지칭한다. 이는 한마디로 정심불변定心不變하여 진실한 ‘하나’를 구현하는 ‘일심一心 가진 자’이다.




‘성통공완’은 ‘일심 가진 자’이다. 이는 ‘신인神人’으로 거듭나는 길이요, 곧 ‘진아眞我’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단군세기』 <서문>은 이렇게 정의한다. 

“하나를 잡으면 셋이 머금고, 셋이 모여 하나로 돌아감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정하여 불변하는 것을 일러 진실한 자아라 하고, 신이 통하여 만변하는 것을 일러 일신이라 부르니, 진실한 자아는 이른 바 일신이 거주하는 집이다.


진실한 근원을 알고, 도법에 의거하여 수행하면, 상서로운 징조가 저절로 이르고 광명이 항상 비추니, 이것이 하늘과 인간이 하나 됨에 있어서 진실로 삼신의 계율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서하고 능히 일자로 귀환할 수 있다


[乃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者 是也. 故 定心不變 謂之眞我 神通萬變 謂之一神 眞我 一神攸居之宮也. 知此眞源 依法修行 吉祥自臻 光明恒照 此乃天人相與之際 緣執三神戒盟而始能歸于一者也]”


‘성통공완 자’는 ‘진아’요, ‘진아’는 ‘일신一神’이 거주하는 집이다. ‘일신’은 신이 통하여 만변하는 것이므로, 진아는 곧 개별자로서의 주체가 보편자로서의 객체와 ‘하나’로 융합됨을 뜻한다. 그래서 ‘진아’는 우주와 자아가 상통하여 ‘하나’가 됨을 함축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힌두사상에서 말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와 같은 뜻이다. 도교에서 말하는 진인眞人, 불교에서 말하는 부다[佛陀], 유교에서 제시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등은 ‘진아’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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