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이태규 화학박사

대선 | 2024.02.07 19:04 | 조회 3929


                                       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이태규 화학박사

    이태규(李泰圭, 1902-1992)는 1902년 1월 26일 대한제국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면 예산리 55번지의 전주이씨 가문에서 한학자인 중농 이용균의 6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李會昌)의 중부(仲父)로 호(號)는 산남(山南)· 산은(汕隱)· 산우(山芋)이고, 종교는 유교(성리학)이다.                                                                        그는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에 무시험으로 입학하여 공부한 후 1년 과정의 사범대학을 수료하였다. 1920년 남원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일본인 교사의 추천으로 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의 관비 유학생이 되었다. 1924년에 과정을 마쳤으나 조선인이기 때문에 교사로 발령을 받지 못했다. 그 때문에 관비로 1924년 일본 교토제국대학 화학과를 무시험으로 입학하고 1927년에 졸업했다. 교토제국대학에는 경성고보 선배 최윤식이 1922년 수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있었다. 이태규는 1931년 교토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조선인 최초로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과 29세였기에 국내 언론뿐 아니라 아사히신문 등 일본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이태규와 동년배로 교토제국대를 같이 다닌 일본 최초 노벨상 수상자 유카와 히데키는 31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역시 교토제국대 동창인 일본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 도모나가 신이치로는 33세에 받았다.

1929년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태규(앞줄 가운데)와 시인 정지용(앞줄 오른쪽 끝). 1931년 조선인 최초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태규는 교토제국대학 교수를 하다 해방 후 귀국해 과학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써 한국 과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태규는 동갑내기 친구 시인 정지용이 소개해준 박인근과 결혼했다. 이태규는 정지용의 손에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태규 박사 전기 © 제공: 조선일보                                                   
   1935년 5월 4일 조선일보는 이태규의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임용 소식을 전했다. 당시 제국대학 조교수는 엄격한 심사를 받아야 했기에, 조선인이 이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다. 그만큼 젊은 과학자 이태규는 독보적이었고, 우리도 과학이 가능하다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태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1938년 미국행을 결심한다. 당시 일본은 미국과 대결 중이었지만 이태규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미국 프린스턴 대학을 고집했다. 비용은 경성방직을 경영하던 김연수가 댔다. 여기서 이태규는 당시 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양자역학을 화학과 접목한 이론을 발전시킨다. 1941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태규는 교토대에서 양자화학을 강의하고, 1944년 마침내 정교수로 승진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태규는 새 국가 건설에 힘을 합치기 위해 귀국한다. 일본 학계의 중심이던 그는 몇 년만 노력하면 충분히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도 있었다. 조선에 유일한 대학이던 경성제국대학은 법문학부와 의학부 두 곳만 운영하며 이공계 교육은 없다가 1940년대 들어 처음으로 이공학부를 설치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바뀌자, 이태규는 이공학부장을 맡아 1946년 7월 경성대학 이공학부 첫 졸업생을 배출한다. 그리고 며칠 뒤 조선화학회(현재 대한화학회)를 만들었다. 교육과정 개편에도 적극 참여한 이태규는 일제강점기 25%에 불과했던 과학 교육 비율을 75%로 올리는 안을 통과시킨다. 그만큼 이태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이때 불어닥친 정치 논쟁이 이태규의 발목을 잡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와 1946년 미군정이 발표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으로 학계가 분열한다. 국대안은 경성대학과 여러 공립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대학 하나를 설립하는 계획으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과 결합하며 학내 소요가 시작되었다. 교수가 무려 380명 해임되고 5000명에 이르는 학생이 제적돼 이제 막 독립한 나라의 교육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신설된 서울대학교에서 문리대 학장이 된 이태규는 사태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1947년 2월 그가 발표한 “신성한 학원으로 돌아오라. 조국의 기대에 대한 보답은 바로 이때다”라는 성명서에 제자들의 요구를 미군정과 협상해 어떻게든 학교를 정상화하려는 대학자의 눈물 어린 호소를 담았다.

  이후 이태규가 학생들에게 약속한 대로 미군 대위가 맡던 서울대 총장은 한국인으로 교체된다. 첫 한국인 총장 이춘호는 수학 교수였다. 제적된 학생들을 다시 학교에 불러들여 1947년 9월부터 국대안은 수습 국면에 들어간다. 그런데 10월 집무를 시작한 이춘호는 불과 7개월 만인 1948년 4월 사임한다. 문제는 이태규 학장까지 사임 압력을 받은 것. 이 사태는 공간 부족으로 법대가 문리대 건물의 일부를 요구하자 문리대 학장 이태규가 반발한 것이 배경이다. 결국 이태규는 1946 대한화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1948년 가을 미국으로 떠났고, 후임은 수학자 최윤식이 맡았다. 일본 못지않은 과학을 꿈꾸었던 이태규는 소모적 분쟁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지만, 그의 교토제국대 동료 교수였던 유카와 히데키는 1949년 일본 최초 노벨상을 받았다.

  1950년 6월 14일 조선일보는 미국으로 떠난 이태규 박사가 유타주립대 교수로 부임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정착한 이태규는 앞만 보고 더욱 연구에 매진했다. 얼마 뒤에는 고분자 유체의 점도를 규명하는 이론을 발표하는 바람에 1965년에 노벨상 수상자 후보 추천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9년에는 노벨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1년 미국 유타 공립대학교 객원교수, 1973년 한국과학원 석좌교수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문교부 과학교육행정특보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에는 태평양과학협회(미국 소재)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5년에는 이론물리센터 소장이 되었다. 그래서 그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 석학이 된 것이다. 서울대 법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임원택은 해방 정국의 정치 과잉으로 이태규가 한국을 떠난 사실이 안타까워 이렇게 말했다. “정계 개편이나 민주주의 입문이나 엔조이하면서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적 화학자 이태규 박사를 이 땅에서 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치매성을 조소해 본다.”

  그러나 정작 이태규 본인은 현실을 탓하기보다 끊임없이 조국의 과학을 고민했다. 한국에 두고 온 제자들이 혼란 속에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미국으로 불렀다. 이들이 학위를 받고 귀국하며 대한민국의 과학계를 다시 세웠다. 과학기술을 강조한 박정희 정부의 등장으로 이태규의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KIST 설립 자문을 받고, 카이스트의 탄생에도 큰 역할을 하며 1973년 귀국해 한국에서 여생을 보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어 박사 12명, 석사 24명 등 후진을 양성했다. 〈수송현상(輸送現象)의 완화원리〉 등 5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미국화학회의 표창을 받았고, 대한민국학술원상 · 국민훈장 모란장(1971) · 서울특별시 문화상 · 세종문화상(1982) 등을 받았다.   

 1992년 10월 26일 노환으로 인해 91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식민지 시절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된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민족의 자랑이었고,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하며 세계적 연구로 노벨상에 근접한 첫 한국인이였으며, 해방 후 혼란에도 굴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써 한국 과학의 토대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첫 과학자가 되었다.         

                       시인 정지용, 육종학자 우장춘과 화학자 이태규의 인연

  1902년생 동갑내기 정지용은 교토 유학 시절 이태규와 친구였다. 이태규는 정지용에게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고, 정지용은 이태규의 대부가 되었다.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정지용은 교토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여성 박인근을 신붓감으로 소개한다. 그녀는 교토 유학생의 리더 이태규를 잘 알고 있었고, 1931년 이태규의 박사 학위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터라 정지용의 중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32년 이태규는 절친한 벗이었던 시인 정지용(鄭芝溶)의 중매로 가톨릭 순교자 집안의 딸 박인근(朴仁根)씨와 결혼, 1남(이회인) 3녀(이주혜, 이신혜, 이정혜)를 두었다. 장남 회인 씨는 서울대를 나와 유타대에서 응집물질 및 통계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녀 신혜(李信惠; 1999년 타계) 씨는 유타대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노스아메리칸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을 거쳐 피츠버그대 생화학교수를 지냈다. 남편 최승철(崔承喆·71) 씨 역시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 수학박사로 웨스팅하우스 연구센터 연구원을 지냈다. 3녀 정혜(靜惠) 씨는 유타대 수학 석사로 케미칼뱅크 뉴욕본사 부사장을 지냈다. 손자들 중엔 이회인 박사의 장남 연(淵·30)씨가 MIT 컴퓨터과학 및 전기공학과 석사이며, 이신혜 박사의 작은 아들 윤(潤·35)씨는 일리노이대 물리학과 석사출신으로 컴퓨터 소프트웨어 회사에 근무 중이다.

교토에 모인 조선 과학자들. 왼쪽부터 우장춘, 이태규, 이승기. 이승기 역시 당시 교토제국대학 화학연구소 조교수였다. /이태규 박사 전기© 제공: 조선일보

  1937년 우장춘이 교토제국대학 조교수 이태규를 찾아왔다.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우장춘은 그 업적으로 1937년 9월 교토에 있던 다키이 종묘 회사의 초대 연구농장장으로 취임했다. 우장춘이 박사 학위를 받을 무렵 그가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국내 언론에 알려졌다. 그런 우장춘이 이태규를 직접 찾아오며 과학자들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우장춘은 일본인으로 살면서도 ‘우’라는 성을 끝까지 유지했고, 아버지 우범선이 만들어둔 한국 호적으로 1950년 귀국했다. 이태규 역시 제국대학 교수였지만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1948년 이태규는 미국으로 떠날 때 가족을 서울에 두고 갔다. 곧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이태규는 가족과 소식이 끊긴다. 유타대에서 이태규가 애타게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부산으로 피란 간 이태규의 가족을 찾은 것은 귀국 후 부산에서 종자 개발에 매진하던 우장춘이었다. 우장춘은 우리 사회가 “국보급 과학자와 가족을 모르는 체한다”며 생활고를 겪던 이태규의 가족을 도왔다. 이런 도움으로 전쟁이 끝난 뒤 이태규는 다시 가족과 무사히 만날 수 있었다.

                                                                <참고문헌>

  1. 신상구, 한민족의 원대한 꿈 노벨상 수상 전략, 대흥사, 2023.12.28. pp.1-2.

  2. 민태기, "조선인 최초의 일본 제국대학 교수...1969년 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조선일보, 2024.2.7일자. A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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