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華陽洞)과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유래

신상구 | 2020.11.22 05:51 | 조회 39 | 추천 0
                                                               화양동(華陽洞)과 화양구곡(華陽九曲)의 유래    

                                                                         괴산의 역사 ,   느티나무통신, 2013년 08월 16일 06시 16분 입력
                     

▲김근수/중원대 향토문화연구소장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華陽洞)은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머물던 사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암은 평소 화양동을 ‘선경(仙境)’이라 여겨 즐겨 찾았다. 우암은 60세가 되는 1666년(현종 7년), 청천에 살던 황서(黃瑞)가 소유한 침류정(枕流亭)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훗날 화양동 안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말년에 이르기까지 은거지로 삼았다. 우암에게 화양동은 산수자연 속에서 평온을 찾고자한 은거처이고 학문정진의 공간이었으며 관직으로 나가거나 물러나 머무는 거점이기도 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가 중화의 주역으로 등장한 명청(明淸) 교체기에 우암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론인 대명의리(大明義理)를 주장했다. 또 청나라 때문에 단절된 중화문화의 적통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암의 이런 숭명(崇明)의식은 훗날 화양동을 대명의리의 산실로 거듭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우암이 사망한 뒤 권상하(權尙夏;1647~1721), 정호(鄭澔;1648~1736) 등의 제자들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神宗)과 마지막 임금인 의종(毅宗)을 제사하는 만동묘(萬東廟)와 송시열을 제향하는 화양서원(華陽書院)을 건립해 우암의 학문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화양동은 우암의 존주(尊周)정신과 숭명(崇明)사상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성역화 되었다.

 

우암과 관련된 사적으로 화양구곡(華陽九曲)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서 구곡(九曲)이란 ‘아홉 구비’를 이룬 물줄기란 뜻이며 남송대(南宋代) 주희(朱熹; 1130~1200)가 머문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된 말이다.

 

무이구곡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의 아홉 구비 경관을 가리킨다. 조선에 주자학이 정착하면서 무이구곡은 도학(道學)의 궁극으로 나가는 순서같이 여겨졌다. 이런 상징성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나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는 주자의 무이구곡과 견줄 수 있는 공간으로서 도산구곡(陶山九曲)이나 고산구곡(高山九曲)을 경영하였다.

 

화양동은 우암이 학문을 한 장소이며 북벌대의(北伐大義)를 상징하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었기 때문에 중원에서 사라진 도학(道學)을 잇는 조선중화의 상징지가 되었다. 이를 체계화하면서 산수 감상을 넘어선 극도의 이념공간으로 다시 구성된 것이 화양구곡이라 할 수가 있다.

 

화양(華陽)의 ‘화(華)’는 중화(中華)를 뜻하며 ‘양(陽)’은 일양래복(一陽來福)을 뜻한다. 『주역(周易)』의 복괘(復卦)는 하나의 양(陽)이 다섯 음(陰)의 아래에 생기는 것으로 음이 지극한 곳에서 양이 회복된다는 걸 뜻한다. 또 양은 군자의 도(道)이므로 양이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는 것은 군자의 도(道)가 사라졌다가 비로소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화양은 ‘되돌아간다(反, 復)’는 뜻이 있으니 혼탁한 세상은 바른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며 지금의 은거는 훗날 세상에 나아가 도를 실천하는 삶으로 돌아갈 것을 뜻한다고 하겠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제1곡 경천벽(敬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곶(巴串)이다.

 

제5곡 첨성대 아래 냇가의 바위에 새겨진 ‘非禮不動(비례부동)’ 글씨 오른쪽에는 장방형의 홈이 움푹 패여 있는데 그 속에 무엇인가 들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이 그 속에 들어 있었을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그 해답은 화양동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화양동지(華陽洞志)』에서 찾을 수 있다. 『화양동지』에는 ‘玉藻氷壺(옥조빙호)’에 대해 “신종황제의 망극한 은혜로 우리가 살 수 있었으니 만세가 되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친히 쓴 글씨 네 글자가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배신 송시열, 문인 권상하, 이선직 등이 의종 어필의 왼쪽에 새기니 거의 천억 년을 함께 전할 것이다. 때는 숭정(崇禎) 90년 정유(丁酉 1717년 8월)이다.”고 하였다. 즉,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신종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권상하 등이 1717년에 새겼다는 기록이다.

 

‘玉藻氷壺(옥조빙호)’에서 ‘옥조’는 임금의 면류관에 다는 비단실로 꿴 옥구슬이라는 뜻이고, ‘빙호’는 얼음을 넣는 백옥 항아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玉藻氷壺(옥조빙호)’를 풀이하면 임금은 깨끗하고 청결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현재 ‘옥조빙호’가 새겨진 바위글씨는 화양동 어느 곳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옥조빙호’ 네 글자는 어디에 새겨 넣은 것일까? 그 해답은 위에서 언급한 ‘의종어필의 왼쪽’에 새겨 넣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즉, ‘非禮不動’ 오른쪽에 있는 장방형의 홈이 바로 ‘玉藻氷壺’ 네 글자가 새겨진 석판이 들어가 있었던 자리인 것이다.

 

실제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1954년 3월 대순진리회 도주가 만동묘와 ‘비례부동’이 새겨진 바위 글씨 암벽을 다녀갔는데, 다음날 닫혀있던 석문이 두 쪽으로 갈라져 열리고 그 안에 ‘옥조빙호(玉藻氷壺)’ 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글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갑오년 삼월에 도주(道主)께서 안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趾: 대개 遺址로 쓴다)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 날에 숭정황제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에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전경(典經)』, 「교운(敎運)」 2장 50절 , 대순진리회출판부, 1989, 214면. 도주(道主)는 조철제(趙哲濟 1895~1958)이다. 갑오년은 1954년이다.)

 

‘만력어필’이란 명나라 신종 황제의 글씨를 말하는 것으로, 바로 ‘옥조빙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1954년까지는 ‘옥조빙호’ 글씨가 써진 석판이 ‘비례부동’ 옆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는 없어진 상태로 빈 공간만 남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었는데 1914년에 탁본한 글씨를 2012년에 발견했다.(‘만력어필(萬曆御筆) 옥조빙호(玉藻氷壺)’ 탁본은 1914년 우인규(禹仁圭 1896-1967)가 화양동에 가서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신위(神位)와 우암의 영정을 참배하고 글씨를 탁본했다. 만력황제는 임진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神宗)이다.)

  

우암 송시열이 화양동에 남긴 유적으로는 암서재(巖棲齋), 비례부동(非禮不動) 각석, 읍궁암(泣弓巖)을 꼽는다.

 

필자는 2008년부터 2010년까지 ‘화양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의 대표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고문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매년 5월부터 10월까지 이 모임에서 문화재청과 괴산군의 지원을 받아 탁본체험, 시조경창, 격몽요결 낭독 등 화양동 생생(生生)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호서(충청남북도) 제일의 명승지라는 찬사를 받았던 화양동은 관광이나 하고 등산이나 하는 장소이기 이전에 우암의 정신과 자취가 깃든 상징공간이었다. 또 화양구곡은 화양동의 유서 깊은 사적과 더불어 구곡문화의 대표적 성과로 길이 보전되길 소원한다.

 

                                                                               <참고문헌과 논문>

  1. 역주 화양동지(2009,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2. 화양서원 만동묘 도록(2011, 국립청주박물관)/윤영진(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논문)

  3. 화양동에 깃든 우암의 얼과 혼(충북개발연구원 김양식)

  4. 대순진리회 전경(典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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