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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충효 정신

2024.05.15 | 조회 489 | 공감 0



한재욱 / 본부도장



들어가는 말

1908년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申采浩는 역사 전기 소설인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이 글을 통해 임진왜란(1592~1598) 때 해전海戰에서 연전연승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시기 트라팔가르 해전(1805) 등에서 맹활약한 해전의 영웅 영국인 넬슨Horatio Nelson과 비교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 평가하였다.


“아, 저 넬슨이 비록 무용이 뛰어나다 하나, 만일 오늘날 20세기에 이충무공李忠武公과 같이 살고 해상에 풍운이 일어 서로 만나게 된다면, 필경 충무공의 아들뻘이나 손자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주로 사극 영화에서 좋은 연출력을 보여 왔던 김한민 감독의 새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가 최근 2023년 연말에 개봉을 함으로써, 〈명량〉⋅〈한산 : 용의 출현〉⋅〈노량 : 죽음의 바다〉 등 이순신 3부작이 마무리되었다.


이 영화 시리즈는 여러 가지 화제와 평가 속에 일정한 문화적 이슈를 점하기도 하였는데, 이번 호에서는 이순신 제독提督*의 삶과 충효의 정신, 리더십과 병법 등을 중심으로 문화⋅진리적 차원에서 정리해 보려 한다.


*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호칭을 ‘장군將軍’으로 하느냐 ‘제독提督’으로 하느냐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 동상을 포함하여 전국에 산재한 동상에는 ‘이순신 장군상’으로 되어 있고, 사회적으로도 별다른 구분 없이 호칭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지상군(육군, 해병대)과 공군의 장수將帥는 장군(General), 해군은 독(Admiral)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이 세계적으로 통일된 호칭법이고, 현재처럼 이순신 장군으로 호칭할 경우 이순신은 지상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의 견해가 있다. 본고에서는 ‘제독’이 바른 명칭임을 전제로 하되, 통용되는 문화 현상을 고려하여 ‘장군’ 호칭도 혼용해 함께 사용하였다.


본 기사의 구성을 위해 STB 상생방송에서 제작한 임원빈 교수의 〈다시 보는 충무공 이순신〉 1, 2강과, 명량해전이 있기 직전 16일간 이순신 장군의 실제 행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를 참고했다. 임원빈 교수는 순천향대 제8대 이순신연구소장을 지냈다. 이번 호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쟁 대비와 충효 정신’을 주제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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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수군의 규모와 무기 체계

상생방송 강의에서 임원빈 교수는 이순신에 대한 기존의 연구가 개인 역량 중심의 서술로 일당백의 무협지 주인공처럼 묘사된 것을 지적한다. 장군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드웨어적 전투력 요소와 소프트웨어적 요소의 합이 적보다 우위에 있어야 이기는 것이다.




소프트웨어적 요소는 이순신 장군의 병법, 전략과 리더십이고, 하드웨어적 요소는 조선 수군이다. 해전이니만큼 함정의 성능과 무기 체계가 중요하다. 전쟁은 과학이지 신화가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이순신 수군의 규모는 어땠을까?


진왜란壬辰倭亂(1592) 당시 조선이 가지고 있는 수군 병력의 정원이 대략 한 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5만 402명으로 돼 있고, 성종 때 편찬된 『경국대전』에는 4만 8,800명으로 돼 있다. 당시 조선 전체 인구는 대략 500~700만 명이라고 한다.


조선은 인구 약 500만 명에 5만 정도의 수군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5천만 명의 인구에 해군 병력은 5만 명이 채 안 된다고 한다. 단순 비교로 말할 순 없지만 비례 관계를 따져 보면 상당히 많은 병력이다.


시대

인구

해군 병력

조선

500만

5만

대한민국

5,000만

5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함선의 수도 세종 때 829척, 성종 때 739척으로 대략 700~800척이었을 것으로 보는데 함선 크기를 떠나서 엄청난 규모이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함포 포격 전술을 구사했다.


당시 수준에서 포를 전 세계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숙련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던 군이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수군이었다.

- 임원빈 교수


일본군은 휴대용 소형 화약 무기인 조총鳥銃을 사용했다. 그런데 조선 수군이 사용한 것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이라는 대형 화약 무기였다. 여기에 조선판 박격포라 할 수 있는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라 불리는 화포火砲가 있었다. 돌이나 납, 철로 제작된 탄환이나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하였다. 비격진천뢰는 터지는 폭탄이다.


여기에 조선 세종 때 개발된 로켓 추진식 화살 병기인 신기전神機箭도 있었다. 왠지 부족해 보이는 이미지였던 임진왜란 시의 조선 수군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대형 화약 무기를 아주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혁신된 수군이었다.


함선艦船의 개발도 중요한 부분이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판옥선板屋船은 굉장히 큰 활약을 하는데, 판옥의 한자가 널빤지 판板 자, 집 옥屋 자이다. 배 위에 판자로 집 모양의 구조물을 얹은 모습으로 일본 배에 비해 굉장히 큰 배이다. 임진왜란 발발 71년 전부터 판옥선 건조 논의가 조정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왜구의 해전 전술은 배를 붙이고 등선하는 육박肉薄 전술이었다. 원거리에서는 조총이나 활을 쏘다가 상대편 배에 기어올라 가서 칼싸움을 벌이는데 일본 병사들이 칼싸움에 너무 숙련돼 있어서 조선 수군이 무력화된다는 것이다.


판옥선은 왜구들이 성을 오르듯 기어올라야 하니 이에 대비할 수 있다. 판옥선의 시제품은 임진왜란 발발 37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서울 마포구 망원동 앞 한강에서 임금님이 보는 가운데 해전 시범을 보이고 여기서 재가가 났다는 기록(명종 10년, 1555년 9월)이 있다. 그 뒤 대대적으로 판옥선이 만들어진다. 임진왜란 발발 27년 전쯤 되면 이 판옥선이 우리 조선 수군의 모든 기지에 배치가 완료되고 임진왜란 시기에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조상들이 당파 싸움이나 하면서, 왜적의 침략을 받은 지 20일 만에 한성이 점령당하고 임금은 의주로 도망가는 등 그간 알고 있었던 기존의 역사 지식과는 달리, 우리는 고려 말부터 왜구에 대비해서 거의 200년 가까이 꽤 착실한 전쟁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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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전쟁 대비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 대비해서 어떻게 전쟁 준비를 했을까? 장군이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이다. 1591년 2월에 부임을 하는데 정읍 현감(종6품), 지금으로 보면 소령⋅중령쯤 되는 계급에서 7계급 특진을 해서 전라 좌수사로 명을 받는다. 장군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바로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 그래서 가자마자 전쟁을 준비한다.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무기 체계 관리를 잘못한 관리들을 적발해 곤장도 친다.


그중에 백미는 거북선의 건조다. 돌격선인 거북선을 만들어서 돛을 달고 천자총통, 지자총통을 싣고 나가서 사격 훈련을 마친 날이 그야말로 소설과 같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이었다. 적어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 전투 준비 태세를 끝내 놓고 있었다. 이 지점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준비 없는 승리는 없다는 것이다. 준비가 없거나 부실한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를 가져오겠는가!




이순신 장군의 생애

이순신 장군의 전반적인 생애를 살펴보자. 장군은 덕수 이씨德水李氏 12세손으로 1545년 서울 건천동(현 서울 인현동)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머니의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 가서 살았기 때문에 실제 고향 역할을 한 곳은 아산이다.


네 형제 중 셋째로, 첫째는 희신羲臣, 둘째는 요신堯臣, 셋째는 순신舜臣, 동생은 우신禹臣이다. 복희씨,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의 앞 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부모님이 성군들의 신하 역할을 하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을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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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원한 멘토 류성룡

유년 시절의 이순신은 진陣 짓는 놀이를 즐겨하였고, 매번 대장을 맡았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柳成龍은 이순신의 둘째 형인 요신과 친구 사이로 이순신보다 3살 터울의 동네 형이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기록에는 류성룡이 “이순신과 같은 동네(건천동)에 살아 이순신의 사람됨을 깊이 알고 있다.”라고 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친구이자 멘토인 류성룡이 자신을 후원하는 대목, 이순신이 류성룡을 그리워하며 걱정하는 광경, 서로 소통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함께 고뇌하는 장면을 기록해 놓았다. 이순신 장군의 꿈에 류성룡이 자주 나타나 나라를 위해 함께 대화를 나눴다는 일기 기록도 여러 번 나오는 걸로 봐서 서로는 영적인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재밌는 사실은 류성룡과 이순신은 천상의 상제님을 지극히 섬기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것이다.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보면 그가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주었다고 한다.


“깊은 밤 어둠 속에 상제上帝님께서 내게 임하시네. 방안 깊숙이 홀로 있는 곳에도 신명神明이 살피고 계신다.…… 삼가고 두려워하여 상제上帝님의 법칙대로 따를지어다.”

(『서애집西厓集』)


서애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도 당연히 상제님께 기도를 올리며 임진왜란에 대처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교훈은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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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전라 좌수사 임명 및 전쟁 준비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2개월 전(1591년, 47세) 정읍 현감(종6품)에서 전라 좌수사(정3품)으로 발탁된다. 류성룡의 천거도 있었지만 선조의 결단이 있었다. 임진왜란 4년 전(1588년)에 선조는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는 특별한 인사 제도를 시행한다.


불차탁용은 관리 계급의 차례를 밟지 않고 특별히 벼슬에 등용한다는 뜻이다. 유능한 관료를 천거하면 쓰겠다는 것인데 여기에 이순신이 발탁된다. 우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정언신이 7~9명의 인재를 천거했는데 이 가운데 이순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장군은 개인의 천거가 아니고 역량을 인정받아 인사 제도에 의해 발탁이 된 것이다.


종6품에서 정3품이면 정말 파격적인 7계급 특진이었다. 그러니 인사의 원칙이 무너진다며 신하들의 반대가 이어졌고, 이에 대해 선조 임금이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나도 이 인사가 상규에 어긋난 걸 알지만, 지금은 나라의 위기 상황이니 더 이상 왈가왈부해서 임지로 떠나는 이순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말로 일축하였다.


여기에 부응해서 이순신은 부임하자마자 바로 철저한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1591년 2월부터 1592년 4월까지 전투 준비 태세를 완비하는데, 특히 거북선의 전력화가 완료된 날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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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진년 해전 전승과 삼도 수군통제사

부임 첫해 임진년에 이순신은 네 차례 출동해 16번의 전투를 치르는데 모두 승리했다. 특히 3차 출동 때 있었던 한산대첩閑山大捷은 조선 수군의 남해안 제해권制海權 장악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58척 대 73척이 싸웠는데 우리는 한 척도 격파가 안 되고 일본 수군은 73척 가운데 59척이 격파 및 나포가 되었다. 거의 전멸 수준의 패배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앞으로 조선 수군과 만나면 회피하라.”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와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 수군은 혁신되고 아주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첨단 수군이었다. 또한 이때까지는 ‘삼도 수군통제사’라는 제도가 없었다. 그런데 임진년 전투에서 경상 우수사, 전라 우수사, 충청 수사 등과 동급으로 


해전을 수행하면서 지휘 체계가 통일이 안 되는 문제점이 노출됐다. 이에 따라 이듬해 계사(1593)년에 삼도 수군통제사라는 직책을 신설하였는데, 이순신이 제1대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1597)이 일어나기 직

전 통제사에서 파직되기 전까지 남해 바다를 책임지면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삼도 수군통제사는 조선 말 수군이 폐지(1895년)되기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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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한산도에서 일본군의 서진 차단

임진⋅계사년부터 정유재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장군이 한 일은 한산도에서 일본군의 서진西進을 차단한 것이었다. 경상도 해역 깊숙이 있는 한산도에서 남해의 바닷길을 차단함으로써 일본군들은 정유재란 전까지 곡창지대인 호남을 공략하지 못했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보급로를 막음으로 인해 어떤 효과가 벌어졌을까. 동쪽으로는 함경도를 점령하고 서쪽으로는 소서행장小西行長 부대가 평양까지 올라가는데 이 일본 선봉 주력 부대들이 전투를 지속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보급이고, 당시 보급로는 육로가 아니라 바다와 강이었다. 남해와 서해, 그리고 한강, 예성강, 대동강 등 강을 통해서 보급로가 형성돼야 하는데 이것이 원천적으로 막힌 것이다.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남해의 바닷길, 일본군의 보급로를 원천적으로 막았기 때문에 일본은 의도하는 방식대로 조선 침략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장군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1593년 7월)에서 “절상호남국가지보장竊想湖南國家之保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호남은 국가의 보루이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는 뜻이다.


한산도에는 장군이 삼도 수군을 통제하던 통제영統制營이 있다. 현재의 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 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통제영을 줄여 통영이 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통제영은 이순신의 한산 진영이었다가 6대 통제사가 두룡포에 통제영을 옮기면서 조선 시대의 유일한 계획 군사 도시가 된다.


한산도의 제승당制勝堂은 장군이 1592년 7월부터 3년 8개월간 거처하면서 삼도 수군을 지휘한 곳이다. ‘승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의미처럼 한산도 진영의 중심 건물로 통제사 이순신의 집무실이자 조선 수군 함대의 사령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장군은 그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으며 나라 걱정에 깊은 시름과 충정을 노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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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파직과 통제사 재임명, 명량해전 승리

장군은 1597(선조 30)년 1월 통제사에서 파직되는데, 정유재란의 조짐이 있고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정보가 있으니 즉시 출격하여 생포하라는 선조 임금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후 통제사가 된 원균元均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는데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사실 이때는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가장 높았던 때이다. 그런데 지휘관이 하나 바뀜으로 인해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 올바른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조정에서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상황은 함선이 다 없어진 상태였는데, 전라도 장흥 회령포에서 경상 우수사 배설裵楔이 도망치며 가져온 함선 십여 척을 모태로 수습을 하여 장군은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승리로 이끌었다. 통제사로 재임명된 것이 1597년 8월 3일이고, 10여 척 전선을 수습한 것이 보름 만인 8월 18일, 그리고 한 달 만인 9월 16일에 명량해전을 치렀다. 실로 믿기지 않는 숨 가쁜 기록이다. 이 와중에 못난 임금 선조는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리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이순신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라는 장계를 올렸다.


김한민 감독은 영화 〈명량〉의 성공 이후 〈명량 : 회오리 바다를 향하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장군이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어 12척의 배를 수습하고, 보성에서 기적적으로 군량미를 확보해 전쟁에 대처하는 전 과정을 장군이 걸었던 코스 그대로 직접 산과 물길을 넘어 따라가 본다. 감독과 출연진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힘겹게 이 길을 따라가는데, 장군은 고문으로 병든 몸을 이끌고 명을 받은 즉시 길을 떠나 때로는 무박으로 강행군을 하며 여정을 이어 갔으니 안타까운 심정이 절로 든다.


당시 이순신 함대 전력

당시 일본군 함대 전력

전선 12척, 가선 1척

전선 133척

수군 1천여 명

수군 1만여 명

협선 32척

지원 별동대 2만 5천

어선 1백여 척

보급선 2백여 척


일반적으로 13척의 배를 가진 충무공이 전선 133척에 보급선과 작은 배들까지 합쳐 약 330척에 달하는 왜군과 싸워 이겼다는 데에 주목하는데, 이 전투에는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일본 지상군은 호남을 쓸고 올라가서 전부 초토화를 시켰다. 그들은 호남을 다 장악하고 있었고 또 영구히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장군의 명량해전의 승리로 다시 적들의 보급로가 막히는 전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 결과로 호남 위에 올라가 있던 일본군들이 내려와서 순천부터 남해 연안에 걸쳐 성을 쌓고 수세적으로 전환하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왜의 함대 300여 척이 몰려온다는 정보에 함대의 상하 장졸들 사이에 극도의 불안감이 퍼져 있었던 정유(1597)년 9월 15일에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요, 살기를 꾀하며 싸우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一夫當逕, 足懼千夫)


6️⃣조선 수군의 재건과 이순신의 순국

1597년 10월에서 1598년 11월 사이에 장군은 쉴 틈 없이 바로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데 주력했다. 명량해전(1597) 때 13척이었던 함선이 노량해전露梁海戰(1598)에서는 70여 척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명明나라에서 수군을 파병하여 원군이 도착했다.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200여 척의 배를 끌고 와서 여러 번의 전투를 치르고 일본군과 대치를 하게 된다. 한마디로 조명 수군 연합 함대가 구성이 됐고,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만든 순천 왜교성倭橋城(예교성曳橋城)을 바다에서 봉쇄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철군 명령이 내려져 있던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일본에서도 상당히 지위가 있는 장수였기 때문에 김해, 사천, 거제도에 있는 일본군들이 총출동을 해서 500여 척의 함선이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구하러 달려왔는데, 이것에 맞서 싸운 것이 노량해전이다. 그리고 이 해전에서 우리의 위대한 리더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순국殉國을 하셨다. 노량해전에서의 승리와 순국(1598년11월 19일)은 성웅 이순신의 위국헌신爲國獻身과 충성의 극치로 평가할 수 있다.




이순신의 충과 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은 가효국충家孝國忠이다. 조선에서 가효국충으로 부를 만한 제1의 모델케이스model case가 이순신 장군이라 해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게 되면 죽기로서 일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들판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권세 있는 곳에 아첨하여 한때 영화를 사는 것 같은 것은 내가 제일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 이항복 『충민사기忠愍祠記』 


이 글은 백사 이항복李恒福이 소개한 이순신의 좌우명으로, 이순신의 인품과 삶의 자세에 대해 함축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더불어 충忠에 대한 장군의 면모를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기록을 보자. 명량해전 직전 10여 척의 전함에 있는 부하 장수들을 다 모아 놓고 연설을 하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다음에야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다.

- 이분 『행록行錄』


『행록行錄』은 이순신 전기傳記 가운데 최초로 쓰인 책이다. 이순신을 가장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전장을 누빈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었다. 장군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해 언제든지 자신의 한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는 그런 분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효孝는 어떠한가.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라 일을 생각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또 병드신 팔십 노친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산에 문안 갔던 나장이 들어왔다. 어머님 평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으니 다행다행이다.

(임진년 3월 29일 일기)


새벽에 어머님을 모시고 일행을 데리고 배에 올라 본영으로 돌아와서 종일토록 즐거이 모시니 다행다행이다.

(병신년 10월 3일 일기)


어머니를 향한 애잔한 표현들이 난중일기 곳곳에 등장한다. 전쟁 중에도 늘 하인을 보내 어머님의 건강을 살피기도 한다. 특히 ‘다행다행’이라고 하여 다행을 두 번 쓰는 구절이 많다. 이 ‘다행’이란 말에서 어머님을 향한 사랑과 효심을 다른 어떤 표현보다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종 순아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뛰며 뒹구니 하늘에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정유년 4월 13일 일기)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 앞에 하직을 구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정유년 4월 19일 일기)


내가 온 마음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했건만 오늘에 이르러 모든 것이 허사가 되어 버렸구나

– 이분 『행록行錄』


백의종군白衣從軍 신분으로 진주에 있는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로 내려가는데 여수에 있던 어머니가 아들을 보기 위해 올라오다 배에서 돌아가신다. 백의종군 처분을 받았으니 나라에 죄를 지어 충忠도 아니고, 그토록 효도하려 했지만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돌아가신 셈이니 효孝도 아닌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때의 상황은 인간 이순신으로서는 참으로 견디기가 어려운 절망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장군은 백의종군하는 입장이라 장례를 준비하는 걸 보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충과 효에 모든 마음을 바쳤건만 이 상황에서 다 무너진 것이다. 이 모든 현실을 극복하고, 장군은 명량해전과 마지막 노량해전을 치르셨다. 장군은 충과 효 모두에서 스스로를 자책하셨지만, 충으로는 나라를 구했고, 효로는 전쟁 중에도 최선을 다해 어머님을 모셨다. 유교에서 ‘효孝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라고 한다. 효도는 일백 행실의 근본이라는 말이다.


또 가르칠 교敎라는 글자는 효도 효孝와 글월 문文을 합한 글자이다. 다시 말해서 교敎는 ‘효도하는 글’이란 뜻이다. 모든 윤리라 하는 것은 효도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 되는 것을 가르치는 교敎 자에 효도 효孝가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장을 누비며 불패의 신화를 이룬 위대한 충무공 이순신에게 충과 효는 그의 험난한 인생을 지켜 준 두 축이었다. 다음 호에는 ‘이순신의 리더십과 병법’이라는 주제로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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